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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15일, 엄마가 집을 비운 지 이제 한 달이 넘었다. 어리둥절 남겨진 아빠와 언니, 나. 우리 세 사람은 엄마의 빈자리를 메우느라 정신이 없다.

아침마다 청소하고, 눈 깜짝할 사이 불어난 빨래를 하고, 빨래가 마르면 곱게 접어 옷장에 집어넣어야 한다. 집에선 더 이상 밥 냄새가 나지 않고, 가스레인지도 사용 빈도가 급격히 줄어서인지 어떨 때는 한 번에 가스 불이 켜지지 않을 때도 있다. 화장실 쓰레기통을 비우고, 누렇게 뜬 변기를 닦고, 음식물 쓰레기와 재활용쓰레기를 내다 버린다. 자고 일어나면 제일 먼저 강아지들의 배변을 치워야 하고, 냄새가 나지 않게 배변 패드도 갈아야 한다. 신발장엔 왜 갑자기 신발들이 쌓여가고, 집에선 왜 퀴퀴한 냄새가 가시질 않는 걸까.

엄마가 집에 있을 때는 미처 알지 못했다. 하루만 청소를 안 해도 집안에 이렇게 개털이 쌓이는 것을, 빨래는 세탁기만 돌리면 끝이 아니라는 것을, 요리는 마술처럼 뚝딱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는 것을, 변기 색깔이 변하기도 한다는 것을, 쓰레기는 아저씨들이 집 앞까지 와서 가져가는 게 아니라는 것을, 강아지들이 똥오줌을 하루에 한 번만 싸는 게 아니라는 것을…. 집에는 매일매일 일거리가 쌓인다. 그동안 이 모든 걸 엄마는 혼자 해왔다. 이제야 그것을 깨달았다.

그렇다고 해서 남겨진 세 사람이 모두 엄마의 빈자리를 메우는 것은 아니다. 지금 집안일의 대부분은 내게 전가돼 있다. 직업군인 생활을 하다가 전역 후 회사 생활을 했던 아빠는 퇴직 이후 집에 계시는 시간이 많지만, 우리네 아버지들이 그렇듯 가사노동을 거의 해본 적이 없다. 프리랜서로 일하는 언니는 최근 바쁘긴 하지만, 쉬는 날조차 피곤하다는 이유로 몸을 거의 움직이지 않는다. 때문에 마침 일을 쉬고 아르바이트를 하며 공부하는, 반 백수인 내가 가사노동을 해야 한다는 게 아빠와 언니의 공통된 생각인 것 같다. 굳이 말은 안 하지만 말이다.

"여태까지 엄마가 혼자 다 했다고 생각해 봐"

엄마가 매일 아침 맞이했을 집. 청소를 해도 다음날 아침이면 늘 이런 상태가 된다. 식탁에는 엄마없는 집에서 주식이 된 빵이 눈에 띈다.
 엄마가 매일 아침 맞이했을 집. 청소를 해도 다음날 아침이면 늘 이런 상태가 된다. 식탁에는 엄마없는 집에서 주식이 된 빵이 눈에 띈다.
ⓒ 김가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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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 났다. 모두 늘 바쁜 것은 아니니, 적당히 역할을 나눠 집안일을 하는 것이 맞는 게 아닐까. 하지만, 애석하게도 그건 나만의 상상이었다. 모두 집안일을 하지 않는다고 나마저 손을 놓을 수 없다는 스스로의 생각은 더욱 날 화나게 했다. 앞으로 엄마 없이 지낼 날들이 아득하기만 했다. 그때 내가 도움을 청한 건 내 친구였다.

기혼인 내 친구는 홀로 가사노동을 모두 맡고 있다. 그 친구가 남성, 게다가 직업도 있다. 이런 조건들을 조합해 볼 때 한국 사회에서는 흔히 찾을 수 없는 친구라고 할 수 있다(물론 부인도 직업이 있다).

그는 성인이 된 이후부터 사회운동, 노동운동을 했던 친구이고 지금까지도 그렇다. 그 영향인지 그 친구는 한국 사회의 여성문제에도 관심이 많았다. 특히 그는 여성의 일방적인 가사노동에 대해 반대한다. 그는 자신이 생각하는 페미니즘을 실천하고, 나름대로 양성평등을 실천하기 위해 5년이 넘는 결혼 생활 동안 요리를 제외한 모든 집안일을 자신이 하고 있다고 말했다.

위로를 받으려고 그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고민을 털어놓으니 친구는 "그냥 네가 다 해, 스트레스받지 말고"란다. 아버지는 오래전부터 그렇게 보고 자랐으니 바뀌기 쉽지 않을 거라는 것, 언니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몇 마디 더 보탰다.

"그리고 엄마가 돌아오면 너라도 앞으로 가사노동을 도와. 엄마가 여태까지 그걸 혼자 다 해 왔다고 생각해 봐. 나중에 네가 다시 일을 시작해서 가사노동을 할 사정이 여의치 않게 되면, 그 모든 걸 책임졌던 어머니께 진심으로 감사하다고 말해."

친구의 단호한 말에 멈칫하다가 나중엔 심술이 났다. 결론이 '너 혼자서 다 해'라니.

엄마의 마음도 이랬을까

오늘도 역시 나는 혼자 집안일을 했다. 아침에 일어나서 쌓인 설거지를 하고, 가만히 있어도 냄새가 나는 강아지 두 마리를 씻겼다. 청소기를 돌리고, 걸레로 바닥을 닦고, 강아지들을 씻기느라 더러워진 화장실을 청소했다. 복층으로 된 집을 청소하는 것만으로도 오전이 훌쩍 지나갔다. 어느새 몸에서는 땀이 배어 나오기 시작했다.

저녁이 되니 집을 나갔던 언니와 아빠가 돌아왔다. 밖에서 사온 먹거리들로 저녁을 해결하니, 또 설거지거리가 쌓였다. 정말… 해도 해도 끝이 없다. 언니는 저녁을 먹은 뒤 방으로 휙 하고 올라가 버리고, 아빠는 텔레비전 앞에 앉았다.

덩그러니 식탁에 남은 나는 눈물이 나려고 했다. 나 혼자 집안일을 한다는 '억울함'에 그런 것도 있지만, 내가 청소하고 치워놓은 것들에 대해 아무 말도 없는 것, 최소한의 미안한 기색조차 없는 것이 더 서러웠다. 그렇게 서러워하다가 엄마 생각이 났다. 엄마의 마음도 이랬을까. '이게 친구가 말했던 것이구나'라는 생각이 스쳐 지나가며 그제야 마음이 동했다.

내가 엄마에게 고맙다는 말을 한 게 언제였을까. "용돈은 아빠가 주니까 엄마는 안 줘"라던 엄마가 가끔 언니 몰래 용돈을 줬을 때, 신발이나 옷을 사줬을 때, 그리고 의무적으로 쓰는 어버이날 편지를 쓸 때. 내가 엄마에게 고맙다고 했던 건 그럴 때뿐이었던 듯하다. 매일 엎드려 걸레질하느라 망가진 엄마의 무릎에, "답답하다"며 고무장갑도 없이 설거지하고 걸레를 빠는 주름진 엄마의 손에 고마웠던 적이 있었던가. 아마 없었던 것 같다.

어떻게 엄마는 20여 년을 참았을까

아빠와 연애하던 시절의 엄마. 엄마도 나 같이 꿈 많은 20대가 있어다는 사실을 쉽게 잊는다. 젊었던 엄마의 꿈 중, 가족 때문에 포기해야했던 것이 얼마나 있었을까.
 아빠와 연애하던 시절의 엄마. 엄마도 나 같이 꿈 많은 20대가 있어다는 사실을 쉽게 잊는다. 젊었던 엄마의 꿈 중, 가족 때문에 포기해야했던 것이 얼마나 있었을까.
ⓒ 김가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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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린 시절부터 "나중에 결혼하지 않을 거야"라고 이야기하곤 했다. 어릴 때는 무슨 생각으로 그런 말을 했는지 도무지 기억나질 않는다. 아마 '평생 엄마, 아빠랑 살 거야'라는 어린아이의 거짓말이 아니었을까. 하지만 내 생각은 스물을 훌쩍 넘긴 지금까지 변하지 않았다. 물론 이젠 나름의 이유가 생겼다. 요즘 흔히 말하는 청년의 고충, '삼포 시대' '육포 시대' 같은 것은 아니다. 내가 하는 일, 앞으로 내가 할 일과 내가 하고 싶을 일들을 포기하고 싶지 않다는 것이 그 이유다.

한국 사회에서 결혼은 여전히 여성 사회활동을 제약한다. 어느 정도 좋아진 것은 사실이지만 많이 바뀐 것은 없다. 아마 가까이서 엄마를 보면서 느낀 게 많아서, 결혼에 대한 거부감이, 엄마가 된다는 것에 대한 부담이 커졌다. 이만큼 자라오면서 나는 깨닫고 있었다. 가정을 꾸리고 가족이 늘어나는 만큼, 가정에서 엄마라는 위치에 있는 여성들은 그 자신을 위해 포기할 것이 하나씩 늘어난다는 것을.

결혼 전 직장에 다니던 엄마는, 결혼 후 군인인 아빠와 이곳저곳 떠돌게 됐다. 그 뒤로 엄마는 늘 집에만 있었다. 워낙 활동적이고 진취적인지라 끊임없이 취미를 갖고 공부를 했지만, 일을 할 순 없었다. 그런 생활이 10년, 20년 굳어져 오다 보니 엄마는 늘 집에만 있어야 하는 사람이 됐다. 마치 당연한 것처럼…. 물론 언니와 내가 커가면서 조금씩 달라지긴 했다. 엄마는 더 활동적인 취미를 가질 수 있었고, 서울에 완전히 자리를 잡은 후에는 전통공예작가라는 직업도 생겼다.

하지만 엄마의 생활은 예전과 많이 달라지지 않았다. 여전히 모든 집안일을 혼자 맡아서 했고, 공예작가로서 작품을 만들 수 있는 시간은 가사노동을 하며 틈틈이 생기는 시간에 한정돼 있었다. 너무 오랫동안, 너무 당연하게 엄마는 자기 자신이 아니라 남편과 두 딸을 위한 삶을 살고 있었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어느 정도 포기하는 것쯤은 엄마니까 당연한 것이라고…. 가족들은 물론 엄마 자신마저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 세월 속에서, 엄마가 얼마나 서러웠을까'라는 생각을 이제야 비로소 하게 됐다. 할 줄 아는 것도 많고, 하고 싶은 것도 많은 사람이 어떻게 이렇게 오랜 시간을 참아 왔을까.

엄마가 돌아오면 하고 싶은 말

스페인에서 여행 중인 엄마. 여행 중에도 집이 걱정되는 건 어쩔 수 없는지, 이틀에 한 번 꼴로 연락을 한다.
 스페인에서 여행 중인 엄마. 여행 중에도 집이 걱정되는 건 어쩔 수 없는지, 이틀에 한 번 꼴로 연락을 한다.
ⓒ 김가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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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월 15일 밤. 엄마는 집을 나갔다. 등에 큰 배낭을 메고. 집을 떠나기 한 달 전부터 엄마는 들떠 있었다. 여전히 집에서 가사노동을 하고 있지만, 마음은 벌써 당신이 떠날 그곳, 스페인에 가 있는 듯했다. 엄마는 1년 전부터 스페인의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고 싶다고 이야기했다. 걷기 운동을 시작했을 때부터 새로 생긴 엄마의 꿈이었다.

아빠는 처음에 "당신이 없으면 집은 어떻게 해!"라며 펄쩍 뛰었다. 하지만, 퇴직 이후 아빠의 오랜 관념에도 조금씩 변화가 생기고 있는 것 같았다. 내가 집 청소를 맡아서 하고 있을 때, 밖에서 들어올 땐 잊지 않고 장을 봐오는 것이나, 손수 식사를 챙겨 드시는 모습을 보면 확실히 그랬다.

앞서 나름대로 불평불만을 늘어놨지만, 아빠도, 언니도, 나도 엄마가 없는 집에서 생활하면서 예전엔 스스로 하지 않았던 뭔가를 하나둘씩 해야 했다. 그러면서 각자가 느끼는 무언가가 있었을 것이다. 내가 엄마의 삶을 돌이켜보며 눈물지었던 것처럼.

이제 5월 말이면 엄마가 돌아온다. 처음엔 언제 오나 싶었던 날이 점점 다가오고 있다. 가족들로선 반가운 마음이지만 엄마는 어떤 마음일까.

엄마가 돌아오면 하고 싶은 말이 있다. 오랜 세월 가족 때문에 포기해야만 했던 엄마의 모든 것에 고맙다는 말, 그리고 무사히 돌아와 줘서 고맙다는 말. 나는 앞으로 지속적으로 가사노동을 분담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엄마의 작품 활동과 취미생활을 지속할 수 있는 시간을 만들기 위해서. 무엇보다, 훗날 나이가 더 들어서 다시 엄마에 대한 글을 쓸 때, 그 글이 지금처럼 참회의 글이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엄마가 빨리 돌아왔으면 좋겠다. 물론 한참 달콤한 여행을 즐기고 있을 엄마는 원치 않겠지만 말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나의 어머니' 응모 글입니다.



태그:#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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