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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랜덤하우스 출판사는 20세기의 위대한 책 100권을 선정하는 설문조사를 했다. 특정한 시기의 위인이나 사건을 '100' 이라는 숫자에 가두려는 시도는 허다했기에 그다지 새로울 것 없는 마케팅의 일환이다. 이러한 행사에서 유독 일등이 누구(무엇)냐에 관심이 쏠리는 건 예나 지금이나 같을 것이다. 특히, 랜덤하우스 독자 설문조사의 결과가 뜻밖이었다. 그것은 영예의 왕관을 듣보잡(듣도 보도 못한 잡놈)이 차지했기 때문이었다.

 

1위는 아인 랜드(Ayn Rand)가 쓴 <아틀라스(Atlas Shrugged), 1957>. 한국인 평균 독서량을 훌쩍 넘는다고 자부했는데, 당시에는 난생 처음 듣는 저자와 책이라 당혹스러웠던 기억이 난다.

 

알고보니 지금껏 2000만 부 정도가 팔린 베스트셀러이고, 미국인이 성경 다음으로 사랑하는 책이라고 한다. 전 세계 독자가 1위로 뽑은 작품 제목과 저자 이름도 모르고, 살 정도면 뭔가 잘못된 게 아닌가 싶었다.

 

<부활>은 읽지 않았어도 톨스토이의 작품이며, 헤밍웨이가 <노인과 바다>를 썼다는 것을 상식처럼 알아야 되듯 말이다. 이렇게 아인 랜드와 <아틀라스>는 묘한 지적 열등감을 유발시켰는데, 정작 이 책을 손에 잡게 된 것은 한참 뒤였다. 가장 큰 이유는 분량이었다. 2003년 민음사에서 나온 번역본은 5권에 2000 페이지나 되는 대작이다. 두께에 기가 죽어 번번이 완독하는 걸 미뤘지만, 언제고 등정해야 될 책으로 단단히 벼르고 있었다.

 

개인적인 각오를 떠나서도 이 책을 신자유주의자가 열광적으로 좋아한다는 점, 그리고 아인 랜드의 사생활이 매우 기이한 것도 관심을 유지하는 데에 한 몫을 했다.

 

양해를 얻고 불륜을 지속하다

 

책이나 사상을 이해할 때, 저자의 인생을 필수로 읽어야할 경우가 있다. 아인 랜드의 경우는 그 관계가 거의 100% 싱크로 된다. 그녀의 사생활, 정신적인 동반자이자 대변자이며 팬이었던 나다니엘 브랜든과의 스캔들, 이후의 전개 과정을 보면 아인 랜드의 철학과 신자유주의를 노골적으로 옹호하는 아틀라스의 정치색이 쉽게 이해된다. 그녀의 생애와 스캔들은 소설 <아틀라스>의 입문서이자 머스트해브 아이템이라 간략하게라도 정리할 필요가 있다.

 

아인 랜드는 1905년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St. Petersburg : 구 소련 때 레닌그라드)에서 태어났는데, 본명은 앨리스 로젠봄이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유대인이고, 자수성가해서 성공한 사람이라 어릴 적 아인 랜드는 유복한 환경에서 자랐다. 아버지가 유대인이었지만, 종교적인 분위기가 강한 가정이 아니었고 유대인이라는 의식과 문화가 그녀에게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고 한다. 그 사건 이전에는.

 

평온한 삶은 1917년 2월 혁명이 일어나며 러시아 황제가 처형되면서, 아인 랜드의 인생을 급격히 변화됐다. 그때 아인 랜드 가족은 큰 아파트에 살고 있었고, 아파트 1층에는 아버지가 운영하는 약국이 있었다. 2월 혁명의 기운은 그녀가 사는 곳에도 몰아쳤고, 얼마 후 어느 날 오후에 아인 랜드를 급습했다.

 

그녀가 약국 안에 있을 때, 갑자기 아버지가 약국에 있던 개인 물품들을 챙겨서 아파트에 감추기 시작했다. 아버지가 다시 약국으로 돌아오자, 무장 군인들이 들이닥치더니 약국 문 앞에 붉은 딱지를 붙였다고 한다. 이후로 아인 랜드 가족의 가게와 개인 재산은 몰수되어 국유화가 되었다. 아인 랜드는 부모가 오랜 시간 노력해서 번 재산을 하루아침에 생면부지인 사람들(특히 노력하지 않는 자)의 공동 재산으로 만드는 공산주의 이념을 납득할 수 없었다.

 

그리고 아파트 발코니에서 혁명을 찬양하고, 노동자 세상을 외치는 무리를 목격하면서 자신은 평생 전체주의와 싸울 것을 결심했다고 한다. 이때 받은 정신적 충격, 노력하지 않은 자들 때문에 노력한 사람을 희생시킨 공산주의 체제의 경험은 그녀 일생에 지울 수 없는 낙인으로 남았을 것이다.

 

1926년 아인 랜드는 러시아를 떠나 미국으로 건너가서, 본격적으로 시나리오 작가의 길을 가게 된다. 1929년 영화 배우였던 찰스 프랭크 오코너와 결혼하고, <파운틴헤드(The Fountainhead), 1943>로 큰 명성을 얻었다. 1950년 나다니엘 브랜든이 아인 랜드에게 팬레터를 보냈는데, 이것이 계기가 되었다. 그는 아인 랜드의 독자이자 친구, 팬으로서 관계를 쌓아간다. 브랜든의 부인이었던 바바라 브랜든도 아인 랜드의 열성적인 팬이 되었고, 아인 랜드 부부는 브랜든 부부를 따라 뉴욕으로 이사하게 된다. 

 

이때, 아인 랜드는 금기의 선을 넘어 15년 연하였던 브랜든과 불륜의 관계가 되고 만다. 그런데 희한한 것은 아인 랜드가 브랜든과 연인이 되었을 때, 이 관계를 숨기려하지 않고 오히려 당당하게 주변인들에게 밝혔다고 한다. 심지어, 그녀의 남편이었던 프랭크 오코너와 브랜든의 부인 바바라 브랜든에게도 양해(?)를 얻고 불륜관계를 유지했다고 한다. 개방적인 서구 사회라 하더라도 몹시 난해한 행동 아닌가!

 

더 재미난 점은 1999년 크리스토퍼 메놀 감독이 아인 랜드의 일생을 다룬 영화를 만들었는데, 이 영화의 원작 시나리오를 쓴 사람이 바바라 브랜든이었다. 정확히는 바바라 브랜든의 소설 <열정의 아인 랜드(the Passion of Ayn Rand), 1986년>를 원작으로 이 영화를 만들었다.

 

바바라 입장에서는 남편과 연인이었던 아인 랜드가 원수처럼 미웠을 테고, 아인 랜드가 브랜든과 만났던 시기는 그녀에게 아픔이었을 것이다. 책 제목에서 유추할 수 있듯, 당시에는 아인 랜드를 이해하지 못했을지라도 말년에는 바바라도 아인 랜드를 이해한 것 같다. 같은 여성이 아닌 철저한 개인주의자이자 자유주의자였던 아인 랜드를.

 

이 에피소드는 그 자체가 영화 스토리다. '객관주의' 로 명명된 아인 랜드의 사상을 몸소 보여준 게 아닐까? 소설 <아틀라스>에서 존 골트는 "나는 결코 다른 사람을 위해서 살지 않을 것이고, 다른 사람에게 나를 위해 살아달라고 부탁하지도 않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래서 불륜은 일반적으로 도덕이나 법, 규칙 같은 것이 '한 개인'을 옭아맬 뿐이다. 이는 극단적인 이기주의로 보이지만, 이것이 바로 신자유주의 핵심이다.

 

거인신 아틀라스에서 노예로

 

추리소설 형태인 소설 <아틀라스>는 정치 소설이자 일종의 계몽서다. 뉴딜 정책을 공격하기 위해, 평등주의의 문제점을 부각시키려는 의도가 짙게 깔려있다. 당시, 미국사회의 화두였던 정부의 시장 개입을 반대하는 자유주의자의 이념 공세를 문학 분야로 확전시킨 모양새였다.

 

특히 경제계에서 케인스와 하이에크의 논쟁이 첨예했는데, 아인 랜드의 사상은 근본적으로 신자유주의의 대부라는 하이에크의 철학과 맞닿아 있다. 하이에크는 <노예가 되는 길(The Road to Serfdom), 1944>에서 복지제도와 약자를 도우려는 온정주의가 결국은 개인을 나태하게 만들어 노예로 전락시킨다고 주장했다. 하이에크의 논리는 간명하다.

 

"정부가 가난한 사람을 위해 무료급식소를 운영하거나 이와 유사한 혜택(복지제도)을 제공하면 당장은 굶주림을 면할 수 있다. 이런 혜택은 개인의 자립을 축소하고, 정부에 손을 벌리고 의존한다. 노력하지 않더라도 배를 채울 수 있기에 인간은 나태해지고, 노예근성을 갖게 된다."

 

하이에크는 전체주의와 공산주의를 예로 들어 경쟁이 사라진 평등주의의 폐해와 이기심의 미덕을 강조한다.

 

이런 배경이 깔린 아틀라스가 어떤 내용과 주제인지 쉽게 짐작된다. 제목에서 보듯 어깨를 움츠린 아틀라스(Atlas Shrugged)는 지구를 짊어지기를 거부한 아틀라스로 번역된다. 아틀라스가 누구인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하늘을 짊어지는 형벌을 받은 거인신이다. 아틀라스가 자기 의무를 저버리면 하늘이 무너지고 세상도 끝이 난다. 아인 랜드는 이 세상을 짊어질, 이 세상을 끌고나가는 지성인과 엘리트, 기업가를 아틀라스에 비유했다. 그런데 그들이 자기 임무를 팽개치겠다고 한다. 왜? 어떻게?


삼성의 이상향 아틀란티스

 

<아틀라스>의 배경은 극단적인 평등주의가 작용하는 세계다. 경쟁은 죄악이고 성과보다는 분배가 우선이며, 창조적인 사고와 결과물은 정부의 방해(규제)로 사장된다. 태커드 대륙횡단 철도 부사장인 대그니, 태커트와 리어든 메탈사의 사장 행크 리어든은 정부의 규제를 뚫고 혁신적인 발명품을 이용해 새로운 철도를 놓으려 한다.

 

그런데 정부의 압박은 심해지고, 결국 동료와 기업가가 하나씩 어딘가로 사라져버린다. 기업가의 파업. 노동자의 전유물로 알았던 파업을 <아틀라스>에서는 기업가의 저항수단으로 제시된다.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그렇게 묘사된) 기업가와 지성인들이 사라지자 곳곳에서 혼란이 가중된다.

 

대그니와 유부남인 리어든과 연인 관계이며, 두 사람은 최후까지 돌파구를 찾으려하지만, 그들의 관계를 눈치 챈 페리스 박사는 리어든을 협박한다. 리어든이 회사를 양도하는 서류에 서명하게 만들고, 정부는 리어든과의 관계를 폭로한다고 협박해 대그니가 동요하는 국민을 안심시키는 대국민 연설을 하도록 강요한다. 대그니는 연설에서 스스로 리어든과의 관계를 당당히 밝히고 정부와 뜻과 반대되는 긴 연설을 토해낸다. 마치 아인 랜드가 브랜든과의 관계를 떳떳이 공개한 것처럼.

 

대그니의 화자는 아인 랜드 그녀 자신이다. 이 연설에는 그녀의 철학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하지만 감정이입이 과한 나머지 작가의 생각을 억지로 구겨 넣고 말았다. 그 순간부터 이 소설은 문학으로서의 재미가 반감되며, 5권에서 수십 페이지에 이르는 존 골트의 연설도 동어반복으로 점철된다. 결국, 우리가(극소수의 엘리트) 이 세상을 이끌어가는 존재이고, 우리가 없으면 세상은 불행해진다는 거다. 우리가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게 어떤 규제나 방해도 하지 말라, 그게 대중들한테도 좋다는 거다.

 

이런 오만함은 어디서 나온 걸까. 아인 랜드의 사상과 신자유주의자의 뿌리는 플라톤의 철인 정치까지 거슬러간다. 플라톤이 주창한 철인 정치는 한 마디로 완벽한 엘리트가 국가를 다스려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자기 스승 소크라테스를 죽인, 아테네의 멍청한 대중처럼 인재를 무용지물로 만든다는 거다. 섬뜩한 것은 플라톤과 그의 제자들이 아테네에 취한 행동과 아틀라스에서 보인 지성인들의 태도가 너무나 흡사하다는 데에 있다.

 

플라톤은 스승인 소크라테스의 억울한 죽음을 보고 정치에 환멸을 느끼고 평생 자기 조국인 아테네와 거리를 두었다. 플라톤의 제자들도 이에 전염된 탓인지 아테네의 국력이 쇠퇴하는 와중에도 등을 돌렸다고 한다. 플라톤의 제자 중에는 뛰어난 인물들이 많았음에도 결과적으로 그들의 행동은 자기 조국이 망하는 데에 일조했다.

 

<아틀라스>에서 아틀란티스의 창시자인 존 골트와 그를 따르는 무리도 마찬가지다. 아틀란티스에 오기 전 기업가는 유전에 화재를 일으키거나 스스로 사업을 그만두어 교통이 마비되고 전기가 나가게 한다. 약탈과 방화로 세상이 무너진다. 그때, 그는 이 세계를 다시 건설하러 나타난다.

 

신자유주의자가 말하는 무한경쟁이나 무 규제는 자신에게 적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간간이 한국 사회에서 "삼성이 망하면, 한국경제가 망한다"라는 협박성 멘트가 삼성과 대기업 옹호론으로 자주 쓰인다. 

 

이 논리대로라면, 삼성의 '경영' 후계자 이건희 회장이 아들 이재용한테 삼성 경영을 물려준 건 반칙이다. 삼성의 운명이 한국경제와 동반된다면, 경영권자는 그토록 엄중한 지위이기에 당연히 차기 경영인은 무한경쟁을 통해 검증된 사람으로 뽑아야 합당하다. 최고 경영자의 실력이 미흡하면 삼성의 미래도 불투명해지고, 한국 경제의 앞날도 그만큼 험난하기 때문이다. 삼성이나 다른 대기업도 사원이나 임원한테는 무한경쟁을 외치지만, 무한경쟁을 통해 경영권을 승계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들은 결코 다른 사람을 위해서 살지 않으니까.

 

극단의 극단은 대안이 아니다

 

소설 <아틀라스>는 분명 매력적인 캐릭터와 인물 묘사, 기업가의 파업이라는 기발한 상상력과 전개가 돋보인다. 문학성도 뛰어나고 리어든과 대그니의 고고함은 신자유주의자의 이상적인 스피릿을 잘 보여준다. 그러나 편파적인 이념과 오만한 편견이 못내 불편하다. 아인 랜드가 살아있다면 꼭 묻고 싶다.

 

아무리 좋은 이념이나 체제이든 극단화되면 당연히 문제가 생긴다. 지금껏 인류 역사에서 자본주의와 자유주의가 가장 우월한 이념이라고 인정한들, 자본주의와 자유주의가 극단적인 평등주의처럼 극한으로 가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극단적인 자본주의와 자유주의의 끝이 <아틀라스>에서 묘사된 극단적인 평등주의 세계보다 나을 거라고 확신하나? 평등주의나 자유주의나 극단으로 가면 둘 다 안 좋다.

 

인터넷에서 소설 <아틀라스> 서평을 검색해보면, 이 소설을 읽고 신자유주의를 찬성하게 됐다는 글이 있다. 이런 걸 보면 놀랍기도 하고 두렵기도 하다. 아인 랜드의 사상을 철학서나 정치서로 썼다면 이런 반향을 일으키긴 힘들었을 것이다.

 

그녀는 어려운 내용을 문학의 틀에서 흥미롭고, 흡입력 있게 구성해서 대중적으로 어필했다. 아인 랜드의 작품은 흥미롭지만, 치명적이다. 한 쪽의 극단이 나쁘다면 반대 쪽의 극단 또한 그리 유쾌한 대안은 아닐 것이다. 99.9%의 사람을 짊어지는 아틀라스는 존재할 수도 없고 바람직하지도 않으니까.

덧붙이는 글 | 중복 게재 아닙니다.


아틀라스 1

에인 랜드 지음, 민승남 옮김, 휴머니스트(2013)


태그:#신자유주의, #아인 랜드, #아틀라스, #평등주의, #하이에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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