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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가다 아이들이 초콜릿을 사달라고 생떼를 부린다.

"많이 먹으면 이가 썩으니까 각자 하나씩만 사줄 게!" 

올해 6살, 4살이 된 아이들은 각자 마음에 드는 초콜릿을 사서 집에 돌아왔다. 그런데 첫째 아이가 초콜릿을 다 먹어치우고는 동생의 초콜릿을 빼앗아 먹으려 했다. 둘째는 냉장고 속 깊숙이 남은 초콜릿을 숨기며 오빠가 볼까 봐 두리번거린다.

엄마가 장롱에 숨겨놓은 것

할머니와 함께 미용실에 가는 엄마.
 할머니와 함께 미용실에 가는 엄마.
ⓒ 공응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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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어린 시절 어머니가 장롱 속 깊이 숨겨놨던 초콜릿이 떠올랐다. 내가 초등학교 1학년 때, 어느 날 학교에 다녀와서 초콜릿을 먹으려는데 냉장고에도 없고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가 않았다. 그리고 며칠이 지나 우연히 장롱 속에 깊이 숨겨져 있는 초콜릿과 사탕을 보게 됐다.

"엄마, 이게 왜 장롱 속에 들어가 있어요?"
"어, 엄마가 먹으려고..."
"엄마, 먹고 싶으면 다 드세요. 그리고 냉장고에 넣어 놓으시고요. 다 녹겠어요."

난 의아했다. 난 초콜릿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 잘 먹지도 않는데... 엄마는 왜 굳이 초콜릿을 숨겼을까. 장롱 속을 보니 마치 보물처럼 초콜릿과 사탕, 과자들이 가득했다. 도대체 언제부터 모았던 것일까.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까지는 우리 엄마가 다른 엄마들과 조금은 다른 것 같다고 생각했지만, 그리 크게 느끼진 않았다. 하지만, 내가 8살이 되자 우리 엄마는 남들과 전혀 다른 엄마라는 것을 알게 됐다.

우리 엄마는 한국전쟁 당시에 태어나셨다. 돌아가신 할머니 말씀에 따르면 피난길에 고열을 앓았는데, 치료를 못 해 지능이 6살 수준에 머물러 있다고 하셨다. 내가 8살이 되면서부터 나는 엄마랑 노는 게 점점 시시해졌다. 엄마는 손가락으로 나를 쿡 찌르고 도망가 놓고선 혼자 까르르 웃었다. 난 신경질 부리며 "귀찮아하지 마!"라고 했다. 그럼에도 엄마는 나의 무뚝뚝한 반응에 아랑곳하지 않고 엄마 나름의 놀이를 하곤 했다.

그리고 어느 순간, 나는 나이에 맞지 않게 어른처럼 행동하고 엄마에게 꾸지람하게 됐다. 나는 엄마가 왜 다른 엄마들과 똑같지 않냐는 원망을 하며 청소년기를 보낸 듯하다. 나이가 들수록 내 머리는 커져 엄마의 아기 같은 행동들이 이해하기 힘들었고, 상대하기 귀찮아졌다. 결국, 나는 말 없는 아이가 됐다. 밖에서는 활발해도 집에만 들어가면 조용해졌다. 당시 내게 엄마는 '엄마라는 존재가 있구나' 정도였던 것 같다. 그래도 엄마는 내가 늦은 저녁 집에 들어가면 환히 웃어주셨다.

내가 대학을 졸업하고 막 사회생활을 시작할 무렵, 나는 여전히 집에 늦게 들어오고 집에서는 조용한 아이였다. 지난 2002년, 엄마는 갑자기 방바닥에 쓰러져 울부짖으며 "죽고 싶다"고 했다. 그 일이 있고 나서부터 엄마는 늘 침울해져 있었고, "죽고 싶다"는 말만 반복했다. 원인 모를 정신장애로 계속해서 병원 생활을 해야 했다. 그날 이후, 나는 엄마와의 대화를 시작했다.

"엄마, 왜 죽고 싶어?"
"엄마, 나랑 케이크 먹으러 갈래?"
"엄마, 나랑 놀이동산 갈래?"
"엄마는 뭐가 제일 하고 싶어?"

나는 마치 참새가 된 것처럼 무뚝뚝한 엄마 옆에서 계속해서 이야기했다. 나는 모든 일을 접고 엄마의 병원에 매일 다니며 엄마의 이야기를 들어줬다. 비록 몇 마디 하지 않았지만, 왜 우울한지, 왜 죽고 싶은지 등을 들으며 엄마를 위로했다. 그리고 몇 개월이 지나 엄마의 병환이 좋아지자 외박을 얻어 놀이공원에 놀러 갔다.

엄마가 준 쪽지에 적혀 있던 말

놀이공원에 놀러간 엄마.
 놀이공원에 놀러간 엄마.
ⓒ 공응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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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나는 다시 엄마의 미소를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엄마는 병원생활을 하며 차차 호전됐다. 그리고 엄마는 글자를 배웠다. 나는 아이들이 연습하는 받아쓰기장을 사서 가나다라부터 하나하나씩 엄마를 가르쳤다. 엄마는 금방 따라 썼다. 그리고, 엄마는 첫 번째 퇴원을 하게 됐다. 길을 걷다가 엄마는 문구점 앞에 멈춘 뒤 나를 바라봤다.

"나 크레파스 사줘."

엄마는 예쁜 크레파스로 그림을 그리고 색칠을 하기 시작했다. 나는 엄마가 이렇게 다시 밝아져서 행복했다. 그리고 나도 일상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지난 2003년, 엄마는 갑자기 증세가 악화돼 다시 입원해야만 했다. 돌발 행동으로 격리돼 면회를 할 수도 없었다. 입원한 지 한 달가량이 지나서야 처음 면회가 허용돼 엄마를 만났다. 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던 엄마는 약 때문인지 고개를 흔들거렸다. 엄마 손에는 꾸깃꾸깃한 종이 한 장이 있었다. 엄마는 내게 편지를 썼다며 그 종이를 내게 건넸다.

'엄마가 아파서 미안해. 너를 너무 고생시키는구나. 미안해. 그리고 간식 많이 사다 줘서 고마워.'

엄마가 정신이 돌아왔을 때 쓴 편지 같다. 글자도 삐뚤빼뚤, 받침도 틀렸지만, 나는 엄마의 글을 다 읽을 수 있었다. 나는 면회를 마치고 병원 담벼락에 혼자 서서 한참을 울었다. '엄마가 내 엄마여서 고마워요'라고 되뇌며. 지금도 엄마는 여전히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고 있다. 엄마는 오랜 병환으로 거동이 불편해졌다.

지난 7일, 아이들에게 "할머니 갔다 드리게 카네이션 사러 가자"고 했다. 아이들은 신나서 신발을 신었다. 마트에 가서 초콜릿도 한 상자 사야겠다. 오랜만에 엄마의 환한 웃음을 볼 수 있을 것 같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나의 어머니' 응모 기사입니다.



태그:#초코렛, #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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