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다른 공무원의 불법행위로 북한에 납북됐다면, 납북기간 동안에는 국가배상청구권의 손해배상 청구소송 소멸시효가 중단된 것으로 봐야한다는 대법원 판결이 나왔다.

 

경남 진해 육군 수송기지창에서 항공기 정비사로 근무하던 군무원 J씨는 지난 1977년 10월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졸지에 납북자 신세가 됐다.

 

사건 당일 함께 비행기 점검을 하던 항공기 검사관 L씨가 시운전 하는 것처럼 속여 J씨를 태운 채로 갑자기 이륙하더니 그대로 군사분계선을 넘어 북한으로 월북한 것이다.

 

당시 관할 보안부대 조사에 따르면 L씨는 동료 부인과의 부적절한 관계로 간통 혐의로 고소당할 상황에 처하자 비행기를 몰고 월북하고, J씨는 비행기 점검차 탑승했다가 L씨의 돌발적인 이륙을 저지하지 못해 함께 월북된 것으로 판단했다.

 

그런데 1982년 7월 L씨와 J씨가 북한 당국으로부터 종신특혜금을 받았다는 내용의 북한 선전전단이 경기도 파주군 일대에서 발견되면서 상황은 달라졌다.

 

육군은 옛 반공법 위반 등의 혐의로 L씨를 기소하고, J씨는 L씨의 월북 의도를 알지 못한 채 비행기에 탑승했다가 이륙 후에 그의 비행을 저지하지 못해 월북했다는 피의사실로 기소중지 처분했다.

 

J씨의 가족은 남편과 아버지가 납북된 것도 억울한데 월북했다는 피의사실로 조사를 받은 뒤 가족 및 친인척은 지속적으로 감시를 받아야 했다.

 

물론 하루아침에 가장을 잃은 가족의 생활은 궁핍할 수밖에 없었다. 부인 A씨와 세 자녀는 한 칸짜리 월세방에서 살며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고통은 이뿐만이 아니었다. 주변에 월북자의 가족으로 알려지면서 A씨는 정규직 일자리를 얻지 못하고 허드렛일로 생계를 꾸려나갔다. J씨의 막내아들은 1993년 단기하사관으로 지원했으나 서류심사에서 신원문제(아버지 월북)로 탈락하고, 사병으로 입대한 뒤에도 신분상 불이익도 받았다.

 

우여곡절 끝에 J씨는 2005년 8월 창원지법에서 실종선고 판결을 받았고, 이후 A씨 가족은 국민고충처리위원회에 "J씨가 자진월북자가 아닌 납북자임을 증명해달라"는 민원을 제기해 2007년 6월 '납북된 것으로 추정된다'는 회신을 받았다.

 

이로 인해 통일부에 낸 납북자 인정신청이 받아들여졌고, 이후 납북피해자보상 및 지원심의위원회에 보상신청을 청구해 2008년 6월 납북자인 J씨에 대한 피해위로금 2629만 원, A씨 가족은 2620만 원의 지급결정을 받았다.

 

아울러 A씨 가족은 2007년 11월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냈고, 1심인 창원지법 제4민사부(재판장 구남수 부장판사)는 2008년 9월 "국가는 A씨에게 4166만 원을, 자녀 3명에게 총 5030만 원을 지급하라"며 원고 승소 판결했다.

 

재판부는 "J씨는 정비사로서 상급자의 지시에 따라 항공기를 정비하다가 L씨의 돌발적인 이륙행위에 따라 동반해 북한으로 넘어가게 된 점, 공무원 L씨의 직무상 고의 또는 과실로 인해 J씨의 의사에 반해 납북된 것이므로 국가는 국가배상법에 따라 J씨 및 가족인 원고들이 입은 손해를 배상할 의무가 있다"고 판단했다.

 

그러자 대한민국은 "국가의 불법행위책임이 인정된다고 하더라도 원고들은 1977년 10월 납북 손해 및 가해자를 알아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청구권을 행사할 수 있었는데, 이 사건 소송은 그때부터 소멸시효기간이 경과한 2007년 11월에서야 비로소 제기됐으므로 손해배상청구권은 소멸시효가 완성됐다"며 항소했다.

 

반면 A씨 가족은 "2007년 7월 통일부장관으로부터 J씨를 납북자로 인정하는 내용의 통보가 있기 전까지는 이 사고가 L씨에 의해 납북됐음이 규명되지 않아 L씨의 불법행위로 인한 것인지를 인식하지 못해 소송을 내지 못했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부산고법 제6형사부(재판장 박효관 부장판사)는 2009년 4월 A씨 가족의 손을 들어 준 1심 판결을 깨고, 원고 패소 판결했다.

 

재판부는 "비록 원고는 공적인 확인이 없어 J씨의 납북사실이나 피고를 상대로 한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의 승소를 확신하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1977년 10월 군무원인 L씨의 불법행위로 J씨가 납북된 사실을 인식했다고 할 것이어서, 원고들의 주장은 받아들이기 어렵다"고 밝혔다.

 

하지만 대법원의 판단은 달랐다. 대법원 제2부(주심 전수안 대법관)는 "국가배상청구권에 관한 시효기간 3년은 '손해 및 가해자를 안 날'에 더해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 때'가 도래해야 비로소 시효가 진행한다"며 원고 패소 판결한 원심을 깨고, 사건을 부산고법으로 돌려보냈다고 19일 밝혔다.

 

재판부는 "공무원의 직무수행 중 불법행위로 인해 납북된 것을 원인으로 하는 국가배상청구권은 북한에 납북된 사람이 국가를 상대로 대한민국 법원에 소장을 제출하는 등으로 그 권리를 행사하는 것이 객관적으로도 불가능하다"며 "따라서 납북상태가 지속되는 동안은 소멸시효가 진행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그러면서 "이와 달리 원심이 이 사건 불법행위가 있은 때부터 손해배상청구권의 소멸시효가 진행한다고 봐 소멸시효가 완성됐다고 판단한 데에는 소멸시효의 기산점에 관한 법리를 오해한 위법이 있다"며 파기환송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법률전문 인터넷신문 [로이슈](www.lawissue.co.kr)에도 실렸습니다.


태그:#납북, #국가배상청구권, #소멸시효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