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구지봉과 수로왕비릉을 먼저 둘러본 답사자는, 왕비릉과 구지봉 사이를 지나는 도로를 타고 남쪽으로 곧장 내려가 김해 시내 중심가에 들어서면서 사적 73호 수로왕릉을 만나게 된다. 경내에는 수로왕릉, 신도비, 왕과 왕비의 신위(神位)를 모신 숭선전(崇善殿), 2대 거등왕부터 9대 겸지왕까지 왕과 왕비를 모신 숭안전(崇安殿) 등이 있다.

수로왕비릉이 사적 74호이니 수로왕릉이 그보다 한 번호 앞이다. 흔히 '부부(夫婦)'라고 하고 '부창부수(夫唱婦隨)'라고 하는 것을 보면 국가가 지정한 사적 번호 역시 세상의 관습을 따른 모양이다. 그래서 그런 것일까, 수로왕비릉은 단출하고 깔끔하게 묘소만 있지만 수로왕릉 일대는 건물들도 많고 터도 넓다. 하지만 수로왕은 왕비보다 10년 뒤에 죽는다. 부창부수가 아니라 부창부수(婦唱夫隨)였다. 그래도 그는 왕비보다 9살 연하였으니, 부부가 살았던 기간은 같은 셈이다.

9세 연상 허황옥, 수로왕보다 10년 먼저 타계

수로왕릉. 뒤편으로 구지봉이 있는 분산 자락이 보인다.
 수로왕릉. 뒤편으로 구지봉이 있는 분산 자락이 보인다.
ⓒ 정만진

관련사진보기


홍살문으로 들어가 수로왕릉 앞에 도달했을 때 제일 먼저 눈여겨볼 것은 정문의 물고기 그림이다. 수로왕릉의 다른 이름인 납릉(納陵)을 써서 흔히 납릉정문이라 부르는 이 문 위에는 물고기 두 마리가 서로 마주보는 그림이 그려져 있다. 그런데 이 물고기 그림은 우리나라에서는 달리 볼 수 없는 것으로, 흥국사의 석조물 및 대웅전에 그려져 있는 코브라 그림처럼, 인도 이요디아 지방 특유의 문양(紋樣)이다. 수로왕릉 정문에 옛날부터 쌍어(雙魚)가 그려져 있었다는 것은 허황옥이 인도에서 왔다는 사실을 증거가 되는 자료로 인정된다.

납릉정문은 닫혀 있어서 일반인이 수로왕릉까지 접근하는 것을 막는다. 하지만 담장이 낮아 수로왕릉의 전체 모습을 보는 데에는 아무런 어려움도 없다. 왕릉은 지름 22m, 높이 6m로 흙을 쌓아 둥글게 만든 원형봉토분(原形封土墳)이다. 무덤 앞 정면 중앙에 상석이 놓여 있고, 그 바로 뒤에는 '가락국수로왕릉(駕洛國首露王陵)'이라는 비석이 세워져 있다.

수로왕릉 정문의 쌍어 조각. 허황옥이 인도에서 왔다는 증거로 채택된다.
 수로왕릉 정문의 쌍어 조각. 허황옥이 인도에서 왔다는 증거로 채택된다.
ⓒ 정만진

관련사진보기


수로왕비릉의 비석이 문득 생각난다. 왕비릉 앞의 비석에는 '가락국 수로왕비릉(伽洛國首露王妃陵)'이 아니라 '가락국 수로왕비 보주태후 허씨릉(駕洛國首露王妃普州太后許氏陵)'이라 새겨져 있었다. 수로왕릉의 비석보다 훨씬 글자가 복잡하게 새겨져 있는 것이다. 핵심은 '보주태후'이다. 1647년(인조 25)에 세워진 비석에 등장하는 '보주'라는 단어는 허황옥을 중국 보주에서 이주한 여인으로 보는 근거가 되기도 한다.

답사 일정을 한정해서 잡기는 어렵겠지만, 수로왕릉은 음력 3월 15일이나 9월 15일에 방문하면 최고의 구경을 즐길 수 있게 된다. 이 두 날 수로왕과 허황후를 기리는 춘추대제(春秋大祭)가 진행된다. 특이하게도 제물을 익히지 않고 사용하는 이곳의 춘추대제는 경상남도 무형문화재 11호로 지정되어 있다. 음력 3월 15일이나 9월 15일에 수로왕릉을 찾아가면 다른 곳에서 보기 어려운 '무형문화재'를 감상할 수 있다는 말이다.

쌍어가 새겨져 있는 정문 아래로 수로왕릉이 보인다.
 쌍어가 새겨져 있는 정문 아래로 수로왕릉이 보인다.
ⓒ 정만진

관련사진보기

수로왕릉 답사의 '꽃'은 춘추 대제

수로왕릉의 춘추 대제는 없어진 지 아득한 나라의 창업주 부부를 모시는 제사이다. 무려 2000년 이상 이어져 온 제례 행사인 만큼 상상만 해도 볼 만하지 않을까 싶어 가슴이 설렌다. 게다가 금관가야의 왕들과 왕후들을 모시는 숭선전과 숭안전을 개방하지 않기 때문에 왕릉을 담장 너머로 잠깐 바라보는 것 외에는 '체험'을 할 것이 없는 이곳이니, 춘추 대제야말로 수로왕릉 답사의 '꽃'이라 할 만하다.

물론 수로왕릉의 춘추 대제가 2000년 동안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지내져 왔다고 말할 수는 없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199년 수로왕이 158세의 나이로 타계하자 장남으로 왕위에 오른 거등왕은 '(수로왕을) 대궐 동북쪽 평지에 (중략) 장사지내고 수릉왕묘(首陵王廟)'라 했다. 제사는 마지막 임금인 구형왕에 이르기까지 '해마다 정월 3일과 7일, 8월 15일과 15일에 푸짐하고 깨끗한 제물을 차려', '대대로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나라가 망한 뒤 잠깐 제사가 없어졌던 듯하다. 661년에 문무왕이 조서를 내린 기록이 그 근거다. '수로왕은 어린 나에게 15대조가 된다. 그 나라는 이미 없어졌지만 그를 장사 지낸 사당은 지금도 남아 있으니 종묘(宗廟)에 합해서 계속하여 제사를 지내게 하라' 이를 두고 일연은 '구형왕이 (532년에) 왕위를 잃고 나라를 떠난 후부터 (661년에 이르는 60년 사이에는) 이 사당에 지내는 제사가 가끔 빠뜨려지기도 했다. (그런데 문무왕이 이를 되살렸으니) 아름답도다, 문무왕이여! 먼저 조상을 받들어 끊어졌던 제사를 다시 지냈으니 효성스럽고 또 효성스럽도다'하고 비평한다. 

문무왕이 다시 살렸다고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수로왕릉의 제사가 그 이후 줄곧 완벽하게 이어지지는 못했을 것이다. 단적인 시기를 예로 들자면, 도굴까지 당하는 임진왜란 등 전쟁 때에 어찌 한가로이 제사 지내는 일이 계속되었을 것인가. 안내판은 '1580년(선조 13)에 영남 관찰사 허엽이 왕릉을 크게 수축(修築)하여 상석, 석단(石壇), 능묘(陵墓) 등을 갖추었다'면서 수로왕릉이 점점 허물어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안내판에 따르면 능비도 '1647년(인조 25)에 세웠으며' 숭선전은 1878년(고종 15년)에 지어져 현판이 걸렸다. 또 그 해에는 '능묘를 개축'하였다.

수로왕릉 묘역 안의 안내 입간판들
 수로왕릉 묘역 안의 안내 입간판들
ⓒ 정만진

관련사진보기


오랜 역사성을 자랑하지는 못하는 수로왕릉 묘역

안내판은 또 수로왕릉이 1878년에 '지금의 모습을 갖추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김해시청 홈페이지는 수로왕릉이 "1963년 사적 73호로 지정되었고, 1964년부터 1994년까지 계속해서 보수공사가 시행되어 현재의 모습으로 정화되었다"고 말한다. 거의 100년의 차이를 보여준다. 과연 어느 쪽이 알맞은 표현일까?

사적 73호인 수로왕릉을 제외하면, 이곳에서 가장 중요한 건물은 숭선전과 숭안전이다. 숭선전은 수로왕과 허황후를 모시는 곳이고, 숭안전은 2대 거등왕, 3대 마품왕, 4대 거질미왕, 5대 이시품왕, 6개 좌지왕, 7대 치희왕, 8대 질지왕, 9대 겸지왕과 그 왕후들을 모시는 곳이다.

1989년에 신축된 숭안전은 역사성은 전혀 없다고 하겠다. 그에 비해 숭선전은 1878년에 '
숭선전(崇善殿)'이라는 이름을 왕으로부터 받으면서 3칸으로 건립된 후 1926년과 1954년에 중수 1973년에 보수되고, 1987년에 이르러서는 줄곧 왕릉 앞에 있었던 것을 현재의 자리로 옮겨지었으므로 숭안전만큼 역사가 얕지는 않다. 하지만 고색창연한 문화재라고 할 정도는 못된다. 그나마 1878년에 지어다고 해도 1926년과 1954년에 '크게(重) 수(修)리'를 한 후 1973년에 또 보(補)태고 고쳤는데다(修), 1987년에 뜯어서 옮겨(移) 지으면서(建) 대대적으로 손을 보았다. 그러므로 수로왕릉 일대가 '1878년에 지금의 모습을 갖추었다'고 말하는 것은 무리다.

숭선전과 숭안전이 나란히 세워져 있다.
 숭선전과 숭안전이 나란히 세워져 있다.
ⓒ 정만진

관련사진보기


수로왕 부부 모시는 숭선전, 그 이후 왕과 왕후를 모시는 숭안전

그러나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예나 지금이나 크게 변화가 없는 자연의 풍경을 즐기러 이곳에 온 것이 아니다. 전통적으로 목조 건물을 지어 온 우리나라에서 어찌 금관가야나 삼국의 나무집이 여태 남아 있기를 바라겠는가. 금관가야의 현장인 수로왕릉에 왔으니 그 시대가 남긴 역사와 설화의 향기를 맡을 줄 알아야 한다. 관련 역사 지식을 되새겨보고, 그 시대를 산 사람들의 생각과 마음을 '내 것'으로 감정이입해 보는 자세, 그것이 참된 여행자의 자세다.

수로왕릉에서 조금 남쪽으로 내려오면 봉황대(鳳凰臺)에 닿는다. 봉황대는 금관가야의 왕궁터로 여겨지는 언덕이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수로왕은 바다 건너 멀리서 찾아온 허황옥과 결혼을 하고도(43년) 임시 궁궐에서 살았는데, 이듬해(44년) 2월에는 이윽고 '좋은 날을 가려 새 궁으로 옮겨간다'고 한다. 그 새 궁궐이 있던 자리가 지금의 봉황대 언덕이다. 물론 아득한 2000년 전의 일이므로 봉황대에 궁궐 건물 등 당시의 것이 분명한 유적이 남아 있지는 않다.

덧붙이는 글 | 2011년 10월부터 2012년 2월 사이에 김해 일원을 여러 차례 답사하였습니다.



태그:#수로왕릉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