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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자르 노인(91)과 대학생 아나이스(23)는 작년 9월부터 동거생활을 하고 있다.
 아자르 노인(91)과 대학생 아나이스(23)는 작년 9월부터 동거생활을 하고 있다.
ⓒ 한경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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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 남부 근교인 앙또니(Antony)에 사는 아자르(Hazard) 노인은 올해 91세다. 3년 반 전에 남편을 여의고 혼자 남게 되었다.

4남매를 둔 노인은 12명의 손주와 12명의 증손주를 두었지만 일부는 지방에 살고 파리나 파리 근처에 사는 자식들도 다들 바빠서 고작 1년에 손가락으로 셀 수 있을 정도만 얼굴을 볼 수 있을 뿐이다.

노인이 작은 시골 마을처럼 아담하고 없는 게 없는 앙또니에 살기 시작한 지는 벌써 16년이 되었다. 은행 지점장이었던 남편과 이전에는 파리에 살았는데 막내 딸이 이 곳에 살고 있어서 딸 근처로 이사를 왔다.

초등학교 교사인 막내 딸이 자주 드나들기는 하지만 남편 사망 이후 휑하니 비어 버린 아파트에서 혼자 살기가 여간 적적한게 아니었다. 남편과 같이 보낸 63년이라는 기간이 무거운 밀가루 포대처럼 어깨를 누르고, 고독이라는 원치 않는 친구가 발뒤꿈치에 달라 붙었다.

비어있는 방 하나를 누군가에게 빌려주고 사람의 기척을 느끼고 싶었던 노인은 일요일마다 나가는 성당에 광고를 냈다. 방을 세 놓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았다. 노인에게 필요한 것은 돈이 아니라 동반자였기 때문이다.

91세 할머니와 23세 여대생의 동거

그러던 중 우연히 가톨릭에서 운영하는 한 협회를 알게되었다. 'Ensemble 2 Generations(두 세대가 같이)'라는 이름의 이 협회는 혼자 살면서 여유 방이 남는 노인들에게 방을 구하는 학생들을 연결시켜 주어 서로 다른 두 세대가 같이 살게끔 연결해 주고 있다.

노인은 즉시 이 협회에 가입했다. 필요한 서류 작성과 연가입비 230유로를 내고 2010년 9월에 첫여학생을 받았다. 회계학을 전공하던 이 학생은 프랑스 학기에 맞추어 2011년 6월까지 살다가 떠나고 여름 방학 이후 작년 9월에 두번째 여학생을 새로 받았는데 서로 죽이 잘 맞아 현재 편안한 동거 생활을 이루고 있다.

환경법학을 전공하고 있는 아나이스(23)는 파리 생활이 처음이다. 파리 북동부 도시인 낭시에서 학사를 마치고 1년 동안 페루 여행을 하고 왔다. 석사 과정은 파리 남11대학인 소(Sceaux)에 있는 대학에서 하게 되었는데 생소한 파리에서 방을 구하기도 힘들고 방값도 지방에 비해 턱없이 비싸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노인 집에서 기거하는 주거방식을 택하였다.

작년 2월에 일찌감치 협회에 신청한 결과 9월 학기부터 이 노인 집에서 살 수 있게 되었다.
노인 집 기거에는 3가지 방식이 있다. 우선 방세 없이 사는 조건인데 저녁 7시부터는 집에 들어와야 하는 구속이 있고, 두 번째는 일정 금액의 적은 방세를 내면서 자질구레한 일을 도와주는 조건, 세 번째는 방을 조건 없이 세놓는 것이다.

아나이스는 방세 없는 조건을 선택했다. 매일 저녁 7시에 들어와야 하는 조건이 부담스럽지 않느냐는 질문에 노인이 이해심이 많아 저녁 8시나 9시에 들어오는 수도 있다고 한다. 석사 과정이라 공부할 양이 많아 어차피 집에 일찍 들어와 공부하기에 별다른 부담감이 없다고 한다.

친구는 일 주일에 하루 자유시간이 주어지는 날에 만난다고 한다. 주말에도 격주 자유주가 있어서 그때를 이용해서 자유시간을 활용하고 있다.

'두 세대가 같이' 협회에서 작성한 아자르 노인과 아나이스의 동거 계약서.
 '두 세대가 같이' 협회에서 작성한 아자르 노인과 아나이스의 동거 계약서.
ⓒ 한경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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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은 외로움 덜고, 학생은 생활비 아끼고

노인에게 동거생활을 하면서 가장 좋은 점이 무엇이냐고 물어보았더니 옆에 사람이 있어서 안정감을 느낀다는 대답이 바로 날아왔다. 특히 혼자서 밤을 지새우기가 무서웠었는데 이제는 옆방에서 사람 기척이 느껴져서 마음 놓고 살 수 있게 되었다는 것.

파출부가 정기적으로 드나들어 청소하고 집안 일을 거들어주지만 아나이스가 저녁에 덧문을 닫아주는 등 계약서에도 없는 자질구레한 일들을 도와주고 있다고 한다. 얼마 전에 눈이 많이 내려서 길이 미끄러운 날에는 아나이스가 미장원에 데려다 주었다고 자랑스럽게 말씀하시기도 하셨다.

아나이스에게는 비싼 방세 절약이라는 커다란 장점이 있고 아무도 모르는 파리 생활에서 인생 경험이 많은 노인과 함께 산다는 편안함이 있다. 멀리 사는 아나이스 부모도 딸이 이사 오는 날 같이 와서 노인을 접해보고는 딸 걱정을 하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

아나이스는 친구들을 집에 오게 할 수는 있으나 남자 친구가 집에 와서 자고 가는 일은 계약서에 금하고 있다. 성관계가 상당히 자유로운 프랑스 대학생들에게 이 조건은 치명적이 될 수도 있어서 아나이스에게 물어보았더니 다른 해결 방법이 얼마든지 있다면서 쾌활하게 웃는다.

현재 파리에는 300여 명에 해당하는 노인-학생 커플이 한 지붕 밑에서 기거하고 있고 파리 근교까지 합치면 이 수치가 1000명에 이른다. 파리의 대학생 수가 대략 35만명 인 점에 비하면 많은 수는 아니다.

3개 협회가 주선... 경쟁률 15:1 치솟아

현재 파리에는 3개의 협회가 노인-학생 동거를 주선하고 있는데 처음부터 일이 쉽사리 진행된 것은 아니었다.

노인들 편에서는 어떻게 모르는 학생을 자기 집에 받아들일 수 있느냐며 거부반응을 보였고 학생들은 학생대로 조용한 환경을 원하는 노인 집에서 어떻게 편하게 살 수 있느냐며 거부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은 많은 홍보가 이루어지고 먼저 시작한 커플들이 성공한 동거생활을 이루자 서서히 관심을 보이는 노인들이 많아지고 있다. 이 독특한 주거 방식이 성공을 거두자 파리 시에서도 나서서 적극적으로 이 협회들을 협찬하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수요가 공급을 웃돌아 노인 한 명당 15명의 학생들이 경쟁을 붙는 형편이다. 또한 노인 중에는 여자 인구가 훨씬 많은 데 많은 이들이 여학생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어서 남학생일 경우 노인 집에 방을 구하기가 더 어려운 상황이다.

일부 협회는 더 많은 노인들을 설득하기 위해 일종의 서비스를 제공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인터넷을 배우고 싶은 노인에게 학생이 컴퓨터를 가르치게 하거나 영어를 배우고 싶은 노인에게 영국 학생을 들여 영어 회화를 배우게 하는 등의 방법을 강구하고 있는데 효과가 좋다고 한다.

노인과 학생의 동거를 주선하는 '두 세대가 같이(Ensemble 2 Generations' 홈페이지
 노인과 학생의 동거를 주선하는 '두 세대가 같이(Ensemble 2 Generations' 홈페이지
ⓒ 한경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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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이 좋고 매부 좋은 주거방법

프랑스 대학생들은 대부분 기숙사에 기거하거나 원룸 시스템인 스튜디오에 살거나 아니면 큰 아파트를 여러 명이 같이 나누어쓰는 '코로카시옹(colocation)' 방식으로 주거 문제를 해결하고 있다.

파리에는 현재 15만개의 기숙사 방이 구비되어 있는데 방값이 월 150유로 정도로 가장 경제적인 방법이나 기숙사 수가 한정되어 있어 방을 구하기가 쉬운 일이 아니다.

스튜디오(원룸)의 경우 주거란이 심한 파리에서는 구하기도 힘들거니와 방세도 한 달에 평균 600~900유로에 해당해 경제력이 없는 학생들에게는 불가능한 일이다. 참고로 리용이나 보르도 등 대도시의 방 값은 파리의 반 값인 300~400유로에 해당한다.

이런 이유로 '코로카시옹(colocation)'에 많은 학생들이 몰리고 있는데 코로카시옹을 하는 사람들의 61.5%가 학생들인 점만 보아도 그 유용성과 경제성이 드러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노인 집에서 무료로 기거하는 방식은 노인에게도 좋고 학생에게도 좋은, 우리 식 표현으로 하자면,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이상적인 주거 방법이 아닐까 싶다.


태그:#노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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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가, 자유기고가, 시네아스트 활동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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