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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 보나파르트.(출처 : 교학사판 고등학교 <세계사>)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출처 : 교학사판 고등학교 <세계사>)

나폴레옹은 왜 위대한 인물이었을까? 자기 사전엔 불가능이 없다고 말해서? 일개 장교가 황제 자리에까지 올라서? 알렉산더 대왕이나 카이사르(시저)에 비견되는 정복활동을 펼쳐서?

그런 이유들도 있지만, 더 결정적인 이유가 있다. 그것은 나폴레옹이 황제에 대한 유럽인들의 인식을 확 바꾸었다는 점이다. '황제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라는 문제에서 그는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이루었다. 이게 무슨 말일까?

대혁명으로 건설된 프랑스공화국의 황제로 취임하기 35년 전인 1769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코르시카섬에서 출생했다. 프랑스보다는 이탈리아에 더 가까운 이 섬은 이전에 페니키아·로마제국·이슬람세력·제노바 등의 식민지였다. 지중해의 정치판도가 바뀔 때마다 섬의 식민 지배자도 바뀌었던 것이다.

제노바 공화국은 지금은 이탈리아의 일개 도시에 불과하지만, 16세기까지만 해도 지중해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한 해상강국이었다. 나폴레옹이 출생하기 1년 전인 1768년까지만 해도, 코르시카의 주인은 제노바였다. 나폴레옹이 엄마 뱃속에 생기던 해에 섬의 식민 지배자가 제노바에서 프랑스로 바뀌었던 것이다.

프랑스 식민지의 백성으로 태어났으므로, 언뜻 생각하면 나폴레옹은 프랑스에서 출세하기보다는 프랑스를 상대로 독립운동을 했어야 한다. 그도 한때는 코르시카 독립운동 쪽으로 '살짝' 기운 적이 있다. 하지만, 잠깐이었다. 그는 기본적으로 프랑스에서의 출세를 생의 목표로 삼았다.

식민지 청년이 25년 만에 본국의 황제가 되다니 

'뭐야? 이거 민족 반역자 아니야?'하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나폴레옹의 가문을 고려하면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일도 아니다. 어느 CF에서는 "나폴레옹, 그가 잠을 정복하지 못했다면 코르시카섬의 어부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라 했지만, 그의 집안은 코르시카의 토착귀족이었다. 전통적으로 외부의 강대국과 제휴하며 지배권을 유지해온 귀족들의 입장에서는, 나폴레옹 같은 삶은 그리 낯설지 않은 것이었다.

나폴레옹의 아버지인 샤를 보나파르트는 프랑스 식민통치하에서 코르시카 귀족대표로 선정됐고, 나폴레옹 본인은 열 살 때인 1779년에 프랑스로 이주해 티롱 사관학교에 입학했다. 그는 프랑스 이주 14년 만에 프랑스군의 임시 준장이 되고, 다시 6년 만에 제1통령(수석 대통령)이 되고, 또 다시 5년 만에 황제가 되었다. 도덕적 평가 여하를 떠나서, 나폴레옹의 출세는 그야말로 경이적인 행진이었다.

나폴레옹이 아무리 유능했더라도 그 시대가 정상적인 시대였다면 이런 출세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대혁명으로 프랑스는 물론 유럽 전체가 흉흉했던 데다가, 나폴레옹이 혁명 수호전쟁에서 뛰어난 전공을 세웠고 나폴레옹 이외에는 프랑스 안보를 지킬 인물이 없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외국에 이민 가서 세탁소 하나 차리고 기반 잡기도 쉽지 않은데, 식민지 청년이 25년 만에 식민본국의 황제가 되었다니! 입을 다물 수 없는 일이다. 세계 이민사에서 유례를 찾기 힘들 것이다.

로마제국의 계승자만이 사용할 수 있었던 칭호, '황제'

나폴레옹(오른쪽)의 황제 대관식. 옆에 있는 교황으로부터 왕관을 빼앗아 스스로 왕관을 쓰는 장면이 인상적이다.(출처 : 교학사판 고등학교 <세계사>)
 나폴레옹(오른쪽)의 황제 대관식. 옆에 있는 교황으로부터 왕관을 빼앗아 스스로 왕관을 쓰는 장면이 인상적이다.(출처 : 교학사판 고등학교 <세계사>)

하지만, 나폴레옹의 황제 즉위는 단지 이런 측면에서만 경탄할 만한 일이 아니다. 또 다른 각도에서 이 문제를 조명할 경우, 우리는 그것이 유럽 문명사에서 획기적인 사건이었다는 점에 주목하게 된다. 서두에서, 나폴레옹의 황제 즉위가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었다고 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서양사 책을 읽다 보면, 유럽 군주들의 칭호가 꽤 '겸손'하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유럽에서는 황제 칭호를 사용하는 군주가 드물었다. 대부분의 군주가 왕이나 공(公)의 자격으로 나라를 다스렸다.

동아시아에서는 중국뿐만 아니라 많은 나라들이 황제·칸·천황 같은 최상의 군주 칭호를 사용했다. 구한말 고종 황제의 사례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조금만 상황이 개선돼도 황제 같은 표현을 사용하는 것이 동아시아의 분위기였다.

조선·명나라 양쪽의 틈바구니에 끼여 멸시를 받던 여진족(만주족)의 수장이 어느 순간 청나라 황제의 타이틀을 사용한 사실에서도 나타나듯이, 동아시아에서는 능력만 있으면 황제니 칸이니 하는 최상의 타이틀을 거머쥘 수 있었다.

이에 비해, 유럽에서는 황제 칭호는 아무나 가질 수 없는 것으로 인식되었다. 그것은 로마제국의 계승자나 사용할 수 있는 것이었다. 이는 로마제국 멸망 이후 유럽 최강대국들이 로마제국 계승권을 내세우면서 패권을 행사한 데 따른 전통이었다.

동로마제국·서로마제국·프랑크왕국·신성로마제국 군주가 황제 칭호를 사용한 것은 그들이 어떤 식으로든 로마제국의 법통을 계승했기 때문이다. 로마제국의 계승자가 황제 칭호를 사용하고 여타 국가들은 그 계승자를 중심으로 형식상으로나마 통합되는 것이 유럽의 오랜 전통이었다. 유럽인들에게 있어서 로마제국의 기억은 이처럼 강력한 것이었다.

'하나의 유럽' 출범을 가능하게 한, 로마제국의 전통 

"그렇다면 '오스트리아 황제'란 표현이 서양사 서적에 자주 나오는 이유는 무엇인가?"라고 질문할 수도 있다. 유럽의 역사학자들 중에는 신성로마제국 황제를 습관적으로 오스트리아 황제로 부르는 이들이 있다. 신성로마의 영역이 독일·오스트리아였고 그때만 해도 독일보다는 오스트리아의 비중이 컸으며 나중에 신성로마가 오스트리아로 연결되었다는 인식에서 습관적으로 그렇게 부를 뿐이다.

"그럼 러시아제국(제정 러시아)이 황제 칭호에 상응하는 차르란 표현을 사용한 이유는 무엇인가?"라고 질문할 수도 있다. 러시아 군주가 차르 칭호를 사용한 것은 러시아가 동로마제국(비잔틴제국)의 법통을 계승했기 때문이다. 차르(tsar)란 표현 자체도 시저(카이사르, caesar)에서 나온 말이다.

러시아를 몽골제국으로부터 해방시킨 이반 3세(1440~1505년)가 동로마제국 황제의 조카를 부인으로 맞이했기 때문에, 러시아 입장에서는 로마제국 계승권을 주장할 '건더기'가 있었던 것이다. 러시아까지도 로마 계승권을 주장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는 것은, 로마제국의 그늘이 유럽에서 얼마나 오랫동안 잔존했는지 잘 보여주는 것이다.

오늘날 유럽이 여타 지역보다 신속히 역내 통합을 달성할 수 있었던 것도 오랜 통합의 전통 때문이라 볼 수 있다. 유럽인들은 제2차 세계대전 직후부터 유럽석탄철강공동체(ECSC) 창설을 추진했고 이를 발판으로 1993년에 유럽연합(EU) 결성까지 이룩했다. 이는 오랫동안 로마제국 계승자를 중심으로 역내 통합을 유지해온 역사적 전통에 따른 것이라 할 수 있다.

로마제국의 마지막 계승자인 신성로마제국이 해체된 1806년부터 유럽연합이 결성된 1993년까지의 시간적 간격은 '불과' 187년간이다. 유럽인들에게 있어서 '유럽이 통합되지 않은 시간'은 전체 유럽 역사에서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로마제국 '정통성' 무시하고 황제가 된 최초의 유럽인 

나폴레옹이 황제에 즉위할 당시의 신성로마제국 황제인 프란츠 2세.(출처 : 위키피디아)
 나폴레옹이 황제에 즉위할 당시의 신성로마제국 황제인 프란츠 2세.(출처 : 위키피디아)
이처럼 유럽에서는 로마제국과 어떤 식으로든 연관되지 않고는 황제 칭호를 사용할 수 없었다. 로마제국의 정통성과 거리가 멀었던 프랑스 군주들이 황제 칭호를 감히 꿈도 꿀 수 없었던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다.
프랑스왕 프랑소와 1세(재위 1515~1547)가 한때 황제 자리에 도전하기는 했지만, 그는 어디까지나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선거에 출마했을 뿐이다. 그가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프랑스왕국이 형식상으로나마 신성로마제국 밑에 있었기 때문이다.

어떤 형태로든 로마제국의 후예임을 자처하지 않고는 황제가 될 수 없었던 유럽. 이런 유럽의 전통을 일거에 무너뜨린 인물이 바로 나폴레옹이었다. 그는 로마제국의 정통성을 무시한 상태에서 황제 자리에 오른 최초의 유럽인이었다.

로마 계승권을 주장할 만한 '건더기'가 있었다면 그도 그랬을지 모르지만, 그에게는 그런 명분이 없었다. 또 그는 그럴 필요도 없었다. 대혁명으로 프랑스뿐만 아니라 유럽 전역이 어수선한데다가 그 자신이 불세출의 군사적 업적으로 세상을 감탄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아무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는 상태에서 당당히 황제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

나폴레옹은 자신의 황제 즉위가 갖는 상징성을 극대화시키고자 쇼를 연출했다. 로마교황 비오 7세를 황제 대관식에 초청해놓고는 일부러 망신을 준 것이다. 대관식 장소인 노트르담 성당에 비오 7세가 먼저 가서 기다리게 해놓고는 자신은 뒤늦게 나타난 것이나, 교황이 왕관을 씌워 주려 하자 얼른 빼앗아 스스로 왕관을 쓴 것 등은 자신의 황제 즉위가 기존 전통을 파괴하는 혁명적 사건임을 보여주기 위한 연출이었다.

"구시대의 전통은 언제라도 깨질 수 있다"

나폴레옹이 황제가 된다는 뉴스를 듣고 가장 불쾌했던 인물은 신성로마제국의 마지막 황제인 프란츠 2세였다. 그는 소식을 듣고 순간적으로 화를 벌컥 냈다. 하지만 잠시 생각해보더니 "아, 그랬구나!" 하면서 자기 무릎을 쳤다고 한다. 로마제국과 관계없이도 황제가 될 수 있구나 하고 생각한 것이다.

안 그래도 신성로마제국을 유지하기 벅찼던 프란츠 2세는 자신이 관할할 수 있는 영역만을 떼어내서 스스로 오스트리아 초대 황제가 되었다. 이로써 신성로마제국은 해체되었다. 1806년의 일이다. 2000년 이상 유럽을 지배하던 로마제국의 정통성은 이렇게 나폴레옹에 의해 한순간에 무너지고 말았다. 이를 계기로 유럽에서는 로마제국과 관계없이 황제 칭호가 사용되기 시작했다.

나폴레옹은 유럽인들에게 '고대 로마제국의 굴레에 얽매일 필요가 없으며 누구라도 능력만 있으면 황제가 될 수 있다'는 교훈을 가르쳐주었다. 구시대의 전통은 언제라도 깨질 수 있는 것이며 그런 것에 얽매이지 않는 자만이 자기 목표를 이룰 수 있다는 것을 나폴레옹은 가르쳐주었다.

"황제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라는 질문 앞에서 나폴레옹 이전의 사람들은 "로마로 가야 한다"고 답했다. 어떤 형태로든 로마제국과 관련성을 맺어야 한다는 뜻에서였다. 하지만, 나폴레옹은 "능력만 있으면 그냥 이 자리에서도 할 수 있다"고 답했다. 이런 점에서 그는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이룬 인물이었다.

덧붙이는 글 | 이 시리즈에서 다루었으면 하는 인물이나 사건이 있으면, <오마이뉴스> 쪽지나 이메일(jkim0815@naver.com)이나 트위터(@jkim0815)를 통해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기사가 되기에 적합한 소재라고 판단되면, 1~2주 이내에 기사로 작성해서 발표하겠습니다.



태그:#나폴레옹, #로마제국, #신성로마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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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패권쟁탈의 한국사,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조선노비들,왕의여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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