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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신하수인>의 극장 포스터.
 영화 <신하수인>의 극장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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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출판인-방송인들은 권력의 새로운 하수인

지난 11일 <신(新)하수인>이라는 제목의 다큐멘터리 영화가 프랑스에서 개봉됐다. 원제목이 <Les nouveaux chiens de garde>라는 이 영화는 직역을 하자면 '집을 지키는 새로운 개'가 된다.

사르트르의 절친한 교우였던 철학가이며 소설가인 폴 니장(Paul Nizan 1905-1940)은 1932년에 <하수인(집 지키는 개)>를 발표했는데 이 책은 중립을 지킨다는 이유로 아무런 정치적 발언을 하지 않는 철학자, 소설가들을 비판하고 있다.

니장에 의하면 지성인의 역할은 정부 권력에 반기를 드는 것인데 침묵하는 지성인들은 정부 권력에 안주하는 것이고 결국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에 바탕한 기존 질서 유지에 커다란 역할을 한다고 비판한 것이다.

세르즈 알리미의 책 <신하수인> 1995
 세르즈 알리미의 책 <신하수인>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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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에 <신하수인>이라는 책 발표됐다. 지금은 월간지 <르 몽드 디플로마티크>의 주간이 된 세르즈 알리미(Serge Hali mi)가 쓴 이 책은 65년이 지난 후에도 이 사회에 여전히 권력의 하수인이 존재함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다. 20세기 말에 등장한 권력의 새로운 하수인은 기자, 출판인, 방송 전문가들로 이들은 기존 질서 유지뿐 아니라 권력 강화에 앞장서고 있다.

이 책은 당시 언론에 광고를 하나도 내지 않고도 25만부가 팔리는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2005년에 개정판이 발간되었는데 지난 주에 개봉된 다큐멘터리 영화는 이 개정판을 영화화한 것이다.

언론, 제4의 권력이 되다

제4의 권력으로 알려진 언론은 19세기 중반에 희미하게 모습을 드러냈는데 그때까지 종교(가톨릭)가 일종의 국민 계몽의 역할을 맡고 있었다. 그러다가 19세 후반에 등장한 학교와 서서히 세력을 장악하기 시작한 언론으로 그 역할이 전이된다.

프랑스의 초등학교 무료 의무교육은 1881년 6월에 쥘 페리(Jules Ferry)에 의해 성립되는데 이유 중의 하나는 이들에게 글을 가르침으로써 언론(당시에는 주로 신문)을 접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이다. 쥘 페리는 기자 출신으로 글을 읽지 못하는 국민이 대다수인 상황에서 신문 발간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을 일찌감치 깨달았다. 당시에 철학자 헤겔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아침에 일어나서 읽는 신문은 현실적인 아침 기도와 흡사하다."

20세기 중반에 들어와서 언론이 방송 매체라는 새로운 형식을 띠고 나타났다. 1960년 대부터 프랑스 가정에 서서히 텔레비전이 침투하게 되고 21세기를 사는 현대인들 가정에 텔레비전 없는 가정이 없고 요새는 인터넷, 핸드폰까지 가세해서 현대인은 화면에서 벗어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텔레비전이 이제는 각 가정의 침실에까지 침투되어 하루 24시간 국민에게 수 없는 오락을 제공한다. 하루 일과에 지친 국민들이 저녁에 집에 들어와서 텔레비전 앞에서 대부분의 저녁 시간을 보내고 있는 상황에서 텔레비전은 국민들에게 알게 모르게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자기 주인과 같은 밥을 먹는 언론인들

이 다큐멘터리 영화는 크게 두 가지로 언론을 비판하고 있다. 첫 번째는 언론을 이끄는 주요인사들과 정치, 경제인과의 밀접한 관계이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이유는 간단하다. 이들 모두가 같은 계급 출신이라는 것이다.

이들은 모두 부르주아 계급 출신으로 씨앙스-포(파리 정치교육 기관), HEC(고급 상대), 고등사범학교 등 명문교 출신으로 같은 교육을 받았으며 서로 친분을 익힌 사이이다. 이들 중에 노동자나 소상인들의 자녀는 찾아보기 힘들다.

<신하수인>의 저자 알리미는 저서에서 미국 기자들의 예를 들고 있는데, 1960년대에 대다수의 미국 기자들이 노동자들과 같은 동네에 살았다. 그러나 많은 기자들이 일년에 10만불 이상의 고소득을 벌고 있는 오늘날 이들이 가진 자의 문제에 더 민감해 지는 것이 현실이다. 최저수당으로 심한 노동에 허덕이는 근로자의 현실은 뒷전으로 물러난 것이다. 

각종 언론은 수시로 전문가들을 초청해 많은 발언권을 주고 있다. 이 전문가들은 보통 대학교수 타이틀을 걸고 있는데 실제로 이들은 이해관계가 얽힌 사기업의 컨설팅 역할을 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 다큐멘터리에서는 지난 30여 년간 10명 미만에 속하는 각종 전문가들이 어떻게 국민을 우롱했는지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는데 결국 이들은 자기가 속한 사기업의 대변인에 불과하였고 이들의 발언은 사기업의 이익을 위한 발언에 지나지 않았다.

장관급에 해당하는 정치인, 대기업 간부들, 각 언론을 대표하는 언론인 등 프랑스 정계, 재계, 언론계를 이끄는 거물들은 매달 마지막 수요일 저녁에 콩코르드 광장에 있는 크리용 고급 호텔에서 정기적인 만남을 갖고 있다. 이곳에서는 여러 가지 안건에 대한 토론이 이루어지는데 이 곳에서 벌어지는 토론은 밖으로 새어 나가서는 안된다는 불문율이 절대적으로 지켜지고 있다. 결국 신하수인인 언론인들이 자기 주인인 정치, 경제인들과 같은 밥을 먹는다는 얘기다.    

영화 <신하수인>이 상영되고 있는 파리 에스파스 셍 미셸 영화관에 줄 서서 표를 사는 관객들.
 영화 <신하수인>이 상영되고 있는 파리 에스파스 셍 미셸 영화관에 줄 서서 표를 사는 관객들.
ⓒ 한경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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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인과 정치, 경제인의 밀접한 관계는 이들 사이에 많은 커플이 존재한다는 점으로도 잘 알 수 있다. 대표적인 케이스로 전 외무부 장관인 쿠슈네르와 여성 거물 언론인 크리스틴 옥크렌트, 전 IMF 회장으로 미국에서 성 스캔들을 일으켰던 스트로스-칸과 언론인 안느 셍 클레르, 2002년에서 10년까지 여러 장관직을 역임했던 보를루와 뉴스 진행자 숀베르그, 사회당 프리메르의 후보였던 몽테부르그와 뉴스 진행자 오드레 쀨바, 해외영토장관 시절에 언론인 마리 드뤼커와 커플을 이룬 바루엥. 현 경제부 장관인 그는 여배우 미셸 라호끄와 새로운 커플을 이루고 있는 등 리스트는 길다.

그리고 사회당 대선 후보인 프랑소와 올랑드는 전 사회당 대선 후보였던 세골렌 루아얄과 결별하고 새로운 동반자를 얻었는데 이 동반자도 현직 기자이다. 옥크렌트의 경우는 남편 쿠슈네르가 외무부 장관 시절에 프랑스 24 언론의 국장으로 임명되기도 해서 만인의 입방아에 오르기도 했다.

세계언론자유 38위... 이유 있었다

이 다큐멘터리 영화가 두번째로 비판하고 있는 것은 대부분의 언론이 독립성을 잃고 있다는 점이다. 이유는 이들이 모두 국가 소유이거나 대기업 소유이기 때문이다. 프랑스는 프랑스2와 프랑스3, 프랑스4가 국영 방송이고 나머지 TF1, M6, Canal + 등의 민영 방송인데 TF1는 대기업 부이그(Groupe Bouygues) 소유이고 M6는 라디오, tv 그룹인RTL, Canal +는 비반디(Vivendi) 소유이다.

프랑스 국영 방송국장은 사르코지 대통령에 의해 선택되어지고 있는데 2008년에 사르코지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프랑스 국영 TV의 대주주인 국가가 방송국장을 임명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국가가 EDF(전기공사)나 SNCF(국영 철도), RATP(국영 지하철)의 장을 임명하는 것과 같은 이유이다."

그러나 바로 이런 이유로 프랑스는 1월 24일 국경없는기자회가 발표한 '세계언론자유지수'에서 38위라는, 유럽국으로서는 상당히 저조한 성적을 차지했다. 참고로 총 179개국 중에서 핀란드와 노르웨이가 공동 1위, 에스토니아와 네덜란드가 공동 3위, 오스트리아 5위, 스위스 8위, 독일 16위, 일본 22위, 영국 28위, 헝가리 40위, 한국 44위, 미국 47위, 이탈리아 61위, 러시아 142위, 이집트 166위, 중국 174위, 북한 178위를 차지했다.

라 보에시 생가. 16세기 이탈리아 르네상스 스타일. 도르돈뉴(Dordogne) 지방의 사흘라(Sarlat) 마을로 해마다 수많은 관광객들이 찾고 있다.
 라 보에시 생가. 16세기 이탈리아 르네상스 스타일. 도르돈뉴(Dordogne) 지방의 사흘라(Sarlat) 마을로 해마다 수많은 관광객들이 찾고 있다.
ⓒ 한경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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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사회가 바뀌어야만 미디어도 바뀔 수 있다. 그러나 사회를 바꾸려면 미디어의 권력에서 벗어나야 하는게 사실이다. 이 영화는 질 발바스트르(Gilles Balbastre)와 야닉 케르고아트(Yannick Kergoat)에 의해 만들어졌는데 발바스트르는 한 인터뷰에서 같은 가족에 속하는 정치인, 경제인, 언론인 같이 권력이 센 가족 앞에서 저항하고 있는데 어떤 식으로 저항이 가능한지 묻는 말에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그들이 사회계급, 계급의 이익, 일부 특권자들의 이익을 보호하려는 이해 집단이라면 우리는 더 나은 사회를 지향하는 지적 집단이다. 그들이 가진 권력이 핵 미사일이라면 우리가 가진 권력은 흙으로 빚은 도자기에 미치지 못한다."

케르고아트는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우리가 이 영화를 만든 이유는 관객들에게 어떻게 미디어가 국민을 농락하고 있는지 보여줌으로써 국민들에게 새로운 인식을 부여하는 것이다. 새로운 인식을 바탕으로 이들이 사회 개혁에 가담한다면 더 바랄 것이 없다. 언론의 자유라는 선행 조건 없이 사회 개혁은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

국민 앞에서 군림하는 언론, 정치, 경제인들은 영화 속에 그려진 자신들의 모습을 인정할까? 16세기의 철학자, 휴머니스트 작가이며 시인, 몽테뉴의 절친한 친구였던 라 보에시(La Boetie 1530-1563)는 18세에 쓴 그의 유명한 대표 저서인 <자발적 복종에 관한 고찰>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압제자들이 거대하게 보이는 것은 우리가 무릎을 꿇었기 때문이다. 다 같이 일어납시다."


태그:#신하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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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가, 자유기고가, 시네아스트 활동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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