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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는 양 날의 검입니다. 국가는 법과 제도를 만들어서 사회를 통제하고 이를 지키지 않는 사람의 자유를 제약할 수 있습니다. 이 서슬이 퍼런 검을 누가 이용하느냐에 따라 민중들의 삶은 큰 굴곡과 변화를 겪어왔습니다. 기득권층이 자신의 이득만을 위해 '국가'라는 정치권력을 사용할 때는 항상 '거짓말'이 존재했습니다. 그 거짓말로 국민을 속이고 기만해 자신들의 잇속을 챙겼습니다. '국가의 거짓말'이라는 연재기사를 통해 구체적인 사례들을 들여다보고 혼란의 시대에 국가의 진정한 의미에 대해 다시 생각해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자 말>

[거짓말] 일본 정부가 주민들에게 집단자결을 강요했다니, 말이 됩니까?

아니, 우리 일본 정부가 오키나와 주민들에게 집단으로 자살을 하라고 부추겼다는 것이 상식적으로 말이 됩니까? 당시는 2차세계대전이 끝나가던 무렵, 미국과 일본이 오키나와에서 결전을 치르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미군이 상륙하는 과정에서 궁지에 몰린 주민들 가운데 가족 모두 집단자결 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전쟁으로 인한 비극적인 일이죠. 하지만 제발 사실을 왜곡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오키나와 전쟁 당시 집단자결이 일어났던 가마(동굴) 모형(오키나와평화기념공원)
 오키나와 전쟁 당시 집단자결이 일어났던 가마(동굴) 모형(오키나와평화기념공원)
ⓒ 이윤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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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 일본 정부는 오키나와 주민들에게 집단자결을 강제했다

"'천황 폐하 만세'를 삼창한 후에 일본군들과 동사무소 직원들은 주민들에게 수류탄을 나눠줬습니다. 그것은 자결 명령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곳곳에서 수류탄의 폭음과 비명, 통곡 소리가 뒤섞여 그야말로 아비규환과 같은 상황이 발생했습니다."

2011년 10월 10일자 <프레시안> 기사에 실린 긴조 시게아키의 증언이다. 그는 1945년 3월 말, 고교 2년생이었다. 당시 일본 정부는 오키나와 주민들에게 '미군에게 잡히면 남자는 가랑이 찢겨 죽고, 여자는 능욕을 당한 후에 죽는다'며 천황을 위해 영광스럽게 자결할 것을 강요했다. 그의 증언은 계속됐다.

"불발탄이 많았던 탓에, 살아남은 사람들은 돌과 죽창을 들고 자신의 가족과 친지들을 죽이기 시작했습니다. 저도 형과 함께 어머니를 돌로 내리쳤고, 여동생과 남동생도 때려죽였습니다. 바로 그때 한 청년이 외쳤습니다. '이대로 죽느니 미군을 한 놈이라도 죽이고 죽자!' 그런데 저를 포함해 5명의 청년들이 처음으로 만난 사람은 미군이 아니라 일본군이었습니다. 우리는 살았다는 안도감이 아니라 배신감에 치를 떨었습니다. '군관민 공생공사(軍官民 共生共死)'라고 했는데, 일본군은 멀쩡히 살아 있었던 것입니다."

노마 필드의 책 <죽어가는 천황의 나라에서>(창작과비평사, 1995년)에 나오는 나카죠 미츠토시(당시 16세)의 회상은 충격적이다. 그는 가족, 친척들과 함께 피란해 있던 동굴에 일본병들이 들어왔을 때를 이렇게 회상한다.

"그때 우리들에게 먹을 것이라고는 며칠 전에 만든, 쉬어빠진 주먹밥 몇 개뿐이었소. 그것도 아이들 차지가 되고 어른들은 쳐다보고만 있었죠. 우리는 앉아서 군인들이 무슨 짓을 하나 보고만 있었는데, 그들은 우리가 아무것도 모르는 줄 생각했나 보우. 총을 꺼내들고서는 '기습공격을 나가야 하니 먹을 것을 있는 대로 내놔라' 하고 위협했죠. 하지만 우린들 왜 몰랐겠수? 저희들만 살아서 본토로 돌아갈 생각이란 것쯤.

그 다음 날이었소. 그들은 아이들이 있으면 적군에게 들켜 폭파될 우려가 많다, 그러니 세 살짜리 이하는 처치해 버려야 한다고 말하더라구요. 세 살짜리 이하가 다섯 있었소. 주사를 놓아 죽였소. 그중에는 내 아우와 조카도 있었다오.

처음에 다섯 아이를 죽인다고 할 때 우리가 굴 밖으로 데리고 나가겠다고 대장에게 간청했소만, 네놈들이 스파이가 될지도 모르니까 안 된다고 하고는 입구 앞에 보초를 세워 두고 모두 꼼짝 못하게 해놓구서, 대여섯 명이 덤벼들어서 아이를 하나씩 집어들고 주사를 찔렀다구요.

그 다음날 아침이었죠. 민간인으로서 살아 있는 건 당신들뿐이니까 미군에게 잡혀서 탱크 바퀴에 깔려죽느니 차라리 우리 처분을 받아라, 그러더군요. 우리를 처치해 버리고 남은 양식을 차지하려는 게지, 누구나 그렇게 생각했지만 가만히 있었죠."

당시 19살이었던 마에히라촌 출신인 마에다 하루는 미군에게 쫓긴 일본군 패잔병들이 동굴을 습격해 들어왔을 때의 광경을 이렇게 기억하고 있다.

"아침에는 폭격이 없으니까 아침이 되면 모두들 물 길러 나갔어요. 그런데 미이쓰모의 사탕수수 깍지를 쌓아둔 곳에서 내 남동생과 계집애 동생이 울면서 날 부르는 거예요. 마에라까구아 문 부근에서 칼을 맞고 쓰러져 있다가 거기까지 기어온 거예요.

하나씩 업어다 굴 속에 뉘어놓고 어머니는 어찌 되셨냐고 물었더니 죽었다는 거예요. 세이유우도 죽었다는 거예요. 엄마가 왜 죽었냐고 물었죠. 일본 군인이 와서 여긴 몇 명이나 있느냐고 물었는데, 본토 말이 서툰 어머니는 '후이, 후이?'하고 되물었데요. '예, 예(하이 하이), 뭐라굽쇼?' 하는 뜻이었는데 군인놈은 어머니 목을 댕강 쳐버렸다지 뭐예요. 잘린 목이 올케언니 유끼의 무릎 위에 떨어졌대요. 모두들 넋을 잃었죠.

내 바로 밑의 계집애 동생이 사내 동생을 업고 도망쳐 내게로 오려다가 붙잡혀서 마에라까구아 대문 안으로 끌려들어갔대요. 사내 동생을 업고 있는 아이를 칼로 찌르니까 업힌 아이는 땅에 떨어졌겠죠. 계집애 동생은 세 군데나 찔려서 창자가 이쪽에도 삐죽, 저쪽에도 삐죽 나와 있었죠. 사내 동생은 얼마나 깊고 넓게 베였던지 창자가 몽땅 다 나와 있었어요. 금방 죽더군요."

"오키나와어로 이야기하는 자는 간첩... 처분하라"

오키나와 전쟁 당시 사진 자료(오키나와평화기념공원)
 오키나와 전쟁 당시 사진 자료(오키나와평화기념공원)
ⓒ 이윤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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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의 증언에 따르면, 일본군에 의해 식량이나 물을 강탈당해 굶어 죽거나, 일본군의 위협 때문에 전장으로 탄약과 식량, 물 등을 나르다가 포탄에 맞아 죽은 사람들도 많았다. 또 일본군은 주민들이 피난 장소로 사용하던 '가마(자연동굴의 일종)'나 묘에서 주민들을 내쫓아 전장에 방치하거나, 오키나와 방언을 사용하는 주민들을 스파이로 몰아 처형하기도 했다. 일본군 상부는 "오키나와어로 이야기하는 자는 간첩으로 보아 처분하라"는 명령을 직접 하달한 상태였다.

그 이외에도 미군이 뿌린 항복권유 삐라를 주워서 보거나, 다른 주민들에게 항복을 권유하던 사람들이 살해당했다는 사례도 있다. 또한 주민들의 피난장소로 들어온 일본군들은 위치를 발각당하지 않기 위해 유아나 어린이들을 내쫓거나 죽였다. 군 비행장이나 진지 구축에 동원됐던 주민들이 군사기밀을 유출할 것을 두려워해 미군에 투항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군관민 공생공사'라는 지도방침을 내려보내 많은 곳에서 부모, 형제, 자식, 친척, 지인들이 서로 죽이도록 명령하거나 이를 강요했다.

소위 '집단자결'이란 이러한 강압적인 상황 하에서 발생했던 것이다. 이러한 일들은 오키나와 전역에서 벌어졌고, 특히 일본군이 전략지구전을 펼쳤던 오키나와지마 중·남부에서 많은 사례가 발견된다.

오키나와는 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에서 거의 유일하게 수십만 민중의 일상생활 터전에서 대규모의 지상전이 벌어진 지역이다. 밀고 들어온 미군은 지상전투부대만 18만여 명이었고 후방 지원부대까지 합치면 54만 명에 달했다고 한다. 이에 반해, 일본군은 10만 명에 불과했다. 게다가 그중의 약 3분의 1은 오키나와 현지에서 징집한 보조병력이었다.

1945년 4월 1일에 오키나와 섬의 서해안에 상륙한 미군은 82일간 일본군과 치열한 사투를 벌였다. 전쟁이 끝난 뒤 마부니 언덕에 건립된 '평화의 초석'에는 다음과 같이 희생자의 수가 적혀 있다.

오키나와 주민 14만9000명
일본군 7만5000명
미군 1만4000명
영국 82명
대만 8명
북한 82명
한국 263명
(2002년 6월 현재)

총 24만 명 이상의 인원이 사망할 정도로 치열한 전장이 된 오키나와는 사실상 일본 본토를 위한 총알받이였다. 역사적으로 류큐 왕국으로 독립국의 지위를 갖고 있었던 오키나와는 1609년 일본에 점령당했다. 이후 일본 속국이면서도 자치를 유지했던 오키나와는 1879년 일본의 하나의 현으로 강제 병합되었다. 이런 역사 속에서 오키나와는 2차 세계대전 과정에서 철저하게 본토를 위해 '버린 돌'의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처음부터 오키나와의 모든 자원을 동원해서 최대한 지구전을 벌인다는 계획이었고 일본 수뇌부는 "오키나와는 100% 희생해도 괜찮다"는 전략이 짜여 있었다. 이를 통해 일본 본토, 나아가 천황제를 지킨다는 이른바 '고쿠타이고지(國體護持:こくたいごじ)'의 철저한 도구가 된 것이다.

일본과 미국의 '이중식민지', 오키나와

오키나와 미군기지와 미군용지 분포 지도(오키나와평화기념공원)
 오키나와 미군기지와 미군용지 분포 지도(오키나와평화기념공원)
ⓒ 이윤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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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역사적 아픔은 오키나와 사람들의 마음속에 깊이 박힐 수밖에 없었다. 노마 필드의 책 <죽어가는 천황의 나라에서>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내용은 오키나와 사람들의 그런 마음을 잘 드러낸다.

나는 쇼오이찌에게 자신을 일본인이라고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그 질문에는 언제나 난감해집니다. 헷갈려요." 나의 과감한 안내역인 토시꼬가 거들고 나선다. 그녀는 번역본으로 탐독한 <미스터 리로이 존스씨(Mr. LeRoi Jones, 이마무 바라카)>의 예를 좇아, 자신을 류우뀨우계 일본인이라 부르기로 했단다. "난 절대 헷갈리지 않아요." 하지만 쇼오이찌는 전적으로 납득하지는 못한다. "글쎄요. 누가 내게 일본인이냐고 묻는다면, 류우뀨우인이라고 대답하겠어요. 그냥 일본인이라고 말하기는 어쩐지 싫단 말이예요."

"행정상의 관점에서는 당신도 일본인일 뿐이라구요." 토시꼬의 말이다. 이 말에 쇼오이찌는 대답한다. "알고 있어요. 하지만 상식을 따라서 나 자신을 일본인이라 부르기가 싫단 말예요. 물론 나를 밖에서, 가령 아시아의 다른 나라에서 본다면 나는 일본인, 아시아에서 전쟁을 일으킨 작자들과 일원이라는 것도 알아요. 하지만 일본 안에서는 달라요. 적어도 나는 '야마또족(大和族)'하고는 다르단 말예요."

일본의 식민지였던 오키나와는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샌프란시스코조약에 따라 미국령이 되었다. 미국 입장에서 오키나와는 군사적 요충지로서 제격이었기 때문이다. 1972년 5월 15일에 오키나와의 영유권이 미국에서 일본으로 반환되었지만, 오키나와는 여전히 일본과 미국의 이중식민지로서 온갖 생채기를 자신의 온몸으로 받아 안고 있다.

오키나와는 일본 전체 면적의 0.6%에 불과한 면적이지만 재일 미군기지의 75%가 집중해 있는 곳이다. 오키나와 본도의 10% 이상이 미군기지로 덮여 있다. 미국은 그동안 오키나와 미군기지를 한국전쟁과 베트남전쟁, 그리고 이라크전쟁과 아프가니스탄전쟁의 핵심적인 발진기지로 사용했다.

심심치 않게 미군범죄가 일어나고 있으며 1995년 3명의 미 해병에 의해 12살 여중생이 성폭행 당하는 사건으로 8만5000여 명의 오키나와 주민들이 집회를 열고 기지 철거를 요구하는 상황이 벌이지기도 했다. 전투기 및 수송기의 이착륙과 각종 훈련으로 인한 소음과 폭음으로 인해 주민들이 정상적인 생활을 하기 힘든 상황이 계속되고 있다.

오키나와 역사를 왜곡하려는 일본 우익 세력

역사왜곡에 항의하는 오키나와 주민들의 집회를 보도한 신문과 잡지(오키나와평화기념공원)
 역사왜곡에 항의하는 오키나와 주민들의 집회를 보도한 신문과 잡지(오키나와평화기념공원)
ⓒ 이윤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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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다 보니 일본 천황(天皇)에 대한 인식도 본토와 무척 다르다. 이들에게 천황은 존경과 숭배의 대상이 아니라 가해자의 정점에 있는 사람일 뿐이다. 그래서 지난 1975년에 오키나와를 방문한 황태자(지금의 천황)에게 오키나와 청년 2명이 화염병을 투척한 사건이 터지고, 일장기 '히노마루'를 불태우거나 하수구에 처박는 일이 벌어지는 것이다. 1990년대 천황이 초청한 피로연에 참석했던 오키나와 출신의 가수 아무로 나미에가 끝내 '기미가요(君が代 : 천황의 장수를 기원하는 내용의 일본 국가)'를 부르지 않았던 사건도 유명하다.

2007년에는 고등학교 일본사 교과서에서 오키나와 전투 관련 내용이 왜곡되는 일이 벌어졌다. 문부과학성이 집단자결과 관련해서 군의 명령 및 강제가 있었다는 기술에 관해 검정의견을 붙여 내용을 변경시킨 것이다. 이때 오키나와현 섬 전체에서 반대운동이 일어나 결국 11만 명이 넘는 현민대회가 오키나와 본섬과 낙도에서 개최되는 상황이 벌어졌다.

이런 집단행동으로 교과서 왜곡 시도는 좌절됐지만 아직도 일본 정부와 우익 세력은 일본 교과서에서 자신들이 불편한 내용을 삭제하기 위해 틈을 노리고 있다. 2011년 3월 검정에 합격한 이쿠호샤(育鵬社), 지유샤(自由社)의 중학교 교과서는 오키나와 사건과 관련해 역사를 왜곡하는 내용을 담고 있어서 문제가 되고 있다.

지유샤 교과서는 "미군이 상륙하는 가운데 궁지에 몰린 주민이 가족 모두 집단 자결하는 비극이 일어났습니다"라고 기술하고 이쿠호샤(育鵬社) 교과서는 "미군의 맹공으로 피할 곳을 잃어 집단자결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라는 식으로 오키나와 집단자결의 실체를 정확히 밝히지 않고 있다.

물론 희망적인 움직임도 있다. 2009년 54년간 이어진 자민당 집권시대를 종식하고 집권 민주당의 총리가 된 하토야마 유키오는 공약으로 오키나와의 후텐마 미군기지 이전을 내걸었다. 미국에서 벗어나 동아시아를 중시하겠다는 과감한 그의 발언에 많은 사람들이 큰 기대를 걸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미국과 일본 우익의 강한 공세 등에 밀려 우왕좌왕하는 모습을 보이다가 결국 미군기지 이전에 실패하고 사임했다. 그렇다 하더라도 집권당이 바뀌고 총리가 미군기지 이전을 내거는 상황은 분명 이전의 분위기와는 다르다.

가끔 너무 쉽게 글로 무언가를 쓰는 것이 참 주제 넘는 일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그런데 바로 지금이 그 순간이다. 오키나와라는 시간과 공간은 필자가 한가롭게 자판을 두들기며 써 내려가기에는 너무나 힘겹다. 누가 뭐라던 인간의 발명품 중 최악의 것은 전쟁임에 틀림없다.


태그:#오키나와, #집단자결, #집단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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