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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양대군 사저
▲ 명례궁 수양대군 사저
ⓒ 이정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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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명회를 필두로 신숙주, 권람, 홍달손, 양정, 홍윤성이 속속 집결했다. 직계 참모 외에 계양군 이증과 파평위 윤암도 참석했다. 수양의 사저 명례궁에 이렇게 많은 사람이 모인 것은 오랜만이다. 계양군은 세종의 후궁 신빈 김씨 소생으로 수양을 도와 안평대군을 제거한 공신이다. 그의 처는 우의정 한확의 딸이다.

한확은 자신의 누이 2명을 명나라 황실에 보내 그 후광으로 승승장구했고, 딸 2명은 조선 왕실에 출가시켰다. 하나는 세종대왕의 며느리로, 또 하나는 세종의 아들 수양대군 며느리로 만들었다. 그의 딸들은 친정에서는 자매지만 왕실에서는 상하관계가 된다. 한확은 참으로 권력지향적이다.

"금성대군과 화의군, 그리고 이들을 지원하는 혜빈과 박상궁을 처단해야 합니다."

태종의 부마 파평위 윤암이 열을 올렸다.

"어찌하여 종사를 위한 계책을 세우지 않으시고 사사로운 정으로 결단하지 않으십니까? 만약 이들 무리가 뜻을 얻는다면 후세에 누가 형님의 충의를 알겠습니까? 형님이 머뭇거리면 사직의 존망은 예측할 수 없습니다."

계양군 이증이 결단을 촉구했다.

"아직 때가 아니다."
"때가 아니긴 왜 아닙니까? 이놈들이 대낮에 회합을 갖고 겁대가리 없이 날뛰는 꼬락서니가 명줄을 재촉하는 것 같습니다. 당장에 날려버립시다."

홍달손이 그 특유의 목소리로 목청을 높였다. 그는 정난 후, 벼락출세해 병조참판에 올랐다. 병조판서는 수양이 겸하고 있으니 수양의 의중을 살펴 병권을 요리하는 위치에 있는 것이다.

"이놈들의 목숨 줄이 얼마나 질긴지 한 번 시험해 봐야겠습니다."

양정이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힘 하나 빼고는 내세울 것이 없는 그가 병조참의에 오른 것은 순전히 힘 덕이었다. 정난이 그에게 멍석을 깔아줬고, 그는 유감없이 힘자랑을 해 공신에 올랐다. 그는 수양이 없는 병조를 홍달손과 함께 끌고 가는 쌍두마차다.

"때를 만들어가는 사람은 혁명가입니다"

수양대군 사저
▲ 명례궁 수양대군 사저
ⓒ 이정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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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에는 선후가 있고 만사에는 높고 낮은 것이 있다. 왜들 이리 서두르나."
"때는 무르익었다 생각합니다. 허나, 중국 사신이 들어오고 있으니 그들이 나간 다음에 손을 보도록 하지요."

도승지 신숙주가 시기 조정을 제안했다.

"때를 기다리는 자는 군자(君子)이고, 때를 만들어가는 사람은 혁명가입니다. 누가 우리를 군자라 하겠습니까? 어림없는 소리입니다. 여러분 중에 우리를 군자라 생각하고 있는 분이 계시다면 그것은 대단한 착각입니다. 우리는 군자가 아닙니다. 혁명에 충실해야 할 우리 일뿐입니다. 때는 만들어가는 것이지, 때가 우리를 기다려주지 않습니다."

육두문자가 난무하던 장내가 한명회의 일성에 쥐 죽은 듯이 조용해졌다.

"그 시기가 언제라 생각하나?"

수양이 한명회에게 눈길을 줬다.

"이제 우리가 한 두 사람 처단하거나 귀양 보내는 것은 큰 의미가 없습니다. 우리가 칼을 빼어들면 접수해야 합니다."
"접수라 했습니까?"

파평위 윤암이 놀란 얼굴로 되물었다.

"그렇습니다. 이제 우리가 일어나면 전하를 뒤로 물리고 그 자리를 접수해야 합니다."

천기누설이 따로 없다. 하늘의 기운이 바로 이 자리에 있다. 천기가 이곳에서 조화를 부리고 있는 것이다. 두려움과 기대가 파도처럼 밀려왔다. 솔직히 떨고 있는 사람도 있었다. 큰소리 뻥뻥치던 홍달손도 후덜덜 떨리고, 팔을 걷어 부치며 기고만장하던 양정도 사실 떨고 있었다.

"접수라 했나?"
"네, 그렇습니다."

수양이 묻고 한명회가 답했다.

"접수라?"
"그렇습니다."

차갑고 건조한 목소리가 오고갔다.

강력한 왕권이 필요한 시대... 그들은 죽어야 했다

임금의 자리
▲ 어좌 임금의 자리
ⓒ 이정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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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자리는 아버지가 않았고 할아버지가 않았던 자리다. 현재 그곳에 조카가 앉아있다. 앉아야 할 충분한 자격이 있고, 당연 그 자리의 주인은 조카다. 그것에 토를 달 생각은 추호도 없다. 조카의 그 자리를 지켜주기 위해 김종서를 날려버리지 않았는가. 헌데 그 자리를 접수하라? 그러면 조카는 어디로 가란 말인가?"

"이제 우리 솔직해져야 합니다. 소인이 나리를 처음 뵈었을 때, 눈빛에서 야망을 읽었습니다. 그 야망이 소인의 뜻과 같아 나리의 과업에 주저 없이 합류했습니다. 그 빛깔은 분명 어좌였습니다. 그게 아니었다면 소인이 사람을 잘못 본 것이고, 그게 맞다면 나리께서 나리 자신을 속이신 것입니다. 소인이 진정 잘못 봤다면 짐을 싸들고 개성으로 내려가겠습니다. 사람 하나도 제대로 볼 줄 모르는 사람이 어떻게 나라의 앞날을 논하겠습니까?"

"김종서 일당을 참살한 것은 조카의 자리를 지켜주기 위한 거사였다 하지 않았는가. 신하가 임금 위에 군림하려드는 나라, 나라를 위한 척, 임금을 위한 척 하면서 실지로는 자신들의 수하를 심고 배를 불리는 황표정사로 왕실을 능멸하는 것을 더 이상은 참고 봐줄 수 없었단 말일세."

"나라가 나라답게 굴러가려면 임금이 임금 노릇을 해야 합니다. 때문에 그들은 죽어야 했고, 망설임 없이 죽였습니다. 허나, 그들을 죽였다고 해서 이 나라가 태평성대로 굴러갈 것이라 생각했다면 오산입니다. 오히려 그들을 추종하는 잔당이 은밀히 세를 모아 반전을 꾀하고 그들의 농간에 국론이 분열되고 있습니다. 강력한 왕권이 필요한 때가 바로 지금입니다. 그 왕권 행사에 나리가 오르는 일 외엔 대안이 없습니다."

얼음장처럼 차가운 한명회의 목소리가 잔잔하게 울렸다. 이때였다. 한명회를 아니꼬운 눈초리로 바라보는 시선이 있었다.


태그:#한명회, #수양, #명례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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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事實)과 사실(史實)의 행간에서 진실(眞實)을 캐는 광원. 그동안 <이방원전> <수양대군>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소현세자> <조선 건국지> <뜻밖의 조선역사> <간신의 민낯> <진령군> <하루> 대하역사소설<압록강>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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