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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중에서 쓰던 가마.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 홍색연 궁중에서 쓰던 가마.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 이정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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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악에서 내려오는 찬바람이 매섭다. 칼바람 마다하지 않고 효령대군 이보가 호조판서 조혜와 6상궁을 이끌고 송현수의 집을 찾았다. 책비의(冊妃儀)를 거행하기 위해서다. 열네 살 어린소녀. 지금까지는 송현수의 딸이었지만 이제 책비를 받으면 만인이 우러러 보는 국모가 된다.

구중궁궐 깊은 곳. 중궁의 모든 일을 맡아 보던 궁관 6인이 떴다. 중전 인도를 담당한 상궁(尙宮), 예의범절을 맡은 상의(尙儀), 의복과 채장 담당 상복(尙服), 음식을 총괄하는 상식(尙食), 먹고 자고 휴식하는 시간을 관리하는 상침(尙寢), 여공 담당 상공(尙功)이 총 출동하였으니 중궁전이 옮겨온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들은 한낱 여인이 아니다. 종5품과 정6품의 어엿한 관직에 있는 여관(女官)들이다.

골목 어귀에는 사복시 윤이 수하를 거느리고 연(輦)을 대기하고 있었다. 왕비가 타는 화려한 가마다. 또한 경창부에서는 산(繖)과 선(扇)으로 시위를 준비하고 있었다. 왕비는 탄생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다. 평범한 여자를 왕비로 만들어서 궁으로 모셔가기 위한 수순이다.

대문 앞 막차에는 후궁 두 사람이 먼저와 대기하고 있었다. 최종 간택에서 잉(媵)으로 선발된 예원군사 김사우의 딸과 전 사정 권완의 딸이다. 똑같은 현장에서 어떤 여자는 왕비로 간택되어 모셔 감을 받는 여자가 되었고 또 어떤 두 여자는 왕비를 모셔가는 여자로 신분이 바뀌었다. 하지만 이 시간 이후의 운명은 아무도 모른다.

왕비의대례복. 조선 전기에는 송나라의 복식을 따랐고 병자호란 이후에는 청나라의 복식을 따랐다. 국립중앙박물관소장
▲ 적의 왕비의대례복. 조선 전기에는 송나라의 복식을 따랐고 병자호란 이후에는 청나라의 복식을 따랐다. 국립중앙박물관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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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례의 인도에 따라 효령대군이 중문밖에 섰다. 교명(敎命)과 책보(冊寶)을 든 사람이 그 바로 뒤에 섰다. 잠시 후, 송현수의 딸이 모습을 드러냈다. 적의(翟衣)를 갖춰 입은 모습이 완전 왕비다.

붉은 바탕에 청색으로 132쌍의 꿩을 수놓은 적의는 화려했다. 깃고대 둘레에 붉은 선을 두르고 용이 그려진 적의는 눈부셨다. 도련과 소매부리의 봉황무늬가 기품을 더해주고 양쪽 어깨의 사조용보(四爪龍補)는 권위를 상징했다.

상궁이 송씨를 인도하여 책명(冊命)을 받는 자리에 나아갔다. 송씨는 서고 상궁이 꿇어앉았다. 효령대군이 교명함과 옥책함을 내려 주었다. 함을 받은 상궁이 책함을 여관에게 건네주고 일어섰다. 상복은 꿇어앉아 보수(寶綏)를 취했고 상침은 소속 여관을 거느리고 의장을 받들었다.

"4배요."

상의가 나직이 주문했다. 송현수의 딸이 북향하여 네 번 절했다.

"부복하여 꿇어앉으시오."

상의가 송씨에게 청했다. 상궁이 함을 열고 옥책을 꺼냈다.

"하늘과 땅이 덕을 합하여 만물을 생성하니 왕이 하늘을 본받아 원비(元妃)를 세우는 것은 종통(宗統)을 받들어 나라를 굳건히 하려는 까닭이다. 내가 어린 몸으로 왕업을 이어받아 덕을 이루려면 마땅히 내조에 힘입어야 하겠기에 훌륭한 가문을 찾아 비(妃)를 구하였다. 그대 송씨는 성품이 온유하고 심중이 깊어 진실로 중궁의 자리에 부족함이 없고 한나라의 국모에도 손색이 없다. 이에 사(使) 효령대군 이보와 부사 호조판서 조혜를 보내어 옥책과 보장(寶章)을 주어서 왕비로 삼노라."

영조 임금이 혜경궁 홍씨를 세자빈으로 책봉한다는 교명. 본 기사와는 직접 관련이 없으나 참고자료로 활용했습니다.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 교명 영조 임금이 혜경궁 홍씨를 세자빈으로 책봉한다는 교명. 본 기사와는 직접 관련이 없으나 참고자료로 활용했습니다.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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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독을 마친 상궁이 옥책을 받들어 송씨에게 전했다. 이어 교명 함이 열렸다.

"왕은 말하노라. 옛부터 제왕이 국가를 다스릴 적에 먼저 배필을 세우는 것은 만복의 근원을 굳건히 하려는 까닭이다. 그대 송씨는 훌륭한 집안에서 자라 너그러운 마음과 아름다운 자태가 있어 비(妃)에 부족함이 없으니 마땅히 궁위(宮闈)를 세우고 종묘를 받들어야 할 것이다. 이제 옥책(玉冊)을 갖추어 왕비로 삼으니 내명부를 바로잡아 기틀을 넓히도록 하라."

송씨가가 꿇어앉아 교명을 받았다. 자연인 송현수의 딸이 왕비가 되었음을 스스로 수락한 것이다. 왕비가 교명함을 전언(典言)에게 주었다. 이어 상복이 보수(寶綬)를 받들어 왕비에게 주자 왕비가 받아 사기(司記)에게 건넸다.

"부복 흥(興) 4배요."

상의가 부복(俯伏)하고 꿇어앉아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왕비가 일어나 네 번 절했다. 신하의 입장에서 북쪽 경복궁에 있는 임금을 향하여 절했고 보이지 않은 지아비를 향하여 절한 것이다.

왕비의 자리에 오르소서

상침이 소속 여관을 거느리고 당상 북벽에 왕비의 좌석을 마련했다. 교명과 옥책을 왕비의 좌석 앞에 모셨다.

"자리에 오르소서."

상의가 부복하여 왕비에게 청했다. 왕비의 자리에 오르라는 것이다. 송현수의 딸이 왕비의 자리에 앉았다. 그 즉시 왕권을 상징하는 산(繖)과 선(扇)이 시위했다. 6상궁 이하 여관 모두가 내려와 뜰에 섰다.

"4배 하라."

전찬이 소리쳤다. 6상궁 이하 모든 여관이 네 번 절했다. 잘 받들어 모시겠다는 무언의 서약이다. 왕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모든 여관이 두 손을 모으고 허리를 굽혔다. 지긋이 내려다보던 왕비가 계단을 내려왔다. 상궁이 인도하여 안전으로 들어갔다. 여관의 손에 들려있던 옥책과 교명도 뒤따라 들어갔다. 책비의가 끝났다.

한 번 길복이면 계속 길복이다

혼례의식이 차질 없이 진행되고 있다는 보고를 받은 수양이 승지들을 소집했다.

"왕비를 맞아들인 다음에 길복을 따를 것인가? 아니면 상복인가?"

지금은 국상중이다. 국가의 경사 국혼을 위해 상복을 벗은 것 까지는 좋았는데 그 다음이 문제다. 조정 신하들이 계속 길복을 입을 것인가? 아니면 상복을 다시 챙겨 입어야 하는가? 그것이 문제였다.

"이미 권도(權道)에 따라 왕비를 맞아들였으니 길복을 계속 입는 것이 좋겠습니다."

도승지 최항, 좌부승지 박원형, 우부승지 권자신, 동부승지 권남이 길복에 찬성을 표했다.

"권도로써 상제(喪制)를 단축시킬 수 없습니다."

우승지 박팽년이 반대했다. 권도는 편법이니 원칙으로 돌아가자는 것이다.

"국가 대사를 위해 길복을 입었으면 계속 길복을 입어야지 새삼스럽게 상복을 입는 것은 혼례 자체를 부정하는 것 아닌가? 이는 곧 혼례를 올린 전하를 능멸하는 결과가 된다. 상복은 결단코 불가(不可)하다."

수양이 선언했다. 한 번 길복이면 계속 길복이라는 것이다. 그 속내에는 문종의 상(喪)을 빨리 잊고 새 체제로 가자는 것이다.

갑자기 터진 돌발 변수 "나, 장가 안 갈래"

"왕비를 맞아들이는 일은 신료들의 청에 쫓겨서였다. 마음이 편안치 못하니 이를 정지시켜라."

예상하지 못했던 변수가 돌출했다. 임금이 돌발 발언을 하고 나선 것이다. 종친·부마·의정부·육조의 당상이 빈청에 모여 긴급회의에 들어갔다.

"왕비를 맞아들이는 것을 어찌 다시 의논할 필요가 있겠는가?"

수양이 운을 뗐다.

"종사 대계 때문에 혼례를 청했고 이미 책례(冊禮)가 이루어졌으니 어찌 중지한단 말씀입니까? 중지할 수 없습니다."

모두 국혼 중지에 반대했다. 회의를 마친 수양이 집현전 부제학 하위지와 직제학 이석형에게 임금을 알현하라 지시했다.

"백관들이 왕비를 맞아들이도록 청하였을 때 상중에 있는 전하의 마음이 편치 않으리라는 것을 모르는바 아닙니다. 허나, 이미 납채, 납징, 고기의 예를 마쳤으니 비록 왕비를 맞아들이지 않더라도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더구나 이미 옥책을 내려 왕비를 책봉하였으니 돌이킬 수 없습니다."
"돌이킬 수 없다는 것을 돌이켜라. 왜 돌이키는 것에는 권도를 적용할 수 없다는 말인가?"
"이미 종묘·사직과 경희전에 고(告)했습니다. 지금 이를 정지시킨다면 무슨 이유로 또 신명께 고하겠습니까?"
"그대들이 고하지 못하겠다면 과인이 무릎 꿇고 고하겠노라."
"전하께서는 어린 나이에 왕위를 이어 위로는 모후의 보호가 없으시고 좌우에는 환관이 있을 뿐입니다. 드넓은 궁궐에서 홀로 계시기 때문에 종친과 신료들이 종사 대계를 위하여 중궁을 세우도록 청하였습니다. 이제 책비를 마쳐 중궁의 명위(名位)가 세워졌는데 봉영(奉迎)하는 예를 정지시킨다 하더라도 어찌 다름이 있겠습니까? 신민들의 소망에 부응하소서."
"돌아들 가라."

임금의 의지가 흔들리지 않는다는 보고를 받은 수양이 입궐하여 임금과 마주했다.

"성상께서 백관의 청을 따르시어 이미 왕비를 책봉하였으니 어찌 이를 정지할 수 있겠습니까?"
"과인이 억지로 따르려고 했으나 다시 생각하니 마음이 편안하지 않으오."
"신민의 뜻을 따르소서."
"숙부!"

임금이 수양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예, 하문 하소서."
"숙부의 형님이 누구시오?"

뜬금없는 질문에 수양이 잠시 어리둥절했다.

"그야, 문종대왕이시죠."
"그렇습니다. 숙부의 형님은 문종대왕이시고 문종대왕은 과인의 부왕이십니다."

어린 임금의 눈가에 이슬이 맺혔다. 잠시 고개를 들어 천장을 쳐다보던 임금이 호흡을 가다듬으며 말을 이어갔다.

"부왕이 훙서하신지 1년이 채 안되었습니다. 국상 중에 이렇게 혼례를 서두른다는 것이 양심에 허락하지 않습니다. 더구나 상중에 혼례를 올리는 것은 옳지 않다는 말을 들으니 마음이 더욱 무겁습니다."
"성삼문의 말을 듣고 갑자기 대사를 정지시키는 것은 적절한 처사가 아닙니다. 무릇 조정의 일은 모두 옛 제도를 따를 수가 없습니다. 현실에 맞지 않는 것은 고쳐야 합니다. 권도에 따라서 왕비를 맞아들이소서."

수양이 눈을 부릅떴다. 어린 임금이 입을 닫고 말았다.

"모든 백관들이 왕비를 맞아들이도록 청할 때, 성삼문이 경전을 들어 반대의견을 내놓았으나 납채, 고기할 때는 아무소리 안하고 찬성 반열(班列)에 따랐습니다. 이제 봉영의식만 남겨놓은 현 시점에서 반론을 제기하고 있으니 이는 이름을 얻고자 하는 술책입니다. 국론을 분열시키고 자신의 이름을 올리려는 자를 금부에 하옥하고 국문하소서."

청이라는 이름을 빌렸지만 명이다. 누가 누구에게 명을 내리는지 모르겠다.

"성삼문의 고신을 거두고 국문하라."

어명이 떨어졌다. 좌사간 성삼문에게 불똥이 떨어진 것이다.


태그:#교명, #책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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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事實)과 사실(史實)의 행간에서 진실(眞實)을 캐는 광원. 그동안 <이방원전> <수양대군>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소현세자> <조선 건국지> <뜻밖의 조선역사> <간신의 민낯> <진령군> <하루> 대하역사소설<압록강>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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