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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어붙은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철조망이 쳐져있는 왼쪽이 북한, 오른쪽이 중국이다. 백성들의 탈출행렬은 현재 진행형이다.
▲ 동결 얼어붙은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철조망이 쳐져있는 왼쪽이 북한, 오른쪽이 중국이다. 백성들의 탈출행렬은 현재 진행형이다.
ⓒ 이정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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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동이 지나 얼음이 얼었다. 머잖아 두만강이 얼어붙는다. 두만강의 겨울은 일찍 오고 늦게 간다. 동결기가 년 3~4개월에 이른다. 얼어붙은 두만강에 무서리 내리면 온 산야가 하얗다. 삭풍이 뼈속 깊이 파고드는 계절이 다가온 것이다.

강을 건너는 것과 걷는 것은 상황이 다르다. 두만강 결빙은 걸어서 도강(渡江)할 수 있다는 의미가 있다. 머뭇거리던 마음이 쉽게 동(動)할 수 있다. 이제 가재도구와 솥단지를 달구지에 싣고 종성을 떠나는 대량 탈출사태는 불을 보듯 뻔하다.

살벌한 분위기 속에서 가장 추위를 타는 사람이 있다. 정종과 이행검이다. 이징옥은 죽었지만 조사 여하에 따라 역적이 될 수 있다. 엮으면 엮일 수 있는 칼날위에 서있는 것이다. 자신의 목은 물론 자식과 삼족이 멸할 수도 있다. 생각하면 할수록 몸이 떨려오고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이징옥 사건의 흐름을 속속들이 알고 있는 사람은 이행검이다. 그와 입을 맞추고 싶지만 그것마저도 약점이 될 수 있다. 공동 선을 택하여 둘이 살 수도 있지만 한 사람이 결정적으로 위기에 몰리면 '이렇게 하기로 했다'고 끌고 들어갈 수 있다. 물귀신 작전 자체가 둘이 같이 죽는 하책이지만 죽음에 직면한 인간은 이성을 잃을 수 있다.

표지석
▲ 두만강 표지석
ⓒ 이정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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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민의 밤이 지속되었다. 잠을 이룰 수가 없다. 두만강 너머로 도망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하지만 그렇게 하면 모든 혐의를 자인한 꼴이 되어 역사에 기록된다. 그것이 두려웠다. 하얗게 밤을 새운 정종이 수하 군사를 데리고 이행검을 찾아갔다.

"상의할 일이 있어 찾아왔습니다."
"일 없소. 돌아가십시오."

이행검의 반응은 냉담했다.

"상생의 방법을 찾아보고자 왔습니다. 둘이 가만히 앉아서 죽을 수야 없지 않습니까?"
"인명은 재천이오. 하늘이 내 목숨을 거두어 가겠다면 무슨 토를 달 수 있겠소."
"없는 말을 지어내어 맞추자는 것이 아닙니다."
"맞추어도 거두어 가겠다면 가져갈 것이고 맞추지 않아도 가져가지 않겠다면 안 가져 갈 것이오. 나는 이미 마음을 비웠으니 돌아가시오."

열불이 난 정종이 신발을 신은 채 방으로 뛰어 들어갔다. 칼을 뽑은 정종이 내리쳤다.

"으윽!"

비명소리와 함께 이행검이 쓰러졌다.

"이 버러지 같은 놈을 묶어라."

정종이 수하 군사들에게 명했다. 밖으로 끌려나온 이행검을 향하여 또 한 번 내리쳤다. 맞았던 자리를 또 다시 가격당한 이행검이 꼬꾸라졌다.

평소 정종은 이행검을 곱게 보지 않았다. 북경 방문을 마치고 돌아오는 수양을 요동까지 나아가 꼬리를 흔들던 강아지. 사사 말(馬)을 제공하며 아양을 떨던 소인배. 명하지도 않은 호종부사를 자청하여 수양의 눈도장을 받았던 졸무(拙武). 그 공으로 어느 날 갑자기 연줄을 타고 경성 도진무로 내려온 낙하물. 묵묵히 변방을 지키던 직업군인 정종으로서는 가까이 하기에는 경멸스러운 무관이었다.

"길주에서 여기까지 이징옥을 데리고 온 네놈 체면 때문에 역적을 도륙내지 못하고 부역한 내 자신이 한스럽지만 네놈 탓은 안하겠다. 단, 없는 말을 지어내어 나를 끌고 들어가려 할 때는 설혹 내가 혐의를 벗지 못하고 죽는다 해도 내 영혼이 네놈을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이행검을 또 한 번 내리쳤다. 칼등으로 맞았지만 통증이 심했다. 고통에 몸부림치는 이행검을 발길로 걷어 찬 정종이 휘하 군졸들을 데리고 가버렸다.

묶여 있는 이행검을 발견한 그의 모친은 대성통곡했다. 함께 손을 맞잡고 살길을 궁리해도 시원치 않을 텐데 '네 탓', '내 탓'하고 있으니 기가 막혔다. 우선 매 맞은 아들이 억울했다. 편지를 썼다. 한성으로 떠나는 종자에게 '명례궁 안방마님에게 꼭 전하라'며 신신 당부했다. 수양대군 부인과는 친정으로 줄이 닿아 있었다.

수양이 함길도 관찰사 성봉조에게 유시했다.

"이징옥을 죽인 이행검을 정종이 대도(大刀)로 구타하고 결박하여 병이 나기에 이르렀다 하니 어찌된 영문인가? 그 아우 이양검을 보내어 구료하게 하니 경이 증세에 따라 약을 주도록 하라. 또 이행검과 정종은 이징옥을 잡아 죽이는데 공이 있는 자이니 유언비어를 좇아 경박하게 곤욕을 주는 것은 옳지 않다. 경은 이 뜻을 알아서 구타한 이유와 그 상처를 조사햐여 계문하라."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국경마을
▲ 변방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국경마을
ⓒ 중학교 국사 교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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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명을 받고 길주에 도착한 박대손이 올린 장계가 도착했다.

"통사(通事) 김죽과 유세는 도망 중에 있고, 강막동은 이징옥의 말을 듣고 야인들에게 군사를 청하는 연락꾼 노릇을 하였습니다. 군관 김석산은 이징옥의 종성 입성을 쉽게 하기 위하여 동문을 파절(把截)했고 진무 황숙저·김치명·김안·전득미·최성발·김득순은 이징옥이 인신(印信)과 병부(兵符)를 박호문에게 주고 한성으로 떠났다가 중도에 돌아가서 박호문을 죽일 때 합세하였습니다.

지인(知印) 최성달·이흥배는 이징옥의 관문(關文)을 가지고 회령부와 보화·무산·부령 등지에서 군사를 징발하였습니다. 패두(牌頭) 한위와 갑사(甲士) 맹의는 속임수에 빠졌다고 하나 이징옥이 박호문을 죽여 모반의 형상이 명백하였는데도 잠자코 있었고 종성까지 따라갔습니다.

황유는 이징옥이 '대금 황제(大金皇帝)'를 자칭하고 교도 이선문을 불러 칙서(勅書)를 쓰게 하니 이선문이 병고를 칭탁하여 쓰지 않았는데 황유는 망설이지 않고 바로 썼습니다. 회령 절제사 남우량, 판관 김경신은 지인(知印) 최성달이 군사를 징발하는 관문(關文)을 가지고 회령부에 도착하여 이징옥이 박호문을 죽인 사실을 말하였으나 판관으로 하여금 관문(關文)에 서명하게 하였습니다.

이징옥이 박호문과 작별하고 한성으로 가다가 중도에서 돌아갔으니 그 정상이 의심할 만하였는데 도진무 이행검은 모른채 하였을 뿐만 아니라 이징옥 군사들이 새 도절제사 박호문을 포위하고 칼로 내리쳤는데도 도진무로서 응급 구호조치도 하지 않고 우물쭈물하면서 사태를 관망하였습니다."

피비린내를 부르는 보고서였다.


태그:#두만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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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事實)과 사실(史實)의 행간에서 진실(眞實)을 캐는 광원. 그동안 <이방원전> <수양대군>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소현세자> <조선 건국지> <뜻밖의 조선역사> <간신의 민낯> <진령군> <하루> 대하역사소설<압록강>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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