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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기 없는 정권의 임기 후반에 선거의 '판'을 키운 것이 화근이었다.

"밥 안준다고 우는 놈은 봤어도, 밥 안주겠다고 우는 놈은 처음 봅니다."

오세훈 전 서울시장이 시장직을 걸고 8·24 무상급식 주민투표를 밀어붙였을 때 나타난 트위터 반응의 백미는 이거였다. 그러나 오세훈은 끝내 한나라당의 만류를 뿌리치고 시장직을 사퇴했다. 기초단체장 몇 군데에 그칠 것으로 예상된 10·26 재보궐선거의 판을 내년 4월 총선과 12월 대선의 전초전으로 만든 것은 오세훈의 아집이었다.

서울시장 보궐선거는 무소속 박원순 후보가 집권여당인 한나라당의 나경원 후보를 7.2%p 앞선 압승으로 끝났다. 그간의 여론조사 추세로 보면 어느 정도 예상된 결과였다. '정권 후반전'에 치러지는 보궐선거는 여당에 절대적으로 불리하다는 게 선거판의 검증된 공식이다. 선거 구도로 보면, 서울시장 선거는 애당초 야권후보가 질 수 없는 선거였다. 물론 야권 후보 단일화를 전제로 한 선거 구도다.

'한나라당 vs. 비한나라당'의 대립구도 유지

27일 오전 서울시청으로 첫 출근한 박원순 서울시장 당선자가 마중나온 직원들을 향해 인사하고 있다.
 27일 오전 서울시청으로 첫 출근한 박원순 서울시장 당선자가 마중나온 직원들을 향해 인사하고 있다.
ⓒ 남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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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10년 6·2 지방선거의 가장 큰 특징은 2006년 지방선거 시기부터 나타난 한나라당 독주 구도가 무너지고 '한나라당 vs. 비한나라당'의 대립구도가 복원된 것이다. '한나라당 vs. 비한나라당' 대립구도는 지난 4·27 재보선 당시 강원도지사와 성남 분당(을) 선거에서도 재현되었고, 이번 10·26 재보선에서도 그대로 이어졌다.

정당 지지도에서 앞선 한나라당의 나경원 후보가 선거 초반부터 여론조사에서 무소속의 박원순 후보에게 10%p 이상이나 뒤진 것도  '한나라당 vs. 비한나라당' 구도에서 말미암은 것이다. 이는 뒤집어 말하면 선거 초반 박원순 후보의 높은 지지율은 박 후보 개인에 대한 지지가 아니고, 이명박 정권과 한나라당에 비판적인 비한나라당 유권자의 '전략적 지지'의 결과라는 얘기다.

더구나 박원순 후보의 지지율은 비한나라당 유권자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은 안철수 교수의 지원에 의존한 '취약한 지지'였다. 이는 결국 선거구도가 바뀌면 박 후보의 지지율도 급격히 무너질 수 있다는 얘기다. 그래서 한나라당은 본격 선거전에 돌입하면서 '정책 대결'이라는 프레임을 내세워 인물 대결구도로 선거구도의 변화를 꾀했다.

검증 명분을 앞세운 네거티브 공세는 몇 차례의 TV토론을 거치면서 효과를 거두었다. '학력'과 '병역'은 대한민국 국민이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는 소재다. 그래서 학력과 병역 시비는 선거 때면 어김없이 부각되는 단골 메뉴다. 그러나 같은 네거티브 선거전이라도 누가 공격수로 나서느냐에 따라 효과는 천양지차다.

사실 서울대 문리대 제적이냐 사회계열 제명이냐, 하버드대 객원연구원이냐 객원교수냐의 시비는 국민에게는 사소한 것이었다. 더욱이 아나운서 성희롱 국회의원이 나서서 학력 문제를 제기하니 뭐 묻은 개가 뭐 묻은 개를 나무라는 격이었다. 이처럼 도를 넘은 '신상 털기'에 대한 대중의 반응은 "너나 잘하세요"였다.

도를 넘은 '신상 털기'에 "너나 잘하세요"

박원순 야권통합 서울시장 후보가 24일 지지방문한 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에게 감사 인사를 전하고 있다.
 박원순 야권통합 서울시장 후보가 24일 지지방문한 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에게 감사 인사를 전하고 있다.
ⓒ 남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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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역 시비는 후안무치에 적반하장이었다. 병역 면탈을 위해 작은할아버지한테 '형제 기획 입양'을 보냈다는 게 한나라당의 주장이었다. 당시 박원순은 코흘리개 13살(중1)이었다. 같은 방위병 출신인 홍준표 대표와 남편이 '육방'(6개월 방위)이었던 나경원 후보가 박원순에게 병역 공세를 편 것도 우습지만, 대통령부터 총리까지 줄줄이 군 면제자투성이인 '병역 부실 정권'에서 병역 시비를 거는 것부터가 한편의 코미디였다.

그러나 빚이 4억 원이면서 월세 250만 원에 강남의 50평대 아파트에 사는 강남좌파 박원순을 집요하게 물고 늘어진 한나라당의 '협찬 인생' 공세는 대중에게 먹혔다. 특히 박원순 후보가 백두대간을 종주할 때조차 천만원대 등산장비를 K스포츠로부터 협찬 받은 사실이 공개되면서부터 중간지지층의 이탈이 시작되고 나경원 후보는 바싹 추격의 고비를 당겼다. 일부 여론조사에서는 나 후보가 박 후보를 오차범위 안에서 근소하게 추월한 것으로 나왔다. 하지만 거기까지가 네거티브의 한계였다.

정당의 대변인은 '정치의 꽃'이다. 사생활이 보장되지 않아 기피하기도 하지만, 아무나 하고 싶다고 되는 자리는 아니다. 이른바 신언서판(身言書判)이 뒷받침되어야 할 수 있는 자리다. 김영삼·김대중·노무현 전 대통령이 모두 젊은 시절에 야당 대변인을 하면서 대중 정치인으로서 주목을 받는 가운데 전국적으로 인지도를 높였다.

나경원 후보가 대중 정치인으로서 지명도를 높인 계기도 2004년에 비례대표로 국회에 들어간 그가 2006년에 당 대변인으로 발탁된 데 이어, 2007년 대선 당시 이명박 후보 선대위 대변인을 겸하게 되면서다. 그가 18대 총선에서 서울 중구에 출마해 재선에 성공하고, 한나라당 전당대회에 나가 두 차례나 3위로 지도부에 입성한 데도 대변인 시절에 쌓은 전국적 지명도가 큰 보탬이 되었다.

그러나 한나라당이 무상급식 논쟁 때 즐겨 썼듯이, 세상에 공짜 점심은 없는 법이다.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면서 정치인으로서 전국적 인지도를 속성으로 높인 만큼 자신이 쏟아낸 '말'의 대가를 치러야 하는 자리가 대변인이다. 그래서 대변인으로서도 해야 할 말과 해서는 안될 말의 한계 같은 것이 있다. 그 한계를 넘으면 아무리 '본변인'이 아닌 '대변인'일지라도 '천냥의 말빚'을 지게 돼 있다.

특히 낙향한 전직 대통령의 사저를 '봉하 아방궁'으로 매도했던 이명박 정권이 편법 매입한 의혹을 받은 내곡동 사저 문제는 선거전 초반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나 후보는 대변인 시절에 노무현 대통령의 퇴임후 봉하마을 사저 건립에 대해 "서민들은 죽어가는데 대통령은 6억 원 대출받는 것이 제정신인가"라고 반문하며 "최소한의 도덕도 없는 노무현 대통령"이라고 일갈했다. 노 대통령 지지자들에게 비수처럼 꽂힌 그의 독설은 이제 이명박 대통령의 내곡동 사저 '꼼수 매입' 논란 앞에서 부메랑이 되어 꽂혔다.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던 나경원의 호사 취미

나 후보는 또 한나라당의 지지세력인 보수우파를 결집시키기 위해 노무현 정부에서 태극기를 제대로 걸지 않는다는 것까지 시비를 걸며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고 공격했다. 24일 마지막 TV토론에서도 "박 후보가 2009년 '희망과 대안'이라는 단체 창립행사에 공동의장 자격으로 참석했는데 태극기와 애국가 없는 행사를 진행했다"고 공세를 폈다. 집집마다 태극기를 제대로 걸지 않는 것이 대통령의 책임이고, 행사장에 태극기가 없는 것이 행사 참석자의 책임이라면, 이제 그 말을 고스란히 되돌려 받을 차례였다. '네거티브의 늪'에 빠진 '탤런트 정치인'의 한계였다.

이번 선거에서 나경원 후보의 사생활과 관련돼 제기된 두 가지 의혹은 연회비가 1억 원인 강남의 피부클리닉에서 피부관리를 한 것과 2캐럿짜리 다이아몬드를 700만 원으로 축소신고한 것이다. 나 후보는 500~600만 원 정도를 냈을 뿐이고 실제로는 10차례도 가지 않았고(K피부클리닉), 23년 전에 시어머니가 700만 원에 구입해 선물해준 것(다이아몬드 반지)이라고 해명했지만 이미 '네거티브의 늪'에 빠진 뒤였다.

나 후보는 싯가 3천만 원(최고 1억원)인 2캐럿짜리 다이아몬드 가액을 축소신고했다는 야권의 공세에 "23년 전에 시어머니가 700만 원에 구입해 선물해준 것"이라고 해명했다. 그러나 나 후보의 지난 8년간(2004년~2011년) 공직자 재산등록 및 변동상황을 살펴보면, 나 후보는 비례대표 초선 때인 2004년부터 4년 동안 2캐럿 다이아몬드 반지의 가액을 공란으로 처리했다. 2004년에 신고한 재산은 약 19억원이었다.

그런데 나 후보가 문제의 다이아몬드 반지의 가액을 700만 원으로 신고한 것은 2008년 재선 의원이 되어 새로 40억 원으로 재산등록 신고를 할 때부터다. 2004~2007년 동안 0원이었던 반지의 평가액이 2008년에 700만 원으로 수직상승할 수는 없는 노릇이고 보면, 축소신고 의혹은 네거티브 공세가 아니라 정당한 검증이었다.

공직자윤리법 시행규칙에 따르면, 재산의 가액은 재산등록기준일의 평가액으로 산정하되 평가액이 없거나 사실상 확인이 불가능한 경우에는 실거래가격으로 산정하도록 규정돼 있다. 나 후보는 2캐럿짜리 다이아몬드 재산 축소신고와 관련 최소한 공직자윤리법을 위반한 셈이다. 

박원순 "나경원 후보는 이명박-오세훈의 아바타"

박원순 야권단일 후보가 나경원 한나라당 후보를 앞서 나가고 있는 가운데, 26일 밤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 마련된 나경원 한나라당 서울시장 후보 선거개표 상황실에 나 후보가 입장을 밝히기 위해 상황실로 들어서고 있다.
 박원순 야권단일 후보가 나경원 한나라당 후보를 앞서 나가고 있는 가운데, 26일 밤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 마련된 나경원 한나라당 서울시장 후보 선거개표 상황실에 나 후보가 입장을 밝히기 위해 상황실로 들어서고 있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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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에게 다이아몬드가 부귀의 상징이라면 좋은 피부는 아름다움과 젊음의 상징이다. 그래서 많은 여성들이 피부 미용에 공을 들이는 것인지 모르겠다. 또 40억대 재산을 가진 여성 정치인이 피부클리닉에서 고가의 피부관리를 받는 것 자체를 문제 삼을 수는 없을지 모르겠다. 50억대 재산을 가진 남성인 오세훈 전 시장도 이곳에서 피부 시술을 받아왔다고 하니 더 그렇다.

그러나 오세훈도 다녔다는 강남의 피부클리닉 문제는 나 후보의 막판 추격세에 쐐기를 박았다. 박원순 후보도 "나경원 후보는 이명박의 아바타, 오세훈의 아바타"라고 비판했다. 실제로 고액 피부관리에서 서민층이 피부로 느끼는 배신감과 중산층의 박탈감은 컸다.

'친박'계인 한 중진 의원은 26일 "한나라당 자체 예측조사에서는 서울을 제외한 모든 지역에서 한나라당이 이기는 것으로 나온다"면서 "MB의 '내곡동 사저' 문제와 막판에 불거진 '연회비 1억원 피부클리닉 출입' 논란이 결정적이었다"고 말했다. 박 후보는 서울 25개 자치구 중 21개 구에서 승리한 가운데 특히 서민층이 밀집한 관악구(62.7%)와 금천구(58.4%)로 가장 높은 득표율을 기록했다.

처음에는 정책대결을 앞세웠던 이번 선거 역시 선거전이 개시하자마자 네거티브로 시작해 네거티브로 끝났다. 그러나 인물 검증구도에서 보자면 역대 선거 때보다 진일보한 측면이 있다.

샐러리맨 신화를 바탕으로 서울시장이 되기 전까지 이명박은 평생 공익과는 담을 쌓고 사익을 추구해온 사람이다. 정계 입문하자마자 선거법 위반으로 국회의원직을 상실한 그가 미국에 가서 배워온 것도 월가의 탐욕이 낳은 '파생금융상품'을 취급하는 BBK자산운용의 김경준과 동업한 것이었다. 변호사로 활동한 오세훈 전 시장은 논외로 치더라도, 판사를 하다가 정계 입문한 나경원 의원은 7년만에 19억에서 41억으로 재산을 2배 이상 늘렸다.

이명박 대통령은 현대건설 CEO 시절에 열심히 벌어 모은 300억대 재산을 자신이 만든 장학재단에 '기부'했다. 일종의 '강남우파'인 이명박과 오세훈 그리고 나경원의 공통점은 수십~수백억대 재산가이면서 공직에 도전해 성취를 이룬 것이다. 또 다른 공통점을 꼽는다면 개처럼 벌어서 정승처럼 쓰면 명예를 얻을 수 있다는 착각이 아닐까 싶다. 그런 점에서 이번 서울시장 대결구도에서 서울시민이 선택한 새로운 인물 유형은 공익을 위해 헌신한 '실적'이 있는 사람이다.

20~30대의 '안철수 대망론'은 안철수가 걸어온 삶의 궤적과 기업인으로서는 보기 드문 공적 헌신에 매료되기 때문이다. 그는 안정된 직업(의대 교수)을 포기하고 자신이 개발한 백신프로그램을 1000만 달러에 사겠다는 유혹을 뿌리치고 일반인들에게 무료로 제공하고 회사를 함께 키운 직원들에게 주식(시가 60억원)을 무상으로 분배한 '실적'이 있다. 자신보다 앞서 안정된 전문직(변호사)을 버리고 20년 동안 시민운동에 헌신해온 '소셜 디자이너' 박원순은 안철수의 '롤 모델'이었다.

'아름다운 피부'와 '아름다운 재단'의 대결에서 서울시민은 후자를 선택했다.


태그:#서울시장, #박원순, #안철수, #나경원, #이명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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