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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오래 된 시위, '수요시위'. 그것은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이 지켜온 20년간의 용기다.
 세상에서 가장 오래 된 시위, '수요시위'. 그것은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이 지켜온 20년간의 용기다.
ⓒ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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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로 사람들을 성찰하게 한다는 뜻에서 역사는 귀한 스승이다. 그러나 추상적 관념이 아니라 실체로서의 역사를 이해하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대신에 우리는 그 역사를 관통한 인물들의 삶을 통해 역사를 추체험할 수 있다. 역사의 질곡을 맨몸으로 겪어낸 사람들, 이들이 겪은 삶은 '일상'을 넘어 '역사'가 되기 때문이다.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의 윤미향 상임대표가 쓴 <20년간의 수요일>(웅진주니어, 2010)에서는 그런 '역사적 삶'을 고통스럽게 살아온 할머니들을 만날 수 있다. '정신대 할머니'로 흔히 불려 온 이들이 겪어야 했던 한국 현대사. 이 책에서 우리는 역사가 무명의 갑남을녀들에게 어떤 상처를 입히는가를 아프게 확인할 수 있다.

<20년간의 수요일>은 지난해 나온 책이다. 지난 9월 18일 방영된 MBC <시사매거진 2580> '20년이 흘렀지만…'을 시청하고 정대협 홈페이지에 접속했다가 나는 이 책의 존재를 처음 알았다. 청소년을 위한 책이라는 걸 알았지만 나는 주저 없이 책을 주문했다. 학교 사서교사에게 이 책을 여러 권 구입해 달라는 것도 빼먹지 않았다.

윤미향, 웅진주니어, 2010
 윤미향, 웅진주니어, 2010
ⓒ 장호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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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와도 눈이 와도
병상에 누워 있어도,
일본대사관 앞
수요일 12시

그것은 희망이었습니다.

20년간 지켜온 할머니들의 용기와 희망

위 인용구는 책의 속표지를 넘기면 만나게 되는 구절이다. 이 책은 1992년 첫 시위 이래 20년 동안 계속돼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시위'라고 불리고 있는 정대협과 '위안부' 할머니들의 수요시위를 담고 있다. 이 책에 새겨져 있는 것은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이 지켜온 아름답고 경이로운 '용기'와 '희망'이다.

그리고 이어지는 지면에는 최갑순 할머니를 비롯한 모두 여덟 분의 할머니들의 초상이 실려 있다. 흑백 사진 속의 할머니들, 무심한 표정을 그저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아려 온다. 굵게 패인 주름, 앙다문 입술, 하얗게 센 성긴 머리카락…. 그것은 이 땅의 20세기를 할퀴고 간 가혹한 역사, 아직도 지워지지 않은 흔적이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 윗줄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공점엽, 김옥주, 박옥련, 박옥선, 최갑순, 이기선, 송남이, 박잠순 할머니.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 윗줄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공점엽, 김옥주, 박옥련, 박옥선, 최갑순, 이기선, 송남이, 박잠순 할머니.
ⓒ 20년간의 수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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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대를 따라 이동하고 있는 일본군 '위안부'들. 이들은 병사들을 따라 옮겨다니며 성 노예로 살아야 했다.
 군대를 따라 이동하고 있는 일본군 '위안부'들. 이들은 병사들을 따라 옮겨다니며 성 노예로 살아야 했다.
ⓒ 20년간의 수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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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1월 8일 첫 시위 이래 어느덧 1천회를 향해 달려가고 있는 이 역사상 전무후무한 시위는 여전히 청산되지 못한 일제의 전쟁범죄에 대한 '피해자'들의 문제제기다. 그러나 반인륜적 범죄인 '종군 위안부' 문제에 대한 진실 규명, 일본의 사죄와 배상을 요구하는 이 시위가 20년째 지속되고 있다는 것은 여전히 문제가 미해결 상태라는 뜻이기도 하다.

지난 20년 동안 매주 수요일 일본 대사관 앞에서 진행돼 온 이 시위의 주축은 물론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이다. 2차 대전 종전 후 무려 반세기 가까이 역사의 어둠 속에 묻혀 있던 이 끔찍한 진실을 세상 속으로 드러낸 김학순 할머니의 공개증언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고백'이라고 부르는 이유다.

이 끔찍한 역사의 희생자를 부르는 이름이 여러 가지로 나뉘어 있다는 사실은 이 문제가 가진 만만찮은 성격을 드러내준다. 정신대(挺身隊)는 '나라를 위해 몸을 바친다'는 뜻으로, '일제의 인력동원 정책'을 의미하는 낱말이므로 합당한 명칭이 될 수 없다.

또 위안부라는 말도 함부로 쓸 수 없는 이유는 그것이 전쟁 중 일본군의 '성 노예' 제도를 의미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결국 '강제 종군 위안부', '일본군 성 노예(Military Sexual Slavery by Japan)' 등을 거쳐 합의된 이름이 일본군 '위안부'다. '위안부'는 여전히 부당한 이름이지만 일제에 의해 불렸던 이름이므로 작은따옴표('')로 묶어서 사용하되 범죄 주체인 일본군을 붙여서 일본군 '위안부'라고 쓰게 된 것이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강덕경 할머니가 그린 그림 '라바울 위안소'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강덕경 할머니가 그린 그림 '라바울 위안소'
ⓒ 20년간의 수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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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이 겪은 참혹하고 고통스러운 희생은 비교적 널리 알려져 있다. 뒤늦게 이 비극을 전해 들으면서 사람들은 '고통스런 희생'이라는 글귀로 써내려가지만 할머니들이 살아온 세월과 그로 말미암은 상처를 어찌 말과 글로 다 표현할 수 있겠는가.  

공개 증언의 용기가 세상을 바꾸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중 최초로 공개 증언에 나섰던 김학순 할머니. 할머니는 1997년에 세상을 떠났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중 최초로 공개 증언에 나섰던 김학순 할머니. 할머니는 1997년에 세상을 떠났다.
ⓒ MBC-TV <시사 2580>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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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고국으로 돌아왔지만 자신의 과거에 대한 불안 때문에 고향으로 돌아가지도 못했고 여느 여성들처럼 쉽게 혼인하지도 못했다. 일본군 '위안부' 생활을 안 남편으로부터 학대를 당하기도 했고 몸이 망가져 아이를 가질 수도 없는 이도 적지 않았다. 그들은 피해자였지만 그들이 겪은 희생의 성격 때문에 오히려 비난 받았으며 스스로 침묵을 지킬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오랜 침묵 끝에 일본의 전쟁범죄를 고발한 할머니들의 수요시위는 20년째 계속되고 있다. 그 동안 234명의 할머니가 피해자 신고를 했고 그 중 많은 분들이 일본의 사죄를 받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 이제 생존자는 80여 분밖에 되지 않는다. 그러나 20년간 계속된 할머니들의 당당한 외침은 사회에 적지 않은 변화를 이끌어냈다.

강덕경 할머니의 그림 '빼앗긴 순정'
 강덕경 할머니의 그림 '빼앗긴 순정'
ⓒ 20년간의 수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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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정부는 국제 여론에 떠밀려 일본군 '위안부' 제도에 대한 조사에 들어갈 수밖에 없었고, 일부 책임을 인정하기에 이르렀다. 또 '강제성은 없었다'며 자신들의 법적 책임을 부인하다 부분적으로 강제성을 인정했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배상금' 아닌 '위로금'에 지나지 않는 '국민기금'을 피해자에게 지급하는 형식의 기만책으로 일관하고 있는 실정이다. 

오랜 침묵 속에 살다가 뒤늦게 인권에 눈뜬 할머니들의 눈부신 활약은 국제 사회에 엄청난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법적 강제력은 없지만 2007년 미국 하원과 유럽의회에서 '일본 정부의 사죄와 법적 배상을 요구하는 결의안'이 채택된 것이다.

정대협과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의 지치지 않는 끈질긴 싸움은 현실을 바꾸는데 그치지 않고 오랜 고통과 침묵 속에 살아온 할머니 자신들도 변화시켰다. 할머니들은 일본의 더러운 전쟁 범죄를 고발하고 증언하면서 전쟁이 인권 유린의 근원임을 깨달았고, 아주 자연스럽게 역사와 평화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갖게 된 것이다.

'전쟁과 여성인권 박물관' 건립 반대는 전근대적 역사의식

할머니들은 더 이상 자신과 같은 희생이 발생하지 않기 위해 전쟁을 멈춰야 한다고 굳게 믿는다. 또한 더 이상 여성들이 수난 당하지 않고 살 수 있는 '평화의 나라'를 위해 그런 역사를 기록해 놓은 박물관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2004년, 정대협이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의 명예와 인권회복, 미래 세대에게 평화로운 세상을 물려주기 위한 '전쟁과 여성인권 박물관'(박물관) 건립 사업을 시작했다.

박물관 건립 사업은 8년 간 모금활동을 펼쳐 17억원을 모으고, 서울시로부터 서대문 독립공원 매점 부지에 100여 평의 땅을 확보하면서 순조롭게 진척되는가 했다. 하지만 박물관 건립은 '독립공원 내 위안부 박물관 건립은 순국선열에 대한 명예훼손'이라는 광복회의 반대에 부딪히게 되면서 원점으로 돌아갔다.

'전쟁과 여성인권 박물관'을 위해 정대협이 매입한 성미산 기슭의 단독주택
 '전쟁과 여성인권 박물관'을 위해 정대협이 매입한 성미산 기슭의 단독주택
ⓒ MBC-TV <시사 2580>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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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일련의 과정이 MBC <시사매거진 2580> '20년이 흘렀지만…' 편으로 방영되면서 누리꾼들의 성토가 이어졌다. 그러나 서대문 독립공원 안 박물관은 무산되고 정대협은 모인 돈으로 성미산 기슭의 한 단독주택을 매입하는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박물관 건립사업이 좌초된 것은 아직도 잔존해 있는 전근대적 가치관을 뛰어넘지 못하는 우리 사회의 한계를 드러낸 일이었다. 사회적 약자로서 여성이 감당해야 했던 희생과 고통을 자신들의 빛나는 무용담의 격을 떨어뜨리는 것으로밖에 이해하지 못하는 우리 사회의 역사의식이 여전히 전근대적이라는 이야기다. 그런 뜻에서 주류 남성들이 만들어온 역사는 비겁하다 못해 치졸하기까지 한 셈이기도 하다.

피해자뿐만 아니라 '가해자'의 역사도 아우르다

지은이 윤미향 상임대표는 아주 쉽고 편하게 대화를 나누듯 조곤조곤 한국 현대사를 청소년들 앞에 펴 보인다. 청소년용으로 펴낸 책이지만 굳이 어른들이 읽지 못할 수준은 결코 아니다. 책에 다양하게 실린 관련 사진과 자료, 할머니들이 손수 그린 그림, 수요시위에 동참한 학생들의 편지글 등도 독자의 이해를 돕는다.

무엇보다 이 책의 미덕은 우리나라를 피해자로서뿐 아니라 현대사를 거치면서 스스로 가해자가 된 역사까지 아우르는 점이다. 지은이는 '전쟁과 여성, 끊임없이 되풀이되는 악연', 즉 전시에 자행되는 전쟁 성폭력의 진실을 깊숙이 들여다본다. 그리고 일본군 '위안부'가 지나간 역사가 아니라 지금도 여전히 존재하는 현실임을 환기하는 것이다.

이른바 제 2의 일본군 '위안부'는 우리 현대사 속에서도 재현되었다. 해방 후 미군 주둔기지 주변에서 공공연하게 이루어진 성매매나 산업화 시기 국가에 의해 암묵적으로 용인된 '기생 관광'이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베트남 전쟁에 참전한 한국군에 의해 벌어진 민간인 학살과 강간은 우리 자신이 피해자가 아니라 가해자로 뒤바뀐 역사적 비극이었던 것이다.

지은이는 마지막 장에서 '우리가 만들어 가야 할 미래'를 이야기한다. 남성 중심주의적 가부장적인 생각이 전쟁 중 성폭력을 일으키고 여성을 억압한다. 또 극단적 식민주의가 개인의 희생을 강요하며 여성을 '식민지'화한다고 그는 말한다. 또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의 끔찍한 희생이 우리에게 가르쳐 준 것은 역사적 진실과 함께 '인권'이야말로 우리가 지키고 보존해야 할 가치라는 것이다.

지난 8월, 헌법재판소는 일본군 '위안부'와 원폭 피해자들의 배상청구권을 두고 한일 양국 사이에 분쟁이 있음에도 정부가 아무런 해결 노력을 하지 않은 것은 위헌이라고 결정했다. 하지만 일본 정부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 청구권에 대해 협의하자고 한 우리 정부의 제안을 거부했다.

김복선 할머니와 황금주 할머니의 젊은 시절. 역사가 이 아름다운 처녀들을 일본군인들의 성 노예로 몰았다.
 김복선 할머니와 황금주 할머니의 젊은 시절. 역사가 이 아름다운 처녀들을 일본군인들의 성 노예로 몰았다.
ⓒ 20년간의 수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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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일본 정부와는 달리 일본 시민사회에서는 '건강한 반성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고 한다. 그들은 부끄러운 역사를 넘어 자국의 이익과 명예보다 인권을 선택한 것이다. 가해자로서 우리의 숙제인 베트남 문제는 시민사회를 중심으로 베트남에 학교를 세우거나 평화 활동을 펼치는 것을 통해 해결의 실마리를 찾아가고 있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의 삶을 다룬 다큐 <낮은 목소리>에 출연했던 이용수 할머니가 베트남을 방문해 피해 여성을 만나 그들에게 손을 내밀었다는 이야기는 묘한 감동으로 다가온다. 할머니는 처음에 베트남의 피해 여성을 만나는 것을 부정적으로 생각했다고 한다. 그러나 결국 할머니는 국적을 넘어 자신과 같은 피해자인 베트남 여성을 바라보게 된 것이다.

지은이는 '바르게 생각하고 바르게 알기'를 권하면서 책을 끝맺는다. 그러나 안다는 것만으론 부족하다. '참여하고 관심을 갖는 순간부터 역사는 변화해 갈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추상적 관념으로 우리 현대사를 이해해 온 청소년들은 그녀가 조곤조곤 들려주는 이야기를 들으며 그 추상과 관념을 하나씩 걷어내고 '역사'의 생생한 실체를 만날 수 있을 터이다.

덧붙이는 글 | <20년간의 수요일>(윤미향 씀 | 웅진주니어 | 2010.11. | 1만2000원)

책 표지의 날개에는 “이 책의 인세 전부는 ’전쟁과 여성인권 박물관‘ 건립 기금으로 기부됩니다.”라고 쓰여 있다. 앞서 말한 성미산의 단독주택을 마련했지만 박물관을 꾸미려면 6억 원을 성금으로 더 모아야 한다고 한다.

정대협 누리집(http://www.womenandwar.net/index.php)에 가면 10만 원으로 전쟁과 여성인권 박물관 1만인 건립위원으로 참여할 수 있다. 그게 부담스러우면 이 책(12,000원)을 사서 아이들과 함께 읽고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이 사업을 돕는 방법 중 하나다.

내가 구입한 책은 초판 3쇄다. 아직 만 부도 팔리지 않았다는 뜻이겠다. 부끄럽게도 우리보다 먼저 일본 도서관협회가 선정도서로 뽑은 책이니만큼 이 책의 가치는 충분한 셈이다. 아이들의 ‘몰역사’를 탓하지 말고 스스로 역사와 만나는 방법을 찾게 하는 것도 좋은 공부가 될 터이다.



20년간의 수요일 -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이 외치는 당당한 희망

윤미향 지음, 웅진주니어(2010)


태그:#수요시위, #20년간의 수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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쉰이 넘어 입문한 <오마이뉴스> 뉴스 게릴라로 16년, 그 자취로 이미 절판된 단행본 <부역자들, 친일문인의 민낯>(인문서원)이 남았다. 몸과 마음의 부조화로 이어지는 노화의 길목에서 젖어 오는 투명한 슬픔으로 자신의 남루한 생애, 그 심연을 물끄러미 들여다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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