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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평의 포천 사냥터
▲ 운악산 안평의 포천 사냥터
ⓒ 이정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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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명회가 홍달손을 데리고 명례궁을 찾았다.

"어서 인사드리게. 대군 나으리이시네."

홍달손이 예를 갖춰 절을 올렸으나 투박하다.

"자네 얘기를 듣고 한 번 만나보고 싶었는데 잘 왔네. 편히 앉으시게."
"황공하옵니다."

홍달손은 6척 장신 거구다. 자리에 앉는 모습이 고목이 쓰러지는 모습과 흡사했다.

"어디에서 왔는가?"
"선사포 첨절제사로 있다 돌아왔습니다."

홍달손은 무예에 능해 무과에 발탁된 무사다. 내금위(內禁衛)에 근무하다 의주도(義州道) 수군첨절제사를 봉직하고 한양으로 돌아온 것이다.

"고생이 많았겠군."

변방에 봉직하다 돌아온 일개 무부에게 '고생이 많았다'는 위로의 말은 감동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그것도 한낱 졸부(拙夫)가 아니라 대군이지 않은가.

"내가 선사포에 있을 때 함길도에서 온 자가 말하기를 '이징옥이 이경유를 시켜 경성(鏡城)의 병장기를 서울에 옮기도록 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처음 그 소리를 들었을 때 믿을 수 없었으나 자세히 알아보니 사실이었습니다."
"고얀 일이군."
"저들이 반역을 꾀하는 것이 분명하니 하늘은 속일 수 있어도 나리를 속일 수는 없을 것입니다."

홍달손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홍달손이 이제 도성의 순라꾼을 감독하는 감순(監巡)이 되었으니 그와 의논한다면 순졸 수백 인을 얻을 수 있으니 우리 일이 순조로울 것입니다."

한명회가 홍달손의 가치를 재삼 강조했다.

"성심을 다하겠습니다."

홍달손이 머리를 조아렸다.

"내가 홍달손과 마음이 통한 지가 아주 오래인데 충실하고 무략이 있어 큰일을 부탁할 만합니다. 때마침 해임되어 돌아왔으니 하늘이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수양이 홍달손에게 활을 내려 주었다. 신임의 징표다.

안평의 양주 사냥터
▲ 불곡산 안평의 양주 사냥터
ⓒ 이정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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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주 온천에서 돌아온 안평이 이제는 포천으로 사냥을 나갔다. 홍옥봉과 홍구성이 장정 수십 인을 거느리고 수종했다. 통문을 보내지 않았는데도 포천현감과 적성현감이 술과 고기를 가지고 찾아왔다. 사냥터에 웬 고기인가 싶지만 대군 사냥은 짧은 유희이고 속내는 무사들의 강무시범이다.

사냥이 끝났다. 안평이 술과 고기를 푸짐하게 내놓았다. 산속에서 고기잔치가 벌어진 것이다. 가진 것이라고는 힘밖에 없는 졸무(拙武)들은 잘 먹여주면 좋아한다. 그것도 평소에 먹기 힘든 소고기를 양껏 먹여준다면 밥 주는 주인을 따르는 견공처럼 주인에게 맹종한다. 잔치가 파할 무렵 철원부사와 연천 현감이 소와 돼지를 잡아가지고 찾아왔다. 고기 굽는 냄새가 산속에 진동했다.

포천에서 1박한 안평은 양주로 장소를 옮겼다. 양주 사냥터에는 홍약, 홍승, 홍적이 50여 명의 제자와 장사를 거느리고 합류했다. 사냥터에는 양주부사가 소를 잡아가지고 미리와 대기하고 있었다. 사냥은 뒷전이고 또다시 고기잔치가 벌어졌다. 고기 굽는 연기가 산을 뒤덮을 무렵 가평현감이 살아있는 소를 끌고 왔다. 장정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직접 잡아 구어 먹는 재미가 쏠쏠하기 때문이다. 고기잔치가 무르익어갈 무렵 안평이 대석 위에 올라섰다.

"내가 지금은 너희들에게 덕(德)을 베풀 것이 없다. 허나, 서운하게 여기지 말라. 배불리 먹고 천시(天時)를 기다리면 좋은 일이 있을 것이다."
"와, 와,"
"우, 우, 우,"

우렁찬 함성이 불곡산을 메아리쳤다.

가을빛이 완연한 궁
▲ 궁 가을빛이 완연한 궁
ⓒ 이정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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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바람이 스산하다. 푸른 잎새를 자랑하던 명례궁의 나무들이 하나 둘 옷을 갈아입기 시작했다. 시집가는 새색시가 옷 매무새를 고쳐 입는 모습과 흡사했다. 수양과 마주 앉아 있는 한명회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나리! 이제 결심할 때가 되었습니다."
"너무 서두르다간 낭패를 볼 수 있다."
"안평이 해주와 포천으로 유람 다니는 것으로 보아 마음을 놓은 듯합니다."
"사냥을 핑계되었지만 무부(武夫) 훈련이지 않느냐."

안평의 사냥터에는 한명회가 밀파한 첩자가 섞여 있었다. 실시간 보고를 받고 있는 것이다.

"무사다운 무사는 하나도 없다 하옵니다. 오합지졸은 훈련해도 오합지졸이고 무사는 쉬어도 무사(武士)입니다."

안평이 몰고 다니는 장정들은 고기나 얻어먹자고 따라다니는 오합지졸이니 걱정할 것이 없다는 것이다.

"권람과 홍달손을 불러오라."

순간적인 머리 회전은 한명회를 따라올 자 없지만 그래도 미더운 것은 권람이었다. 한명회가 쓴 편간을 쥔 하인이 튀어나가고 솟을대문이 닫혔다. 그 때였다. 이징석이 불쑥 찾아왔다. 예상치 못한 방문이었다.

예민한 후각으로 판세를 읽은 이징석의 줄타기

이징석은 탐나는 무사다. 하지만 그의 동생 이징옥이 김종서 뒤를 이어 함길도 절제사로 나가있을 뿐만 아니라 철저한 김종서 추종자다. 더구나 최근에는 그의 동태가 수상하다. 형제 간에 우애가 좋지 않아 의절하고 지낸다지만 피는 물보다 진하지 않은가. 아무튼 껄끄러운 존재다. 그가 예고 없이 찾아왔다니 의외였다.

"요즘 조정 돌아가는 꼴을 보면 열불이 나서 못 보아 주겠습니다. 안 그렇습니까? 대군 나리!"

이징석이 자리에 앉자마자 열변을 토했다.

"전하께서 나이가 어리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나이가 어려도 그렇지, 환관인가 내신가 하는 그 작자들. 임금님이 어리면 더 지극정성으로 모셔야지 대신과 대군의 수족이 되어 그들에게만 꼬리를 흔들고 있으니 이거야 원, 그들이 나라의 녹을 먹는 환관입니까? 개인의 사견(飼犬)입니까?"

아버지 상중에 동생 징옥을 구타하리만큼 괄괄한 성미 그대로 육두문자를 거침없이 날렸다. 무과에 장원급제한 이징석은 사복시 소윤으로 출사하여 좌군총제가 되어 도원수 최윤덕을 도와 파저강에 침입한 야인을 평정한 공으로 중추원사에 오른 강골 무사다. 허나, 동생 징옥의 청렴을 '복 없는 사람의 별호'라 조롱하리만큼 재물에 욕심이 많아 탐관오리로 지탄을 받은 인물이다.

"김정승과 안평대군도 그렇지. 환관들이 환관답지 않은 길을 가면 바로 잡아주어야 할 위치에 있는 양반들이 환관을 생일에 초청하여 재물이나 쥐어주고. 이래서야 되겠습니까? 안평대군이 이래도 되는 겁니까? 대군 나리!"

부인 상중에 생일을 맞은 안평은 마포강가에 자리잡은 그의 별장 담당정에 환관 김연·김득상·이귀·최득상·한송·최습·최언·조희를 불러 술을 먹이고 선물을 주어 보냈었다.

김종서와 안평대군을 성토하던 이징석이 문사찬(文士贊)과 무사찬(武士贊)을 읊조렸다. 요순시대의 명신 고요(皐陶)와 기(夔)의 충절을 풍자하는 시다. 자신에게 흠이 있지만 수하로 받아달라는 간절함이 배어 있다. 엄중하고 하수상한 시기. 예민한 후각으로 판세를 읽은 이징석의 곡예다.

한 사람의 무사라도 긴요한 수양. 이징석을 얻으면 천군만마를 얻은 것과 같다. 그가 비록 김종서만큼 무인들의 존경을 받는 위인은 아니지만 아랫것들을 따뜻하게 보살피는 우두머리 기질이 있어 따르는 자들이 꽤 있다. 갈등이 밀려왔다.

이징석과 이징옥의 불화. 비록 동모형제이지만 자신과 안평을 대입해보면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자신이 안평에게 칼을 겨누고 안평이 자신에게 활을 겨누고 있지 않은가. 남들은 이해하지 못해도 자신은 속속들이 이해할 것 같았다. 어쩌면 남남보다도 더 적극적일 수 있다는 생각이 수양을 유혹했다.

을 단풍으로 곱게 물들었다
▲ 단풍 을 단풍으로 곱게 물들었다
ⓒ 이정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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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징석이 돌아 간 직후, 한명회의 연통을 받은 권람과 홍달손이 헐레벌떡 뛰어왔다.

"어인일로 이렇게 급하게 부르셨습니까?"

급변사태라도 있느냐는 듯이 좌우를 두리번거렸다.

"함길도의 병장기를 빼내오고 군사를 모으던 저들의 반역이 가시화되었다. 그대들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앉아서 당할 수 없습니다. 명만 내려주시면 당장에 요절을 내겠습니다."

홍달손의 두 주먹이 부르르 떨었다.

"안평이 정신줄을 놓고 있는 이때가 절호의 기회라 생각됩니다."

권람이 동조했다.

"저들이 잡은 거사일은 며칠인가?"

수양이 한명회의 답변을 재촉했다.

"열이틀입니다."
"그럼 우리는 열흘로 한다."

수양이 선언했다. 거사일이 확정된 것이다. 명례궁의 결의는 황보인이 풀어놓은 첩자에 의해 즉각 전달되었다. 명례궁의 동태를 보고받은 황보인은 김종서에게 서찰을 띄웠다.

"큰 호랑이가 우리의 거사 계획을 알았으니 어쩔 셈이오?"
"그가 비록 알았더라도 어찌하겠소?"

김종서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이빨 빠진 호랑이가 무슨 재주가 있겠느냐는 자신감이다. 수양은 직책이 없다. 하지만 자신은 정승 판서를 장악한 지 오래다. 당상관 이상 고위 관료를 수족이나 다름없이 부릴 수 있다. 대간은 더더욱 그렇다. 임금이 갖고 있는 임면권도 황표로 요리하면 내 손에 있는 거나 다름없다. 자만할 수밖에 없는 환경이다.

황보인과 김종서가 주고받은 서찰 내용은 즉각 권람과 한명회에게 알려졌다. 명례궁이 또다시 긴장에 휩싸였다.

"우리의 계획이 누설되었으니 어찌할 것입니까?"

권람과 한명회의 입술이 타들어갔다.

"기밀 보안을 그렇게 당부했건만 어디에서 샜단 말인가?"

불호령이 떨어질 기세다. 떨어지면 목이 달아날 수도 있다. 지금 현재는 엄중한 시기다. 칼날 위에서 춤을 추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 사람의 실수가 전체를 죽일 수 있다. 허나, 과실을 추궁하기에는 시간이 없다. 이미 주사위는 던져졌다. 사위는 조용하고 숨소리마저 잦아들었다. 숨 막힐 것 같은 긴장감이 짓눌렀다. 그리고 적막이다.  잠시 생각에 잠겨있던 수양이 선언했다.

"이제는 돌이킬 수 없다. 저들이 우리의 거사를 알았다 하더라도 만나기로 약속하는 데 3일, 회의하는 데 3일, 결론 내리는 데 3일, 도합 8, 9일은 족히 걸릴 것이다. 우리가 정한 날짜만 어기지 않으면 승산이 있다. 다시는 와서 논하지 말라."

수양은 단호했다. 중단 없이 앞으로 가자는 것이다. 계유년 10월. 정난(靖難)은 이렇게 잉태되었다.


태그:#수양대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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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事實)과 사실(史實)의 행간에서 진실(眞實)을 캐는 광원. 그동안 <이방원전> <수양대군>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소현세자> <조선 건국지> <뜻밖의 조선역사> <간신의 민낯> <진령군> <하루> 대하역사소설<압록강>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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