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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성곽 북서문이다
▲ 창의문 한양성곽 북서문이다
ⓒ 이정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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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 북쪽 담장에서 백운동 쪽으로 꺾으면서부터 시작되는 창의문 고갯길은 좁고 가파르다. 가마 두 채가 서로 비켜가기에도 비좁다. 이렇게 험한 고갯길에 풍류를 즐기는 한량들과 권력 실세들의 가마가 길을 메웠다. 복숭아꽃이 피어서가 아니다. 자두 축제가 있어서도 아니다. 무계정사 낙성식이 있기 때문이다.

좌 인왕, 우 백악을 끼고 있는 창의문은 자라목에 해당하는 지점에 우뚝 서있다. 한양성곽 정북문인 숙정문이 있지만 사람들은 창의문을 북문이라 부른다. 또한, 백성들은 주변에 자두나무가 많아 자하문이라고도 부른다. 이 문은 아무나 통과할 수 없다. 왕실 종친이나 그에 준하는 선택된 사람들만이 드나들 수 있다. 한양이 품고 있는 왕기가 빠져나간다는 풍수설 때문에 평소에는 닫아두기 때문이다.

창의문을 통과하면 내리막길이다. 보현과 백악 사이에 흐르는 계류를 만날 때까지 계속 내리막이다. 도성 쪽에서 오르는 길보다 완만하지만 길다. 창의문에서 조금 내려가면 왼쪽으로 작은 계곡이 있다. 그 계곡을 따라 성벽 쪽으로 올라가면 인왕산 병풍바위를 배경삼아 우람한 집이 나온다. 예전에는 없던 집이다.

"나는 본시 번거로운 것을 싫어하여 이런 식 안 하고 그냥 넘어가려 했는데 여러 당우들 성화에 못 이겨 낙성식을 하게 되었소이다."

그랬었다. 격식을 싫어하는 안평은 집이 완공됨과 동시에 시인 묵객을 불러들여 시를 읊고 그림을 즐기며 젊은이들의 무예를 관람했다. 이 소식은 도성에 쫙 퍼졌고 중국에 나가있던 수양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수양이 귀국길에 무악재고개를 넘지 않고 창의문을 통과하여 도성에 들어가게 한 소문의 진원지다.

시인묵객들의 발걸음이 번다했던 영화는 어디가고 쇠락한 집만 덩그맣게 남아있다.
▲ 무계정사. 시인묵객들의 발걸음이 번다했던 영화는 어디가고 쇠락한 집만 덩그맣게 남아있다.
ⓒ 이정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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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속된 세상을 좋아하지 않고 조용한 산수를 좋아하여 이렇게 깊은 산속에 우거를 마련했소이다."

안평대군이 수염을 쓰다듬었다. 잘 다듬어진 안평의 수염은 선비들이 부러워하는 명품 수염이다.

"우거라니 당치 않은 말씀입니다."
누구인지 모를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살집이 아니라 잠시 머무는 집치고는 꽤 크다. 정면 5칸에 측면 2칸, 팔작지붕이다. 곁들여 1500여 평의 강무장이 마련되어 있다. 산속에 있는 집에 무사들 훈련장이 있다는 것이 예사롭지 않다.

"이 집은 내 집이 아니라 여러분들의 집이오. 쉬고 싶을 때, 한잔 술이 생각 날 때, 시 한 수 읊고 싶을 때, 주저 없이 찾아 주시오. 이렇게 좋은 여러분들의 사랑방을 만들어준 사람에게 고마움을 표하지 않는 것은 예의가 아니겠지요?"

안평이 좌중을 사로잡았다. 용모도 빼어나지만 언변도 보통 수준이 아니다.

"옳은 말씀입니다."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여기저기서 긍정의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선공부정 이리 나오시게."
이명민이 앞으로 나왔다. 선공부정(繕工副正)은 경복궁을 비롯한 궁궐과 4대문, 4소문을 중수하는 책임자다.

"이 부정으로 말할 것 같으면 창덕궁 중수에 여념이 없을 텐데 이 집을 지어주고 마포강가에 별장을 지어준 고마운 사람이오. 내가 치하하는 것보다 여러분들이 고마움을 표시하는 것이 예의라 생각하오."

박수가 터져 나왔다. 정분과 민신에게 아부하여 선공부정에 오른 이명민은 더 높은 곳으로 오르기 위해 김종서와 안평에게 줄을 섰다. 창덕궁 중수용 목재와 석재를 빼돌려 김종서 집을 수리해주고 고급자재와 장인을 빼돌려 마포강가에 안평의 별장 담당정을 지어주었다 그리고 무계정사도 깔끔하게 지어 낙성을 보게 된 것이다.

그는 창덕궁을 중수한다는 명분으로 금군 300명을 차출하여 세도가들의 집에 사역시키다 병조판서 정인지의 질책을 받았으나 오히려 세력가들의 힘을 빌려 정인지가 병조판서에서 물러나게 한 장본인이다.

정선이 280년 후 그린 창의문
▲ 겸재 정선이 280년 후 그린 창의문
ⓒ 이정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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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회가 무르익었다. 이몽가가 선공부정 이명민 곁으로 다가가 넌지시 운을 뗐다.

"수양대군이 자기 사저도 수리 해달라고 했다며?"
이몽가가 눈치를 살피며 너스레를 떨었다.

"창덕궁과 흥인문 공사가 바빠서 못해주었네."
바쁜 건 사실이다. 현재 임금이 영양위 정종집에 나가있다. 창덕궁 공사가 빨리 끝나야 임금이 환어할 수 있다.

"자넨 보기완 달리 배짱 있어. 나 같으면 그리 못하겠네. 그 배짱 똥 배짱인가? 참 배짱인가?"
"이 사람이 누굴 놀리나."
이명민이 눈을 흘겼다.

"그렇게 바쁜 사람이 어떻게 안평대군 별장을 세워주고 무계정사를 지어주었는가?"
"아무리 바빠도 잠깐 짬을 내었네."
"김정승댁 별당을 짓는데 재목과 기와는 물론 공장(工匠)과 역부를 보내주면서 수양대군 집에는 보내주지 않았다? 내 상식으로는 얼른 이해가 되지 않네. 역시 자네 배짱은 알아줘야 해. 같은 왕자인데 수양대군을 그렇게 차별해도 되는가?"
"안평대군은 만인이 우러러보는 바인데 어찌 그와 같겠는가?"
"수양대군 성정이 보통이 아닌데 그러다 경치면 어쩌려고?"
"명하는 바를 따르지 않을지라도 수양대군이 나를 어찌하겠는가?"
안평과 김종서 뒷배가 있으니 든든하다는 얘기다. 술이 몇 순배 돌고 연회가 무르익었다.

"좋은 명당에 훌륭한 집을 지었으니 당호(堂號)를 지어야지요."
이현로가 분위기를 잡았다.

"여러분들이 좋은 이름을 지어 주시오."
거나하게 취한 안평이 밝은 웃음을 지어보였다. 이승윤, 이개, 박팽년, 성삼문이 헌호(軒號)를 지어 바쳤다. 고개를 갸웃거리던 안평의 시선이 한 사나이 앞에 멈췄다.

"좋은 땅을 잡아준 김처사의 얘기를 듣고 싶소."
안평의 호명을 받은 김보명이 앞으로 나섰다. 김보명은 성녕대군 사저의 식객으로 풍수에 깊은 학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지화가 왕실 점쟁이라면 보명은 왕실 풍수다.

북한산 봉우리 중 하나다
▲ 보현봉 북한산 봉우리 중 하나다
ⓒ 이정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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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인이 일전에 보현봉 아래에 궁(宮)을 짓지 아니하면 정룡(正龍)이 쇠하고 방룡(傍龍)이 일어날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아무도 귀담아 듣는 이가 없었습니다. 이제 이 땅에 집을 지었으니 장손에 이롭고 만대에 왕이 일어날 것입니다. 허나, 한 가지 보(補)가 약한 것이 마음에 걸립니다."

"보(補)라 했소?"
안평의 얼굴이 굳어졌다.

"보현봉 아래에서 뚝 떨어진 기(氣)를 메우려고 정도전이 보토(補土)를 했지만 미약하기 이를데 없습니다. 보토를 보(補)하지 않으면 3대에 한 번씩 파란이 있고 아홉수를 넘기지 못할까 저어됩니다."

"으음!"
안평이 괴로운 신음을 토해냈다.

"3대에 한 번씩이라면 그 첫 번째가 태종 할아버지 때이고, 그 두 번째가 현재 어린 임금 때가 아닌가?"
맞는 말인 것 같기도 하고 틀린 말인 것 같기도 했다.

"아홉수라면? 3의9 그러니까 27대를 말하는 것 아닌가? 이 왕조가 27대에 끝난단 말인가?"
까마득히 먼 예기 같지만 끔찍했다. 영원불멸처럼 이어져 가야할 왕조가 27대에 끝난다니 말도 안 되는 헛소리 같았다.


태그:#수양대군, #안평대군, #무계정사, #보현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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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事實)과 사실(史實)의 행간에서 진실(眞實)을 캐는 광원. 그동안 <이방원전> <수양대군>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소현세자> <조선 건국지> <뜻밖의 조선역사> <간신의 민낯> <진령군> <하루> 대하역사소설<압록강>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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