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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쑤니가 사는 법> 겉그림
 <을쑤니가 사는 법> 겉그림
ⓒ 이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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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쑤니라 불러다오',  '내 이름은 미친년' ' "엘비스 저놈, 아직도 안 죽었냐?"'

<을쑤니가 사는 법>(이프) 소제목들이다. 저자는 '페미니스트저널 이프'의 대표이자 <오마이뉴스>-레인보우 상담실'에서 부부 상담을 하는 엄을순씨. 그가 웹진 <온라인이프(onlineif.com)>를 비롯, <중앙일보> 등에 쓴 칼럼을 모아 엮은 책이다.

제목만큼 내용도 재미있는지라 히히거리며 읽었다. 재미를 좀 더 잇고 싶었다. 이보다 더 재미있어 보이는 글 몇 꼭지 우선 뽑아 읽으며. 그리하여 목차에서 소제목들을 훑다가 제목 하나에 눈이 꽂히고 말았다. 내 마음과 눈을 한순간에 사로잡아 버린 것은 '엄마의 딜도(모조남근)'. 성인들이라면 누구나 알법한 그 것, 아무데서나 쉽게 입에 올리기 차마 좀 뭣한 그 딜도다.

재혼은 꿈도 못 꾸고 33년을 산 을쑤니의 엄마

여하간 이 제목을 보는 순간 야릇한 호기심이 뻗치고 말았다. 그리하여 "빨리 밥 먹고 나가야 한다"는 남편의 채근에 조바심을 내며 건성으로 상을 차려 준 후 지금 당장 안 읽으면 안 되는 것처럼 급하게 읽었다. '엄마의 딜도'. 솔직히 이 제목 보고 읽지 않고 그냥 넘겨버릴 어른들은 없을 것이다. 아마도, 딜도를 아는 이상은 말이다.

"미숙아(온 식구들이 '미숙'이가 예쁘다고 을순이 대신 미숙이라 불렀다), 미국에는 이상한 물건이 많다며?" 슬쩍 눈치를 보는 낮은 목소리였다. "이상한 물건? 뭐?"

"남자 그거랑 똑같이 생긴 것두 판다더라…. 한번 사와 봐. 엄마 구경 좀 해보자." 정말 의외의 말에 깜짝 놀란 나는 책을 덮고 벌떡 일어나 앉았다. "왓? 남자 고추? 뭔 말이야? 그딴 걸 내가 어떻게 알어? 징그럽게스리…."

그런데 엄마는 간단히 물러서지 않았다. "친구들에게 한번 보여 주고 자랑 좀 하려구 그래. 담엔 게브랄티 같은 영양제 사오지 말고 그거 한번 사와 봐."

"몰라, 별걸 다 시키구 그래. 나 더 잘래. 졸려." 나는 한마디로 잘라 버렸다. 엄마에게 그런 '야한' 얘기를 듣다니, 내가 얼굴이 붉어지고 얼른 화제를 돌리고 싶었던 것이다.
- <을쑤니가 사는 법> '엄마의 딜도'에서

남편 유학길에 함께 갔다가 미국에 눌러 앉아 살던 저자가 친정에 왔다. '미국에서 살며 무엇이 가장 먹고 싶더냐?' 는 친정엄마에게 호박잎과 쑥개떡이 제일 먹고 싶었노라. 이런 딸에게 재빨리 쑥개떡 한 쟁반을 해다 안겨준 친정엄마는 그 떡을 다 먹은 포만감으로 만족스럽게 엎드려 책을 뒤적거리고 있는 딸에게 얼굴을 붉히며 딜도를 사다 달라고 한다.

말하는 어머니보다 더욱 얼굴 붉어져 버린 저자는 민망해하며 정색하고 만다. 그리고 딸에게 말하기까지 몇 번이고 망설이고 망설이다가 용기를 냈을 어머니는 그 이후 더 이상 그에 대해 말하지 않는데…. 4년 전에 어머니는 돌아가셨다. 아버지가 일찍 세상을 뜨시는 바람에 마흔 넷에 혼자가 되어 자식들 땜에 재혼은 아예 꿈도 못 꾸고 33년을 외롭게 사시다.

'딜도'란 말에 싱글거리다, 마음이 복잡해졌다

엄마의 나이가 아마도 쉰 두셋쯤 되시지 않았을까? 지금의 나보다 젊은 나이다. 그때 난 왜 '그 물건' 좀 한번 보고 싶다 하시는 걸 외면했을까? 진정 그 물건을 친구들에게 보여 주고자 내게 부탁하셨는지, 아니면 '몰래 혼자 쓰려고' 그리하셨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엄마는 그때 게브랄티 영양제보다 그 물건이 더 갖고 싶으셨던 것이다.

이제야 엄마가 느꼈을 그 외로움이 피부에 와 닿는다. 당시 엄마 나이보다 더 늙은 나는 아직도 여자로 보이길 바라면서, 엄마는 왜 여자로 보지 않았는지…. 엄마니까? 그랬을 것이다. 엄마는 모름지기 그런 쪽에는 관심조차 없어야 정상이라고 생각했으니까. 타임머신이라도 있다면 타고 그때로 돌아가서 외로운 엄마에게 그 '야한 물건'을 색깔별로 사이즈별로 잔뜩 안겨 드리고 싶은 마음, 정말로 간절하다. - <을쑤니가 사는 법> 중에서

'딜도'라는 야한 물건에 꽂혀 '어떤 이야기일까?'호기심으로 싱글거리며 웃다가 오래 전의 낯 붉은, 참 죄송스런 기억하나가 불현듯 떠올라 마음이 복잡해지고 말았다. 첫 아이를 낳으러 친정에 갔다가 내 급한 사정만 앞세워 아무런 기척도 없이 안방문을 열었을 때 당황스러워 하시던 친정 부모님의 그 모습이.

그때 두 분이서, 내가 불현듯 뛰어들기 전까지 무엇을 하고 계셨는지 그때도 지금도 잘 모른다. 다만, 엄마의 볼에 희미하게, 수줍고 발그레한 미소가 남아 있는 걸 느끼며 철없고 예의 없는 행동이 죄송스러웠던 것은 분명하다. 내방으로 돌아와 '혹은 그럴지도 모른다'며 그때 처음으로 중년의 사랑을 잠시 생각해 봤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때 '엄마의 딜도'속 저자처럼 참 낯설기만 했다. 엄마의 성(性)이.

중년남자의 정력은 자랑이고 권력이고 젊음의 상징이고, 중년 여자의 정력은 추하고 창피하고 혐오스러운 것인가? '끼 있는 어머니', '섹시한 어머니'라는 말은 왜 그리도 어색하기만 할까? 나 자신은 '희생의 어머니'라는 찬사보다 '매력적인 어머니'라는 말이 더 듣고 싶은데 말이다. 요즘 나이 든 독신 여성들은 성적 욕구를 어떻게 처리하고 있을까? 우리 엄마 때보다도 나아졌을까? - <을쑤니가 사는 법> 중에서

'딜도'라는, 성과 관련된 단어 하나만으로 이상야릇하면서 기발하게 재미있는 그런 이야기를 기대하며 읽었던 것과 달리 이 글은 이런 물음들로 끝난다. 내가 기대했던 이야기와 많은 차이가 있지만 이 글은, 저자의 자책과 물음은 오래도록 마음에서 떠나지 못할 것 같다. 이 책을 읽기 전까지 단 한 번도 부모님들의 성에 대해 생각해 본적이 없기 때문이다. 부끄럽고 죄송스럽게도 말이다.

여자는 60이 넘어도, 70이 넘어도 '여자'다

친정어머니이든 시어머니이든 같은 여성으로서의 어머니는 생각해 보지 않은 것 같다. 늘 엄마 혹은 어머니로만 생각하며 무언가 바라고 기대한 것 같다. 이제 두 분 어머니 모두 칠순 중반. 더욱 부끄러운 것은, 지난 날 같은 여성으로서의 어머니를 헤아려 드리지 못했음이 참 죄송스럽다는 것을 쓰는 이 순간에도, 내 스스로 두 분을 '다 늙은 할머니'라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두 분의 욕구와 바람을 전혀 모르면서, 헤아려 볼 생각조차 없이 60대 중반이면 몰라도 이제 70대 중반이니 그런 여성으로서의 성적 욕구들과는 이제 아예 상관없는 그런 아이들의 할머니들로 말이다. '여자들은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는 언제까지나 수줍은 소녀'라는 말도 더러더러 했으면서 말이다.

마침 추석이다. 이번 추석에는 어머니에게 좀 물어 볼까? 이미 오래전에 폐경을 했지만 마음은 여전히 청춘인지라 여전히 수줍을지도 모를, 훗날 내 어머니들처럼 늙어갈 여자들이 헤아려 주지 않으면 그 누구도 헤아릴 생각조차 하지 않을, 아무도 물어주지 않는 70대 어머니들의 성을 말이다.   

이 책은 페미니스트 이론서가 아니다. 그러나 이 책에는 딸로서의 그녀, 엄마로서의 그녀, 아내로서의 그녀, 친구로서의 그녀, 사회의 어른으로서의 그녀, 여성운동단체를 이끄는 지도자로서의 그녀 등 엄을순이 갖고 있는 여러 가지 정체성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다. 그녀의 글을 읽다보면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정치적이다'라는 페미니즘의 금언을 저절로 깨달을 정도로 그녀는 철두철미 태생적 페미니스트이다. 결국 그녀는 이 책을 통해 '을쑤니표 페미니즘'의 커밍아웃을 하고 있는 셈이다. - 추천사(전 언론인 유숙열)

전쟁 치르러 시댁으로 간 그녀에게 선물하고픈 책

남자들에게 꼭 읽히고 픈 '밑줄긋기'
"당신, 이제 내 맘 알겠네. 결혼과 동시에 자기 집 호적에 내 이름을 올리자마자, 생전 얼굴 한 번 못 본 당신집 조상들을 위해 허리 휘어가며 차려 내야 하는 차례상이 다 내 몫이 되었을 때의 그 황당함을. 정작 자기 식구들은 옆에서 웃고 놀고 있는데 말이야."

어쩌면 페미니즘이야말로 딸 가진 아빠들이 하기에 딱인지도 모른다. 내 딸이 직접 당해봐야 차별이 뭔지, 뭐가 문제인지 몸으로 알 것이고, 딸 눈의 눈물을 보고 나서야 '아, 그래서 페미니스트들이 차별 철폐를 외치며 입에 거품을 물었었구나!'하고 느낄 것이다. - <을쑤니가 사는 법>에서
지난 6월에 나온 책이다. 제목에 끌렸지만 최근 즐겨 읽는 분야가 아닌지라 더 이상의 관심을 두지 않았는데 며칠 전 누가 꼭 읽어볼 것을 권했다. 덕분에 이 책을 읽는 3일 동안 참 많이 즐거웠고 그리고 행복했다.

'미친년'소리를 들고 자란 '못 말리는 여자' 을쑤니의 익살맞고 기발하고 따뜻한 글들도 재미있지만, 자칭 '현재진행형 싸움닭'인 그녀의 날카롭고 명쾌한 여성관련 글들은,'그래도 여전히 억울하고 부당한'우리 여성들의 입장과 사정을 제대로 헤아려 그 누구보다 속시원히 말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남대문 같은 친구들'이나 '언니의 세상의 모든 음식'과 같은 글은 그동안 어려울 때마다 많은 도움을 받았으면서도 그때 그때 고마움만 느꼈지 언제 한 번 따뜻한 밥 한끼 대접하지 못한 내 자신을 돌아보게 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함없는 애정으로 함께 살아가는 피붙이와 친구들의 소중함을 새삼 느끼게 한 글이다. 명절 후 이사 계획이 있는데 이사를 끝내고 밥 한끼 꼭 대접해야 겠다(앗~! 서프라이즈와 같은 밥상을 계획했는데 ㅠ.ㅠ).

내 주변에 "주변 사람들을 헤아릴 줄 모르고 저밖에 모르며 밖으로만 나도는, 시어머니와의 사이를 아프게 헤집어만 대는 자칭 페미니스트 시누이 때문에 페미니스트들이 곱게 보이지만은 않는다"는 한 억울한 올케가 있다. 어제 오후 '이번에도 전쟁 치르는 무거운 마음으로 간다'며 시댁에 간 그녀가 무사히 귀환해 줬으면 좋겠다. 진짜 페미니스트를 만날 수 있는 '을쑤니표 페미니즘'을 선물할 수 있도록 말이다.

덧붙이는 글 | <을쑤니가 사는 법>(엄을순 씀 2011.6 이프 13800원)



태그:#여성운동, #며느리, #명절, #추석, #이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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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제게 닿아있는 '끈' 덕분에 건강하고 행복할 수 있었습니다. '책동네' 기사를 주로 쓰고 있습니다. 여러 분야의 책을 읽지만, '동·식물 및 자연, 역사' 관련 책들은 특히 더 좋아합니다. 책과 함께 할 수 있는 오늘, 행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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