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아픈 사람이라면 누구나 치료받을 권리, 돈 때문에 목숨을 저울질하지 않아도 될 권리가 바로 무상의료다. 영국은 국가가 재정을 조달하고 의료 서비스를 관리하는 대표적인 무상의료의 나라다. 의료 서비스의 질과 재정 문제 등 많은 도전에 직면해 있지만 60년 넘게 무상의료 제도를 유지하고 있다. 의료 불평등과 의료시장 민영화 등의 한국사회 의료 문제의 해법을 영국에서 찾아보고자 한다. [편집자말]
영국의 의료 서비스(NHS) 시스템을 취재하기 위해 6일 런던에 도착한 송주민 <오마이뉴스> 시민기자가 버스를 기다리며 취재노트를 정리하고 있다.
 영국의 의료 서비스(NHS) 시스템을 취재하기 위해 6일 런던에 도착한 송주민 <오마이뉴스> 시민기자가 버스를 기다리며 취재노트를 정리하고 있다.
ⓒ 남소연

관련사진보기


글 : 송주민 기자
공동취재 : <오마이뉴스> '유러피언드림 영국편' 특별취재팀

새벽 추위에 몸을 움츠리며 잠에서 깼다. 창밖으로 들어오는 아침 햇살이 눈부시고 은은해 적당히 차려 입고 1층으로 내려갔다. 백 년도 넘어 보이는 고풍스러운 건물들, 화려하지 않고 절제된 필체의 상가 간판들, 새빨간 2층 버스, 9월 초 서울에서는 느낄 수 없었던 쌀쌀함 등등. 이제야 먼 길 떠나온 게 실감이 난다. 그렇다. 여기는 영국 런던이다. 

나와 박순옥, 남소연 기자는 <오마이뉴스> 유러피언 드림 기획 '영국의 의료제도 NHS(National Health Service, 국가보건서비스)'를 취재하러 이곳에 왔다. 직항 비행기 표를 구하지 못한 탓에 환승 대기 시간을 포함한 20시간에 가까운 비행. 기다리다 지쳐 버린 긴 시간의 입국심사. 게다가 런던 패딩턴에 위치한 숙소에 오기까지 '어리바리' 보낸 시간까지 포함하면, 한국 시간으로 어제(6일) 새벽 6시경 집에서 출발해 영국 시간으로 밤 11시경 도착했으니 거의 25시간 만에 여기에 온 것이다(영국은 한국에 비해 시차가 8시간 늦다).

원래는 어제 이 첫 번째 기사를 마감해 한국에 전하려 했다. 그러나 숙소에 오자마자 셋 다 모두 파김치가 된 터였다. 영국에 왔다는 설렌 감정을 느낄 여력도 없이, 우리는 뻗어 버렸다. 그래서 도착 이튿날인 7일 아침, 일어나자마자 이 글을 쓰고 있다.    

어제 이곳에 오면서, 우리 셋이 나눴던 '비행기 안 토크'가 떠오른다. 좁은 객실에서 버텨야 하는 16시간의 비행, 뭐하며 시간을 때우지? 의료 관련 취재를 가는 만큼, 각자 한국서 겪은 '병원 이야기'부터 꺼내며 수다를 시작했다.

내 부모라 생각하니... 지역병원 못 보내겠더라

아버지의 위암 투병으로 마음 졸인 적이 있는 남소연 기자는 할 말이 많은 듯했다. 남 기자의 아버지는 2009년 위암 판정과 함께 위 절제술을 받았고, 경과는 다행히 성공적이었다. 현재는 6개월에 한 번씩 확인진료만을 받고 있다. 마침 런던 가는 날이 진료일이었단다. 아버지는 5일 서울에 올라와 같이 하루 묵고, 딸을 공항으로 보낸 뒤 오전 진료를 받으러 갔다고 했다.

"부모님이 어디에 사시는데 서울까지?"
"청주."
"거기에도 큰 병원 있지 않아요?"
"아버지는 지역 병원에서 치료받겠다고 했는데, 내가 극구만류했어. 곧장 서울의 큰 병원 중 위암 치료 유명한 곳을 골라 예약부터 해버렸어. 장시간 설득끝에 결국 모시고 올라왔지."

남 기자는 "내 부모라 생각하니, 수술이 조금이라도 잘못되면 어쩌나 하는 불안감이 커 이름 난 병원을 찾게 되더라"며 "기왕이면 양질의 의료 서비스를 받게 해드리고 싶었고 그러다 보니 입소문난 서울의 병원을 선택하게 되더라"라고 말했다.

나는 얼마 전 대학병원에서 진료를 받은 기억이 떠올랐다. 위내시경 상으로 식도염 판정을 받았고, 의사가 두어 가지 검사를 더 해보자고 했다. 위산의 역류 정도를 파악해 본다며 식도산도검사를 했다. 거기에 살 빠지는 게 의심스럽다면서 갑상선초음파검사까지 받았다. 나중에 보니, 총진료비 50여만 원 중 거의 40만 원이 본인부담금으로 영수증에 찍혀 나왔다.

두 가지 검사를 했을 뿐인데 왜 이리 비싸? 비급여 검사라 그렇단다. 게다가 검사 때마다 붙는 선택 진료비까지. 허술한 보장 범위 때문에 본인부담금이 80% 가까이 찍힌 영수증을 받으며, 절실히 깨달았다. 우리나라 건강보험제도, 고작 이 정도였어?  

박순옥 기자도 입을 열었다. 그는 2007년 달리는 자전거와 심하게 부딪힌 후 뇌진탕으로 입원 치료를 받았다. 이야기는 의외의 곳으로 흘렀다. 당시 민간 의료실비보험에서 치료비의 90% 가량을 보전해 줬는데, '공돈'을 받는 것 같아 입원해 있으면서도 기분이 참 좋았단다. 미소짓는 그를 보며 보험 가입을 권유했던 보험 설계사 후배는 "언니가 지금까지 낸 것을 '당연하게' 돌려받는 건데, 그렇게 좋아?"라고 반문하더란다. 당시 그는 자금 사정이 넉넉치 않았는데도 실비보험으로만 매달 6만 원 가량의 돈을 꼬박꼬박 내고 있었다. 혼자 사는데 아프면 안 된다는 불안감이 갑자기 엄습했기 때문이란다.

"뭐랄까. 건강해서 병원 안 가면 그동안 낸 보험료 날리는 느낌이고, 아파서 병원에 가면 보너스 챙기는 느낌? 이거 내가 아파야 하는 건지, 안 아파야 하는 건지 헷갈리더라니까."

의료비 불안,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 민간보험이 해결할까

하늘을 날아가며 두서없이 쏟아낸 이야기들. 그리 특별하고 유별난 사연은 아니었다. 하지만 찬찬히 살펴 보니, 우리 일상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한국 의료 서비스의 문제점들을 하나씩 관통하고 있었다.

우선 남 기자의 경우는 '수도권 유명병원 쏠림현상'이 일어나는 이유를 전형적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그는 "가족들이 서울에 연고가 있는 걸 그나마 다행으로 여긴다"며 "병원 선택 문제에 있어 형제들도 적극 동의했다"고 말했다. 서울의 유명 병원 앞 여관에는 진료를 받기 위해 올라온 지방에서 온 환자들로 가득하고(특히 KTX 개통과 암의 건강보험 보장성 증가 이후), 지역 혹은 이름 없는 병의원들은 고사 직전으로 내몰리고 있다는 보도가 과장이 아닌 것이다.

내 경우는, 국민건강보험 보장성이 여전히 미약하고 포괄적이지 않다는 걸 보여주는 일반적인 사례였다. 이 틈을 비집고, 민간의료보험이 국민들의 '의료비 불안'을 지렛대 삼아 점점 세를 넓히고 있다. 최근 텔레비전를 켜기만 해도 쏟아지는 민간의료보험 광고는 그 불안감에 석유를 들이붓는 것 같은 효과를 낳고 있다. 박 기자의 사례는 매달 값비싼 민간보험료를 내다 보니, 아파야 '이익'인 것 같고 안 아프면 '손해'인 것 같은 웃지 못할 기분이 드는 세태를 보여준다.

영국은 과연 어떨까?

영국은 유럽에서도 자본주의 성향이 짙은 나라로 꼽힌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가장 사회주의적으로 보이는, 국가가 관리하는 '문제적' 의료제도 NHS(National Health Service)를 가지고 있다. 간단한 진료부터 큰 수술까지 모든 의료 서비스는 국민의 권리이며 모두 조세로 해결한다(치과, 약값 등 일부 제외).

우리나라처럼 국민건강보험제도를 운영하지 않고 국민이 낸 세금에서 의료에 관련한 예산을 할당한다. 의료 서비스의 90% 이상이 공공의료가 차지하고, 의료진들은 대부분 국가와 계약을 맺고 일한다. 때문에 우리 사회에도 화두가 되고 있는 '무상의료'(엄밀히 말해 이 표현이 적절한지는 의문이다)의 전형으로 자주 영국이 꼽힌다.

도전에 직면한 NHS... 마이클 무어의 거짓말?

영화 <식코>에서 영국은 감독 마이클 무어가 고발하려는 비참한 미국의 의료 현실과는 정반대인, 모든 국민이 무상으로 양질의 의료 서비스를 받을 수 있는 '천국' 중 한 곳으로 그려진다. 하지만 '영국에서는 수술 기다리다 사람이 죽어간다' '영국에서는 치아를 본드로 붙인다더라'는 식의 '영국에서는~' 괴담도 만만치 않다.

특히 한국 의사들은 영국을 '의료 후진국'으로, 한국인 유학생들은 '갈 곳이 못 되는 영국 병원'이라는 신념 아닌 신념을 가지고 있다. 실제 영국에서도 막대한 재정 부담과 의료 서비스의 질, 긴 대기시간 등이 문제가 되고 있으며 특히 현 데이빗 캐머런 총리가 'NHS 개혁'을 천명하면서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실제 <유러피언 드림> 기획으로 영국을 찾아 NHS를 살펴보겠다고 했을 때 '이제 NHS는 끝난 거 아니냐, 다른 아이템을 찾으라'는 반응을 보이는 사람도 있었다. 1948년에 시작돼 60년이 넘게 이어온 영국의 자랑거리, 무상의료의 모델이었던 NHS는 정말 저물어 가고 있는 걸까.

11일 동안 영국에 머무르며, NHS에 대한 다각도의 취재에 나선다. 우선은 평소 한국에서 병원을 이용하며 생각했던 것들을 낮은 눈높이에서 면밀히 살펴보려 한다. 제도 분석, 권위자 인터뷰 등의 '딱딱한' 취재뿐만이 아닌, 영국인들 삶 속에 녹아 있는 문화와 일상으로서의 NHS를 조명할 예정이다. 영국의 한인들도 만나, 양국 의료 모두를 체험한 사람들의 생각도 들어볼 계획이다. 

어제는 피곤해서 아무 생각도 안 났는데, 오늘 아침은 무척 기분이 상쾌하다. 그리고 설렌다.

<오마이뉴스> 유러피언드림 영국편 특별취재팀
:  남소연·박순옥 기자, 송주민 시민기자


태그:#유러피언드림, #영국 NHS, #영국, #무상의료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