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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리 머리 색깔을 닮은 강물이 눈부시게 푸르다.
▲ 압록강 오리 머리 색깔을 닮은 강물이 눈부시게 푸르다.
ⓒ 이정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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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성에서 북경까지 사신 길은 만만한 길이 아니다. 한양에서 의주까지 천 여리. 압록강에서 북경까지 2300리. 도합 3300리. 2개월 이상 걸리는 대장정이다. 한양에서 의주까지 국내 길은 그래도 괜찮은 편이다. 개성 태평관, 평양 대동관, 국경 의주관에서 현지 관리들의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

사은사 일행이 의주목사 유응부의 환송을 받으며 용만에서 배에 올랐다. 오리의 머리 색깔을 닮았다 하여 압록(鴨綠)이라는 이름을 얻은 압록강 푸른 물이 눈부시다. 백두산에서 발원하여 서해바다로 흘러내리는 압록강을 바라보니 가슴이 뭉클했다.

"신집의! 명나라에서는 이 강을 뭐라 이름 하나?"

사신으로 떠나기 전, 수양은 집현전 직제학으로 있던 신숙주를 사헌부 집의로 천거했다. 사신단의 격을 올리기 위한 전략이다.

"청하(淸河)라 부르며 장강, 황하와 함께 3대강으로 통합니다."
"으음! 우리에게 첫째가 중국에선 셋째라..."

 뒤에 보이는 산이 의주 삼각산이다.
▲ 백마산성 뒤에 보이는 산이 의주 삼각산이다.
ⓒ 이정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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쓴 입맛을 다시며 의주쪽을 바라보았다. 백마산성이 눈에 잡혔다. 통군정이 아스라하다. 고개를 들어 먼 하늘을 바라보았다. 삼각산이 시야에 들어왔다. 가슴에 품고 싶은 조국 땅이다. 배가 강심에 이르렀다

"강물은 강을 버려야 바다로 나아가겠지."
"이르다 말씀이겠습니까."
"강이 강물을 버리면 어떻게 되나?"
"그래도 강물이 바다로 흘러가는 것은 변함이 없습니다."

이성계가 회군한 곳이다.
▲ 위화도 이성계가 회군한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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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양과 신숙주의 대화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던 황보석과 김승규는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아직 판단은 이르다. 허나, 난해하다. 사신 일행을 태운 배가 위화도를 스치고 지나갔다.

"이곳에서 15일간 고민하신 태조 할아버지의 심정은 어땠을까?"

요동정벌을 명받은 이성계는 위화도에서 보름간 숙영하다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거스를 수 없다'는 명분으로 군사를 돌렸다. 위화도회군이다.

"회군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후대의 사가들이 할 일이지만 결단 그 하나만은 존경스럽다."

자신에게 그러한 결단의 순간이 찾아온다면 쉽게 결정하지 못할 것만 같았다. 이윽고 배가 명나라 쪽 강섶에 닿았다. 애자하와 합류하는 꽤 큰 나루였다. 나루터에는 조선에서 중국으로 가는 인삼과 약초, 담비가죽이 쌓여있었으며 중국에서 조선으로 오는 비단과 당화(唐貨)가 그득했다.

 애자하와 압록강이 합류하는 지점. 개발로 나루터는 사라져 버렸다. 뒤에 보이는 것은 고구려 박작성으로 중국이 동북공정의 일환으로 만리장성 동쪽 끝이라고 주장하기 위해 새롭게 단장한 호산산성.
▲ 애하 애자하와 압록강이 합류하는 지점. 개발로 나루터는 사라져 버렸다. 뒤에 보이는 것은 고구려 박작성으로 중국이 동북공정의 일환으로 만리장성 동쪽 끝이라고 주장하기 위해 새롭게 단장한 호산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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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중국이다. 배에서 내렸다. 난생 처음 밟아보는 중국 땅이다. 명나라 땅을 밟는 순간 무어라 말할 수 없는 감회가 등골을 타고 꼬리뼈로 흘러내렸다.

"아버지의 나라 중국. 허나, 그 아버지의 나라는 우리를 자식처럼 생각하지 않는 관계. 대국이라 우러러 바라보는 명나라. 그 나라는 우리가 수많은 변방 중 한 나라에 불과하다는 자세. 아버지처럼 떠받드는 명나라. 하지만 그 나라는 조선을 자식처럼 대해 주기는커녕 한없이 굴종만을 요구하는 나라."

실타래처럼 얽힌 수많은 생각들이 머리에서 맴돌았다.

"신집의! 중국은 왜 우리 태조 가계(家系)를 정정해주지 않지?"
"건국 이래 몇 차례나 주청사를 보내 정정을 요구했지만 아직 실현되지 못했습니다."
"몇 년이나 되었는가?"
"60년이 넘었습니다."
"언제쯤 정정되겠나?"
"저들의 행태로 보아 100년 이내에는 고쳐지지 않을 거라 생각됩니다."
"백년씩이나?"
"네, 그렇습니다."
"고약한 일이군."

태조 이성계 호적.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 호적 태조 이성계 호적.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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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은 그들의 법전 대명회전 조선국조(朝鮮國條)에 '이인임의 아들 이성계가 4명의 왕을 시해했다'고 기록했다. 이성계가  네 명의 고려왕을 죽였다,' '공민왕, 우왕, 창왕, 공양왕 등 4명 전부는 아니다'라는 역사적 논쟁은 잠시 접어두더라도 '이성계가 이인임의 아들이다'라는 부분은 명백한 오류다.

이인임은 공민왕 때 문하시중을 역임한 정치가다. 원나라 공주와 결혼한 공민왕은 노국공주가 죽자 공황에 빠졌다. 이 때 공민왕에게 꽂힌 여인이 있었다. 승려 신돈이 총애하는 시녀 반야(般若)다. 임금이 체통 없이 야행(夜行)하여 불같은 밤을 보냈다. 그 후, 반야에게서 사내아이가 태어났다. 모니노다.

공민왕에게 후사가 없자 이인임은 모니노를 옹립하여 우왕을 만들었다. 조정이 발칵 뒤집혔다. 모니노는 공민왕의 혈육이 아니라 요승 신돈의 자식이라는 것이다. 이인임은 이성계에 의해 경산에 유배되어 죽었다. 고로 이성계의 정적이었다.

'틀린 기록도 기록이다'라고? 고쳐달라고 애걸

오류를 발견한 조선 조정이 정정을 요구했지만 중국은 묵살했다. 오기(誤記)도 기록이니 고칠 수 없다는 것이다. 더구나 명 태조 주원장의 유훈이니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이에 조선은 사신을 보내 정정을 요구했다. 뿐만 아니라 명나라에서 칙사가 오면 융숭하게 대접하며 바로 잡아줄 것을 부탁했다. 외교 수사로 정정이지 애걸하며 간청했고 엎드려 빌었다. 이른바 종계변무(宗系辨誣)다.

그러나 명나라는 '틀린' 기록도 기록이라는 입장을 견지했다. 더구나 틀린 역사적 기록을 가지고 이성계를 멸시하고 조선 왕실을 무시했다. 태조 이성계가 승하하고 정종, 태종, 세종, 문종으로 왕통이 이어져 오는 동안 중국은 오기(誤記)를 무기로 조선을 굴복시키려는 시도를 서슴지 않았다. 굴종을 강요한 것이다. 

수양은 중국이 명명백백한 오류마저도 정정하지 않고 그 '틀림'으로 조선을 압박하는 무서운 나라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관계를 확인하지 않고 자신들이 잘못 기록한 오기(誤記)를 바로잡고 사과하기는커녕 그것을 무기로 사용하는 크지만 작은 나라. 그 작은 나라의 소중화(小中華)됨을 기꺼워하는 조선. 뭔가 뒤틀려도 한참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폐부를 파고들었다.

"중국은 가까이 하기엔 먼 나라군."

수양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가까이 하면서 실(實)을 취하고 멀리 있으면서 의(義)를 행하면 여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근실원의(近實遠義)라?"
"국경을 맞대고 있는데 그렇다고 강토를 싸가지고 옮겨 갈수야 없잖습니까?"
"어려운 숙제군."

수양이 고개를 들어 하늘을 쳐다보았다. 조선에서 보던 하늘과 똑같은 하늘이었지만 더 커보였다.

'우리 임금이 우리 힘으로 용상에 올랐는데도 등극을 승인해달라는 고명(誥命)을 받기위해 국경을 넘어가는 나?'

수양은 자신이 한없이 초라해 보였다.


태그:#수양대군, #신숙주, #압록강, #종계변무, #신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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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事實)과 사실(史實)의 행간에서 진실(眞實)을 캐는 광원. 그동안 <이방원전> <수양대군>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소현세자> <조선 건국지> <뜻밖의 조선역사> <간신의 민낯> <진령군> <하루> 대하역사소설<압록강>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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