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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전의 일입니다. 몸과 마음이 지쳤던 S씨는 휴가차 1주일간 필리핀을 방문하였습니다. 고등학교 친구 K씨가 필리핀으로 초대한 덕분입니다. 낯선 필리핀에 도착한 S씨는 공항에서 운전기사가 운전하는 고급 자동차를 타고 마중 나온 K씨를 만났습니다. 수도 마닐라 시내 한가운데 있는 고층빌딩에 위치한 사무실과 "Sir, Sir." 하며 복종하는 직원들의 모습에서 타국에서 성공한 근사한 회장님, K씨의 모습이 보였습니다.

사무실에는 K씨가 당시 필리핀 대통령인 아로요와 함께 찍은 사진이 걸려 있고, 경찰 간부도 잘 알고 있고 이민국 사람들도 꿰고 있으며, 변호사, 고위 공무원 등 K씨를 통하면 뭐든 가능하다고 합니다. 밤에는 럭셔리 자동차를 타고 나이트에 갔습니다. 젊고 예쁜 필리핀 아가씨들은 홀의 양쪽으로 늘어서 있고 지폐를 뿌리는 회장님 앞에서 쓰러집니다. 기껏해야 가족모임으로 노래방에서 노래 부르던 S씨는 상상도 못할 일이었습니다.

필리핀 대통령까지 끌어들인 사기극

K의 사기행각에 이용되었던 아로요 대통령. (왼쪽에 치마입은 여자) 필리핀 200페소 지폐 뒷면에는 비리혐의로 전직 에스트라다대통령을 몰아내자는 People Power 2 당시 길거리에서 신부 앞에서 당시 부통령인 아로요가 대통령직을 대행한다는 선서를 하는 그림이 있습니다.
 K의 사기행각에 이용되었던 아로요 대통령. (왼쪽에 치마입은 여자) 필리핀 200페소 지폐 뒷면에는 비리혐의로 전직 에스트라다대통령을 몰아내자는 People Power 2 당시 길거리에서 신부 앞에서 당시 부통령인 아로요가 대통령직을 대행한다는 선서를 하는 그림이 있습니다.
ⓒ 조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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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씨는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습니다. 하지만 필리핀에서 떼돈을 긁어모으고 있을 K씨를 생각하니 부러움에 잠을 이룰 수 없습니다. 그러고 보니 K는 부잣집 아들로 명문대 법학과를 졸업하고 광산 사업을 하는 등 꽤 잘나가던 친구였습니다.

그 무렵 K는 다시 국제전화를 걸어왔습니다. '필리핀 일로일로에 국제공항이 생기는데 그 공사를 맡게 되었다'는 엄청난 프로젝트를 이야기 합니다. S씨와 주변 친구들은 '현장답사'를 명목으로 한 번 더 필리핀으로 갔습니다.

"나도 지금까지 30억이 넘는 돈을 넣었다. 그런데 마지막 자금이 좀 필요하다. 투자하면 수익금을 주겠다. 원금은 1년 이내에 상환하고… 수익금은… "

엄청난 조건에 S씨와 친구들은 이것이 인생의 터닝 포인트라고 생각했습니다. K씨의 안내에 따라 일로일로 공항예정지도 보았습니다. 망원경으로 보아도 끝이 보이지 않는 공항부지를 보고 그들은 투자를 결심하였습니다.

S씨와 친구들은 마누라와 자식들에게 외국에서 성공한 아버지의 든든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주변의 우려는 나의 성공을 부러워하는 사람들의 시기심으로 들렸습니다. 사기란 '마음 속에 사는 마귀가 눈을 가리는데서 출발한다'는 말처럼 필리핀에서 노다지를 캔다는 생각 이외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았습니다. 무엇보다 30년 지기 친구 K씨가 권한 투자이기 때문입니다.

사기였습니다. 일로일로 공항 공사는 필리핀 정부와 일본 다이세이 회사 간에 체결된 사업이었고, K씨가 투자자들을 홀리는데 보여준 공사계약서는 필리핀에 살고 있는 수많은 사기꾼들과 만든 가짜 서류였습니다. S씨 일행 이외에도 K의 사기에 속은 피해자가 더 있었습니다. 대박의 꿈을 꾸고 필리핀에 온 S씨와 친구들은 죽기 살기로 몇 십 년 모은 피 같은 돈을 파라다이스라고 생각하던 필리핀에서 한방에 날렸습니다.

지금은 완공된 일로일로 국제공항
 지금은 완공된 일로일로 국제공항
ⓒ 조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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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로일로 공항은 필리핀 정부와 한국인 K씨가 아닌 일본 정부의 합작 프로젝트였습니다.
 일로일로 공항은 필리핀 정부와 한국인 K씨가 아닌 일본 정부의 합작 프로젝트였습니다.
ⓒ 조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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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씨 운명을 바꾸다

다행히 S씨는 K씨의 사기행각에 끌려 다니는 사이 한 가지 아이템을 생각했습니다. 공사가 많고, 인건비가 싼 필리핀에서 굴착기 같은 중장비를 사서 모래나 흙을 싣는 일을 해보자는 생각이었습니다. K씨의 공항공사처럼 떼돈을 벌지는 못하겠지만 나름 수익성이 있었습니다. 비싼 수업료를 냈다는 후회와 자책감에 악으로 깡으로 살았습니다. 기름값과 직원들 월급 주고나면 500페소만 남을 때도 있었습니다.

10년이 지나 S씨는 몇 대의 중장비를 가지고 나름 일로일로에서 수입이 좀 되는 사업가가 되었습니다. 가끔씩 수금이 되지 않을 때는 '나 못해'하고 밀어붙이는 한국식 방법이 필리핀에도 통했습니다. 땅주인들과 징그럽게 싸우고, 또 돌아서면 잊어버리고, 장비 부속을 구하기 위해 이 섬, 저 섬 찾아다니면서 살아온 것이 벌써 10년입니다.

지금껏 소개한 S씨는 바로 제 아버지입니다.우리 가족의 필리핀 생활은 이렇게 시작되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선 거들떠보지도 않을 만큼 노후 되었지만 이곳에선 꽤 쓸 만합니다. 비록 사기에 걸려 필리핀으로 오게 되었지만, 10년이 지난 지금 S씨는 몇 대의 중장비를 가지고 나름 일로일로에서 수입이 좀 되는 사업가가 되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선 거들떠보지도 않을 만큼 노후 되었지만 이곳에선 꽤 쓸 만합니다. 비록 사기에 걸려 필리핀으로 오게 되었지만, 10년이 지난 지금 S씨는 몇 대의 중장비를 가지고 나름 일로일로에서 수입이 좀 되는 사업가가 되었습니다.
ⓒ 조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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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박이’가 아닙니다. 필리핀 사람들은 흙을 파낼 때 높은 곳부터 골고루 파지 않고 가장자리 쉬운 곳부터 파서 항상 이렇게 흙기둥을 남깁니다. 욕심 부리다간 흙이 무너져 장비를 덮칠 수도 있습니다. 어릴 때 하던 모래로 빼앗기 놀이의 이치와 같습니다.
 ‘알박이’가 아닙니다. 필리핀 사람들은 흙을 파낼 때 높은 곳부터 골고루 파지 않고 가장자리 쉬운 곳부터 파서 항상 이렇게 흙기둥을 남깁니다. 욕심 부리다간 흙이 무너져 장비를 덮칠 수도 있습니다. 어릴 때 하던 모래로 빼앗기 놀이의 이치와 같습니다.
ⓒ 조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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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열심히 일한 굴착기의 바가지를 용접하였습니다. 우리나라에선 거들떠보지도 않을 만큼 노후 되었지만 이곳에선 꽤 쓸 만합니다. S씨도 사기의 악몽에서 벗어나 즐겁게 일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열심히 일한 굴착기의 바가지를 용접하였습니다. 우리나라에선 거들떠보지도 않을 만큼 노후 되었지만 이곳에선 꽤 쓸 만합니다. S씨도 사기의 악몽에서 벗어나 즐겁게 일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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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 사기꾼들 정말 많습니다

필리핀에 살다 보면 한국인 사기꾼들을 정말 많이 봅니다. IMF 때 부도 내고 도망 온 사람, 카지노에서 탕진하고 오갈 곳 없는 사람, 한국서 사기치고 도망 온 기소중지자, 필리핀에 살러 와서 가지고 온 돈 다 쓰고 돌아가도 살 길이 막막한 사람들까지….

취직하기도 어렵고, 할 수 있는 일도 없는 필리핀 현실에서 일확천금을 바라는 초보 이주자나 이곳이 낯선 관광객은 이들에겐 아주 좋은 돈벌이 수단입니다. 요즘은 아이들 어학연수 차 온 아주머니들이 최고의 먹잇감입니다. '집을 구해주네, 애들 학교를 소개시켜주네' 하며 접근해서 사기를 칩니다. 한탕 잘하면 몇 개월 의식주를 해결할 수도 있고, 운 좋으면 몇 년 생활비도 벌 수 있습니다.

7천 개의 섬이 있는 필리핀에서 이 섬에서 사기치고 다른 섬으로, 한 달에 한 개 섬만 찍어도 600년을 넘게 도망 다닐 수 있습니다. 마닐라에서 사기치고 비행기로 한 시간 거리에 있는 일로일로로 도망 오는 사람들을 종종 봅니다. 한두 달 지내다가 피해자가 한국으로 돌아갔다는 소식을 들으면 백의종군하듯 다시 마닐라로 돌아가는 것을 볼 때면 우리 가족의 지난 일이 생각나 울컥합니다.

물론 한국인 중엔 어려울 때 의지가 되어 줄 수 있고, 외로울 때 친구가 되어줄 좋은 사람이 더 많이 있다는 것을 압니다. 필리핀에서 일어나는 사기가 한국에서도 일어날 수 있다는 것도 압니다.

하지만 여전히 필리핀에서 새로운 삶을 꿈꾸는 한국인을 대상으로 한 사기 피해가 너무나 많고, 또한 사기 유형이 정해져 있어 조금만 조심하면 걸려들지 않을 수 있기에 더욱 안타깝습니다. 그렇다고 모든 한국인을 사기꾼으로 보시면 곤란합니다. 사기꾼이 아닌 진심으로 도와주는 분들도 있습니다. 다만 도움을 주는 척하면서 사기를 치려고 할 때는 도움까지만 받고 그 외의 사기 유형에 해당하는 과정이 올 때 과감하게 거절해서 사기꾼들이 사기를 칠 기회를 주지 않아야 합니다.

외국에서 만나는 한국 자동차는 정말 자랑스럽습니다.
 외국에서 만나는 한국 자동차는 정말 자랑스럽습니다.
ⓒ 조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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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왜 다시 필리핀으로 돌아왔을까?

일로일로는 5개의 종합대학과 2곳의 의학전문학교와 30개의 대학들이 몰려있는 교육 도시입니다. 대학들이 많아 무료 청강 기회 및 대학생 친구들을 사귈 기회가 많아서 필리핀으로 어학연수 오는 한국 학생들에게 인기가 많습니다. 한 때 일로일로가 한국인 어학원으로 넘쳐날 때 주말에 SM시티 같은 대형 쇼핑몰에 가면 이곳이 한국인지 착각할 정도였습니다.

W씨는 9년째 어학원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한 때 연간 만 명 이상의 학생들이 일로일로에 들어오는 호황을 누렸지만 누가 장사 잘되면 바로 옆에 같은 메뉴의 음식점이 생기듯 엄청난 숫자의 어학원이 생겼습니다. 그러다보니 절반에 가까운 덤핑 가격을 내세우는 곳이 있는가 하면, 실제와 다른 허위 광고로 학생을 모집하는 비도덕적인 곳도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이런 사건들로 인해 일로일로 어학원 전체에 신뢰가 허물어졌고, 학생수가 줄어 W씨의 어학원도 이로 인해 큰 타격을 입었습니다.

한국으로 돌아갈까도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W씨는 다시 필리핀으로 돌아왔습니다. 마음의 여유가 있는 이곳의 생활이 좋고, 더운 날씨에도 웃음을 잃지 않는 필리핀 사람들이 좋았습니다. 한동안 공백기를 가진 W씨는 초심을 버리지 않고 원래의 방식대로 운영을 하였고 덕분에 그동안 공부하고 떠난 학생들의 입소문만으로도 탄탄한 운영을 하고 있습니다.

S씨나 W씨처럼 필리핀에 살고 있는 대부분의 교민들은 별 탈 없이, 그리고 열심히 살아가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필리핀을 제2의 조국으로 생각하면서 말입니다.

긍정적이고 유머가 있는 필리핀 사람들이 좋습니다.
 긍정적이고 유머가 있는 필리핀 사람들이 좋습니다.
ⓒ 조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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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에서 조심해야 할 사기꾼 유형
1. 오랫동안 한국에 안 가는 사람  (한 번씩 알리바이를 위해 필리핀 내 다른 지역에 다녀오기도 한다)
2. 자주 작은 돈을 꾸거나, 가끔씩 큰돈을 빌려 달라는 사람  (이런 사람 백이면 백, 한국에 많은 땅이 있고 가족 중에 엄청난 부자가 있다고 한다.)
3. 아는 게 많고 자기과시가 심한 사람  (그렇게 잘난 사람이 일정한 수입이 없다.)
4. 투자를 권하는 사람   (지분의 몇 퍼센트를 준다고 하지만, 유령회사에 웬 지분)
5. 카지노 중독자 (주로 카지노에 투자하라고 유혹하는데 국영으로 운영되는 필리핀 카지노에 외국인, 그것도 일반인이 투자라... 불가능한 이야기다.)
6. 이민국의 비자 연장을 하지 않은 사람  (한마디로 불법체류자다. 갑자기 없어졌을 때 연락할 방법이 없다)
7. 이유 없이 친절을 가장하여 접근하는 '모르는' 사람  (자기 할 일도 바쁜데 단지 같은 나라 사람이라고 시간과 노력을 기울이는 자, 뭔가 필요한 게 있어서 접근하는 것이다)
8. 휴대폰이 몇 대가 있거나 번호를 수시로 바꾸는 사람  (우리나라와 달리 전화기로 신분을 확인할 수 없다. 심카드만 사면 그깟 휴대폰 10대도 가질 수 있다. 돈을 건네는 순간 연락이 되지 않을 것이다)

덧붙이는 글 | '필리핀에서 현지인처럼 살기' 에서는 지난 10년 동안 우리 가족의 필리핀 정착이야기를 해보고자 합니다.



태그:#필리핀 , #필리핀 사기, #필리핀 사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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