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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온 이후> 표지
 <그들이 온 이후> 표지
ⓒ 당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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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어머니가 좋아하는 영화 장르는 서부영화다. 특히 존 웨인이나 게리 쿠퍼가 나오는 영화를 좋아하신다. 그런데 서부영화의 공식은 딱 한 가지다. 권선징악. 주인공인 백인은 용감하고 정의롭다. 반면에 주인공을 괴롭히는 인디언은 거의 언제나 잔인하고 야만적이고 호전적이다.

1990년대가 되어서야 비로소 인디언을 바라보는 시각에 조금씩 변화가 생긴다. 대표적인 영화가 케빈 코스트너가 주연한 <늑대와 춤을>이다. 야만적인 악당의 이미지가 아니라 자연과 하나 되어 살아가는 서부 수족의 순수하고 인간적인 모습을 그리고 있다. <늑대와 춤을>에 나온, 시보다도 아름다운 수족의 기도문 일부를 보자.

내 두 눈이 오래도록 석양의 노을을 바라보게 하소서/ 당신이 모든 나뭇잎 모든 돌 틈에 감춰둔 교훈을 내가 깨닫게 하소서/ 다른 형제들보다 내가 더 위대해지기 위해서가 아니라 가장 큰 적인 나 자신과 싸울 수 있도록 내게 힘을 주소서/ 저 노을이 지듯이 내 목숨이 다할 때 내 혼이 부끄럼 없이 당신 품안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나를 이끌어주소서

서부영화에서 보았던 잔인하고 야만적인 모습이 느껴지는가. 지난 300년 동안 백인들은 그들의 신대륙 침략을 합리화하기 위해 미개척지 대륙을 개척하고 야만인을 개화시키는 선한 이미지로 자신들을 포장하고 왜곡해왔다. 우리는 지금껏 강자의 이야기만 들어왔다. 그러나 이제는 조상 대대로 살아온 땅을 내주고 결국 절멸에 이른 토착민들의 가슴 아픈 서러운 이야기를 들어보자.

나치의 '원조'는 콜럼버스

북아메리카 토착민으로 크리크족(부계)과 체로키족(모계) 혈통을 지닌 워드 처칠은 <그들이 온 이후>를 통해 일반적으로 우리가 갖고 있던 콜럼버스와 미국에 대한 통념을 산산이 깨뜨린다. 세상 사람들은 콜럼부스를 신대륙의 발견자라 하여 어린이 위인전기에 나오는 위인으로 부르지만 저자는 콜럼부스를 '원조 나치'라고 부른다. 이유는 뭘까?

1492년 아메리카를 발견하고 스페인으로 돌아간 콜럼버스는 다음해 17척의 군함을 이끌고 다시 에스파뇰라섬(현재의 아이티와 도미니카공화국)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곧바로 토착 타이노족을 노예화하고 멸종시키는 정책에 착수했다. 이 정책으로 1493년에 800만이었던 타이노족은 1496년에는 300만, 1500년경에는 10만으로 인구가 감소했다. 그리고 1542년에는 겨우 200명 남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 후 이들은 콜럼버스가 처음 도착했을 당시 1500만 명에 달했던 카리브해 전역의 다른 인디언들과 함께 멸종되었다(본문 18쪽, 35쪽).

영화 <늑대와 춤을>의 한 장면
 영화 <늑대와 춤을>의 한 장면
ⓒ MG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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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럼버스 친구의 아들로 아메리카 최초의 성직자였던 라스카사스가 쓴 <인디언 파괴에 관한 간결한 보고>에는 이들이 원주민들에 대해 얼마나 잔혹했는지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다. 스페인, 포르투갈, 영국, 프랑스 등에 의해 아메리카 대륙 전역에서 1억 명 이상의 원주민들이 학살되었다. 과연 콜럼버스는 영웅인가?

스페인 사람들은 누가 한칼에 사람을 두 쪽 내거나 머리를 자르거나 내장을 꺼낼 수 있느냐를 두고 내기를 걸었다. 그들은 젖먹이 아기의 발을 잡아 엄마 품에서 떼어내어 머리를 바위에 내동댕이쳤다. (줄임) 그들은 아기와 어머니들을 함께 칼로 찔러 꼬챙이처럼 꿰기도 했다. - 본문 20쪽

아메리칸 드림? 흥!

톰 크루즈와 니콜 키드만이 주연했던 영화 <파 앤드 어웨이(Far and Away)>(1992)는 "그들은 꿈이라 했고, 우리는 그것을 위대한 사랑이라 부른다"라는 포스터의 문구와 함께 낭만적인 사랑의 대서사시로 기억되는 영화이다. 누구라도 말을 타고 먼저 가서 깃발만 꽂으면 내 땅이 된다며 아메리칸 드림을 얘기했던 그 영화.

그런데 그 땅은 원래 누구의 땅이었을까? 비어 있던 땅이었을까? 물론 아니다. 1820~1830년대 미국은 토착민 전체를 미시시피강 서쪽으로 강제소개(强制疏開)함으로써, 미국 동부지방을 '청소'하여 백인 정착민들의 식민지역으로 만드는 정책에 착수했다. 백인 정착민들에게 땅을 빼앗긴 체로키족은 1500마일의 '눈물의 행로'를 따라 강제 이송되면서 인구의 절반 이상이 죽었다(본문 37쪽).

흔히 교회 성가로 알려져 있는 <어메이징 그레이스(Amazing Grace)>는 '눈물의 행로'에서 죽은 자의 명복을 비는 토착민 체로키족의 피맺힌 기도의 노래이다. 영화에서 톰 크루즈가 깃발을 꽂은 그 땅이 바로 이들이 쫓겨난 곳이다. 그러나 영화는 톰 크루즈의 꿈만 보여주고 처절하게 죽어간 토착민들의 삶에 대해서는 아무 말이 없다.

히틀러는 생활권정책이라 하여 유대인들을 게토에 몰아넣고, 나중에는 아우슈비츠, 다하우, 부헨발트, 작센하우젠 등에 세워진 약 150개의 수용소에 강제이주시킨 후 학살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동안 나치는 약 600만 명의 유대인들을 학살하였다.

전쟁 후 미국은 뉘른베르크 재판을 통해 나치독일의 지도층을 '침략전쟁', '반인도주의 범죄' 혐의로 대부분을 처형하거나 투옥시키면서 전 세계에 '백인기사'의 이미지를 강조하였다. 그러나 아이러니한 것은 독일의 이 생활권정책이 아메리카 토착민에 대한 미국의 정책을 따라한 것이라고 아돌프 히틀러가 분명히 밝혔다는 점이다(본문 60~61쪽).

영화 <파 앤드 어웨이>의 한 장면
 영화 <파 앤드 어웨이>의 한 장면
ⓒ 유니버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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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치보다 더한 미국

UN이 채택한 제노사이드 조약 제2조는 국민·인종·민족·종교집단 전체 또는 부분을 파괴할 의도를 가지고 집단 구성원을 살해하는 것, 집단 구성원에 대해 육체적·정신적 위해를 가하는 것, 육체적 파괴를 초래할 목적으로 의도된 생활조건을 집단에게 고의로 부과하는 것, 집단 내에서의 출생을 방지하기 위해 의도된 처치를 부과하는 것, 집단의 아동을 강제적으로 타 집단에 이동시키는 것이 제노사이드에 포함된다고 규정하고 있다.

그런데 백인들은 인디언들의 땅을 뺏기 위해 그들을 학살했다. '운디드니 학살'을 비롯한 수많은 학살을 통해 백인들은 땅을 빼앗고 인디언들을 좁은 '보호구역'으로 몰아넣었다. 그것도 모자라 1970년대에는 인디언 가임여성의 약 40%를 대상으로 강제적 불임 프로그램을 시행하여 토착민을 말살하고자 했다.

또한 토착민의 사회문화적 일체성을 파괴하기 위해 인디언 아기들을 비인디언 가정에 입양시켜 인디언 혈통이 밝혀지지 못하도록 하였고, 어린이들을 자기 집에서 수백 마일 떨어진 기숙학교에 강제로 보내 10년 넘게 기숙사에서 살게 하면서 인디언 말이나 종교의식을 금지시켜 정체성을 찾지 못하도록 하였다(본문 40~41쪽, 299~301쪽).

미 연방정부의 통계에 따르더라도 인디언들은 북아메리카 전체 인구 중에서 가장 가난하고 실업률은 가장 높고 취업을 해도 급여수준이 가장 낮으며 교육수준이 가장 낮다. 그 결과로 인디언들은 영양실조, 당뇨병 및 결핵 발병률, 유아사망률, 전염병 발생률이 가장 높다. 1980년에 보호구역에 사는 토착민 남성의 평균기대수명은 44.6세, 여성은 그보다 3세 많았다.(43 ~ 44쪽, 301쪽)

저자는 수많은 통계와 자료, 그리고 각종 기록을 통한 철저한 고증을 바탕으로 토착민을 절멸시키려는 미국의 오랜 시도를 논리적으로 전개하고 있다. 자신을 '토착민주의자'라 밝힌 저자는 인디언 문제의 해결방법으로 토착민주의를 내세우고 있다. 토착민주의는 자연에 순응하며 타인을 존중하고 평화를 지향하는 세계관이라고 설명한다.

최근 중국을 방문한 바이든 미국 부통령이 쓰촨대 강연에서 중국의 인권문제를 언급했다고 한다. 또한 미국은 그동안 북미 관계를 개선하는 데 가장 중요한 요소로 북한 내 인권문제를 꼽아 왔다. 그런데 과연 미국이 다른 나라의 인권을 말할 자격이 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서의 민간인 학살은 고사하고 자국 내 토착 인디언들에게 행했던 수많은 학살과 탄압에 대해 미국은 어떠한 반성의 기미도 없다. 남에 눈에 있는 티는 보면서 자기 눈의 들보는 보지 못하는 미국. 자기 눈의 들보부터 뽑고 남의 눈의 티를 빼야 하지 않을까.

덧붙이는 글 | <그들이 온 이후>(워드 처칠 씀, 황건 옮김, 당대 펴냄, 2010년, 19000원)



그들이 온 이후 - 토착민이 쓴 인디언 절멸사

워드 처칠 지음, 황건 옮김, 당대(2010)


태그:#인디언, #콜럼부스, #토착민주의, #제노사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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