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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상급식 주민투표 참여를 호소하기 위해 지난 15일 오후 서울 광화문 일대를 돌며 일인시위에 나선 오세훈 서울시장이 거리를 지나던 시민들을 향해 주민투표일을 알리는 피켓을 들어보이고 있다.
 무상급식 주민투표 참여를 호소하기 위해 지난 15일 오후 서울 광화문 일대를 돌며 일인시위에 나선 오세훈 서울시장이 거리를 지나던 시민들을 향해 주민투표일을 알리는 피켓을 들어보이고 있다.
ⓒ 남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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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의원 시절의 오세훈 서울시장을 만난 적이 있다. 당시 나는 종로 담당 사건기자였고, 오 시장은 막 국회의원에 당선된 새내기 정치인이었다. 환경운동연합 사람들을 만나러 갔다가 우연히 그와 합석하게 됐다. 한나라당에 입당하기 전까지 그는 환경운동연합 회원으로서 나름 개혁적인 이미지를 갖고 있었다.

당시만 해도 피 끓는 청년이었던 나는 대놓고 물었다. "왜 하필 한나라당이냐"고. 그리고 내친김에, 김영삼의 신한국당과 전두환의 민정당, 박정희의 공화당, 이승만의 자유당 등 한나라당의 뿌리를 언급했던 것 같다. 친일파와 군사독재의 본산이라는 말까지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뜻은 통했을 것이다.

조용한 카페였고, 환경운동연합 사람들과 함께 간단히 맥주를 마시는 자리였는데, 뜻밖의 질문을 받은 그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하지만 아무런 대꾸를 하지 않았다. 뭐라 반박도 하지 않고, 변명도 하지 않는 그를 보며, 나는 그가 아직 한나라당 입당의 논리적인 근거를 찾지 못했다고 판단했다. 명분이야 애초부터 있을 턱이 없었다. 정치를 하고 싶긴 한데, 어떤 정치를 하고 싶은지에 대해서는 생각해본 적이 없는 사람이라고 나는 생각하게 됐다.

그런 시선을 의식해서였을까, 국회에 들어간 그는 한나라당 소장파 의원들과 보조를 맞춰 당을 개혁하려고 했다. 5·6공 세력 용퇴를 주장하며 17대 국회의원 불출마를 선언했을 때는 약간 멋져 보이기도 했다. 그런 개혁 이미지 덕에 그는 한나라당 서울시장 후보가 됐고, 강금실 민주당 후보를 누르고 시장에 당선됐다.

'다섯살 훈이'는 어떻게 진화했나

2007년 3월 13일 오후 서울시청에서 열린 '현장시정추진단'철회 결의대회.
 2007년 3월 13일 오후 서울시청에서 열린 '현장시정추진단'철회 결의대회.
ⓒ 서울시공무원노동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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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장이 된 그가 처음 언론의 주목을 받은 정책은 '현장시정추진단' 신설이었다(2007년 4월). 서울시 공무원 3%를 일률적으로 솎아내 쓰레기 줍기 등 허드렛일을 시킨 것이다. 자존심에 상처를 줘 스스로 그만두게 하려는 구조조정 방안이었다. 철밥통 공무원에 대한 일반 시민들의 불만을 이용해 대중적 인기를 얻어보려는 책략이었다. 그러나 사상 최악의 신자유주의 구조조정 방식에 공무원들은 경악했고, 여론의 지지도 시원치 않았다. 아마도 우익 인기영합주의자로서 오 시장의 면모가 처음 드러난 시점이었을 것이다. 이때 생긴 오 시장의 별명이 '다섯살훈이'다.

오 시장이 도덕이나 원칙, 역사를 중시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은 이내 드러났다. 이른바 서울시 청사 기습 파괴 사건이었다(2008년 8월). 서울시 청사를 리모델링하려는 서울시와 갈등을 빚던 문화재위원회가 등록문화재인 서울시 청사를 사적으로 격상시키려 하자, 서울시가 건물 일부를 기습적으로 부숴 버린 것이다. 풍납토성 유적 발굴지를 훼손했다고 경찰에 입건됐던 재건축아파트 주민들이 혀를 내두를 일이었다. 나는 이 사건이 오 시장의 사람됨을 판단하는 중대한 시금석이었다고 본다. 자신에게 득이 된다면 문화재든, 그보다 더 소중한 것이든 내팽개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걸 보여줬기 때문이다.   

시장으로서 이렇다 할 치적이 없던 오 시장은 본격적으로 이명박 따라하기를 시작한다. 청계천 복원을 흉내낸 한강르네상스, 서울광장을 흉내 낸 광화문광장(잔디와 콘크리트의 차이?), 대운하 사업을 흉내낸 경인아라뱃길, 노들섬 오페라하우스(이명박 대통령이 구상만 밝히고 임기 내에 실행에 옮기지 못한)를 흉내낸 세빛둥둥섬 등 대규모 예산이 투입되는 토건사업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대선 성공 모델인) 전임자의 길을 좇아 대권을 향한 야심을 본격적으로 드러냈다.

이명박과 오세훈의 차이는 '천운'

그러나 불행히도 오 시장에게는 이명박 같은 천운이 따라주지 않았다. 광화문 광장이 완공되자마자 하늘은 집중호우를 뿌려 광화문 일대를 물바다로 만들었다. 올해는 광화문뿐만 아니라 서울시내 곳곳이 쑥대밭이 됐고, 급기야 우면산마저 무너지는 참사가 일어났다. 시민들은 '오세이돈'이 경인 아라뱃길 사업으로 서울을 베네치아처럼 만든다더니 진짜 물바다로 만들어 버렸다고 비난했다. 오세이돈과 더불어 '오잔디'라는 별명도 얻었다. 서울광장 잔디를 새로 깔자마자 큰비에 둥둥 떠버렸기 때문이다. 세빛둥둥섬은 개장 행사인 모피 패션쇼 뒤 문을 닫았다. 누리꾼들은 '세금둥둥섬'이라고 불렀다.

정확히 말하면, 오세훈의 불운은 단순한 천운이 아니라, 시대정신을 읽지 못한 아둔함에서 기인한다. 이명박의 청계천은 비록 짝퉁이긴 하지만 '복원'이라는 환경 운동적 화두에서 출발한 사업이었다. 서울광장 역시 민주적 도심 공간 마련이라는 관점에서, (잔디 광장이라는 형태로) 왜곡되긴 했지만, 일정 정도 서울시민의 바람을 담아낸 것이었다. 이명박은 자신의 전공을 십 분 살려, 당시 시대적 화두였던 '환경'을 '토건'으로 치환하는 데 성공했다. 반면, 오세훈의 토건사업에는 아무런 논리도 파토스도 없다.

요즘 뜨거운 논란의 대상인 무상급식 반대 주민투표도 마찬가지다. 오 시장은 이번에도 시대정신을 놓치고 있거나, 거꾸로 읽고 있다. 이명박 대통령이 서울시장 후보였던 시절, 환경이 화두였다면 지금은 복지가 화두다.

복지가 화두로 떠오른 것은 지금 세계를 휩쓸고 있는 반(反)신자유주의 물결과 무관하지 않다. 고삐 풀린 시장독재를 어떻게 제어할 것인지가 전 지구적 과제가 된 것이다.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 이전의 복지 확대론은 대한민국의 경제규모에 걸맞는 수준의 복지를 확충해, 경제 재충전의 기회로 삼아야 한다는 수준이었지만, 금융위기 이후 좀 더 근본적인 성격으로 변하고 있는 중이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는 시대적 흐름을 역행했다. 부자감세와 재벌 몰아주기(고환율·법인세 삭감·4대강) 정책으로 재정은 바닥나고 (고환율 정책의 결과) 물가는 치솟고 있다. 700조 원의 가계부채와 폭등하는 전셋값, 악무한적인 사교육비 등등 서민생활은 파탄으로 내몰리고 있다. 복지 관련 예산은 되레 깎았다.

전통적인 가정이 빠르게 붕괴하는 가운데 아이 하나 키우는 일은 전쟁이 된 지 오래다. 저출산은 국가적으로 생산력 저하의 문제겠지만, 가계로서는 가장 직접적이며 비통한 생존의 선택이다. 무상급식을 넘어 무상보육과 반값등록금을 제도화해야 한다는 여론이 비등하고 있는 것은 그 때문이다. 국가가 제도로 책임져 주지 않으면, 그런 국가를 저버릴 수 있을 정도로 분노가 치밀고 있다.

오세훈은 저질 마키아벨리스트

오세훈 서울시장이 지난 4일 오전 서울시청 서소문별관 브리핑룸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서울지역 폭우로 인한 산사태와 수해에 대해 "시민여러분들에게 닥칠 고통과 불편, 불안을 미리 예측하고 대비하지 못한 점, 깊이 사과드린다"며 고개를 숙이고 있다.
 오세훈 서울시장이 지난 4일 오전 서울시청 서소문별관 브리핑룸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서울지역 폭우로 인한 산사태와 수해에 대해 "시민여러분들에게 닥칠 고통과 불편, 불안을 미리 예측하고 대비하지 못한 점, 깊이 사과드린다"며 고개를 숙이고 있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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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세훈의 결정적 패착은 유권자들에게 생존의 문제가 된 복지정책을 대권가도의 재료로 바라본 것이다. 진보 교육감들의 무상급식 공약이 진보진영의 뜨거운 호응을 얻는 걸 보면서, 오 시장은 여기에 각을 세운다면 보수진영의 강력한 지지를 이끌어낼 수 있으리라고 계산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덫에 걸린 것이다. 그가 무상급식 반대 주민투표를 천명하자 한나라당 내부에서조차 바보 같은 짓이라는 지적이 나왔다. 이후 한나라당은 선거에서의 유불리와 이념적 선명성 사이에서 갈팡질팡하고 있다. 황우여 한나라당 원내대표는 이 마당에 무상보육을 실시하겠다는 정책을 들고 나와 국민들을 어리둥절하게 하고 있다. 무상급식은 포퓰리즘이라 안 되지만 무상보육은 필요하다는 황 원내대표의 논리는 전 국민적 비웃음을 사기에 충분했다.

오 시장은 주민투표 안건을 이리저리 바꿨다. 스스로 주민투표의 불필요성을 인정한 꼴이다. 차기 대선 불출마도 선언했다. 시민들은 그가 차차기를 노리고 있다는 걸 뻔히 알고 있는데 말이다. '오꼼수'라는 별명만 하나 더 얻었을 뿐이다. 

오 시장은 이제 대권 욕심에 눈먼 정치인을 넘어, 정치적 무뇌아로 인식되고 있다. 영리하게도 좌파들의 트레이드마크인 복지에 한다리를 걸치며 민심의 눈치를 보는 박근혜와도 얼마나 큰 차이가 있는가. 오 시장은 마키아벨리스트 중에서도 급이 낮은 저질 마키아벨리스트다.

재미있는 건, 그런 오 시장을 이명박 대통령은 어떻게든 도우려 한다는 점이다. 초록은 동색이라고 해야 하나. 오 시장과 이 대통령에게 관중이란 이름으로 더 잘 알려진 중국 춘추시대 철학자 관자의 어록 중 한 구절을 들려주고 싶다. 스스로 물어보라. 이 중 어디에 해당할지.

"왕도의 주군은 백성의 지지에 승부를 걸고, 패도의 주군은 군대의 지지에 승부를 걸며, 쇠퇴하는 주군은 지배계급의 지지에 승부를 걸고, 망하는 나라의 주군은 여자나 보석에 승부를 건다.(王主積于民 覇王積于將士 衰主積于貴人 亡主積于婦女珠玉)" <관자> '추언편'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를 쓴 이재성님은 현재 한겨레신문사에 재직 중입니다. 이 기사는 인권연대 주간 웹진 <사람소리>에도 실렸습니다.



태그:#오세훈 , #무상급식, #주민투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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