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행사장에 마련된 올해의 주제와 로고.
 행사장에 마련된 올해의 주제와 로고.
ⓒ 고은아

관련사진보기

인종 간 입양은 미국에서도 사회적 이슈다. 지난 5월 미국 공영 라디오 방송은 현재 미국에서 이뤄지는 입양의 약 40%가 인종 간 입양이고 그 수치는 더욱 늘어나고 있다고 보도했다.

인종 간 입양의 시작은 한국계 입양아들로부터 비롯되었다. 아직 국제입양에 대한 개념도 생기기 전인 1953년, 전쟁 고아들의 복지를 위한다는 명분으로 수많은 한국 아동들이 백인 가정으로 입양되어 갔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의 '2008년 지표로 본 한국의 보건복지 동향'에 따르면 1953년부터 2007년까지 해외입양을 통해 한국을 떠난 아동들이 약 16만 명에 이른다. 이중 70% 이상이 미국으로 건너왔다.

미국 내에서 인종 간 입양이 본격적으로 조명되기 시작한 때가 1990년대 말. 인종 간 입양은 '다양성'이라는 미국 사회의 중요한 가치를 가정 내에서 구현하는 축복받은 일로 여겨지며 지속적으로 확산되어 갔다.

지금도 세계 각지의 분쟁지역이나 국내입양이 쉽지 않은 곳에서 수많은 아이가 인종의 벽을 넘어 '입양아'라는 이름으로 미국으로 들어와 가족을 얻는다.

피부색이 다른 사람들과 한가족이 된 아이들은 이후 어떻게 자라날까? 이들은 자신을 누구라고 생각하며 어른이 되어갈까? 가정 내에 존재하는 다양성이란 게 정말 축복할 만한 일인가? 자녀를 포기한 생부모의 삶은 어떻게 전개될까?

지난 7월 29일부터 31일까지 쉐라톤애틀랜타호텔에서 열린 칸(KAAN : Korean American Adoptee Adoptive Family Network) 콘퍼런스는 이런 궁금증에 대해 다각도로 생각할 기회를 제공해 주었다. 칸 콘퍼런스는 말하자면, 입양으로 인해 한국과 연결된 사람들이 1년에 한 번 한자리에 모일 기회다.

3~4세 어린아이부터 이제 50대가 된 초창기 입양인들, 주로 백인인 입양 부모∙조부모 및 형제자매들, 입양에 대해 연구하는 학자∙작가∙영화감독들, 자녀와 헤어졌던 생부모들, 입양기관 종사자들, 한국 관련 기관 및 비즈니스 종사자들까지. 스테이시 스크로더 칸 회장에 따르면 올해 등록 인원은 경기 불황의 여파로 예년보다 다소 적은 168명, 발표자와 스태프들까지 200여 명이 참가했다.

개중에는 발표를 위해 한국에서 온 경우도 있었다. 이들이 수십 개의 발표와 토론의 장을 오가며 국제 입양이 던져 놓은 온갖 이슈들에 대해 지식과 경험, 성취와 실패를 나눔으로써 다음 세대들이 좀더 나은 환경에서 자라날 수 있도록 함께 고민했다. 올해가 열세 번째 행사인데, 주제는 '우린 꿈이 있어요(We have a dream…)'였다.

어린이들과 청소년들은 별도의 프로그램을 쫓아 그들끼리의 시간을 즐겼다. 에모리대의 한국계 입양아 지원 동아리 케임(KAME, Korean Adoptee Mentorship Program at Emory)과 한인학생회(KUSA, Korean Undergraduate Student Association) 소속 학생들이 김밥 만들기, 부채 만들기, 케이팝 등의 주제로 유스 그룹과 함께 했고, 애틀랜타 연합장로교회에서 시내 견학 때 차량을 제공하고 보호자로 동행했다.

'나는 누구인가?' 묻는 두 편의 다큐멘터리

미국에 입양된 페로씨의 얘기를 담은 다큐멘터리 <Adopted>의 한 장면. 입양 관련 기관에서 교육용으로 자주 인용하는 필름이다.
 미국에 입양된 페로씨의 얘기를 담은 다큐멘터리 <Adopted>의 한 장면. 입양 관련 기관에서 교육용으로 자주 인용하는 필름이다.
ⓒ Point Made Films

관련사진보기


행사 첫날인 29일 금요일 오후, 서너 시간의 시간 차를 두고 두 편의 다큐멘터리 상영이 있었다. 첫 번째로 상영된 <입양된(Adopted)>은 1970년대 미국 시골의 전형적인 백인 마을에 입양되어 30대가 된 한국계 미국인 제니퍼 페로씨의 가족 이야기와 2000년대 중국에서 여자아이를 입양하는 한 가족의 이야기를 교차시켜 30년 사이에 극명하게 달라진 입양 문화를 생생하게 보여주었다.

한국 땅을 떠나 미국 공항에서 입양 가족들과 첫 만남을 가진 제니퍼 페로씨와 달리 21세기의 국제 입양은 양부모가 해당국을 직접 방문하여 아이를 데리고 와야 한다. 수년간의 불임 시술 실패 끝에 입양을 결정했던 부부는 다인종 가족을 꿈꾸며 중국 입양 수속을 밟았고, 중국에 대해 알기 위해 다양한 정보 수집도 했다.

아이를 데리고 온 후에도 지속적으로 중국이라는 나라와 그 문화에 대해 알려주기 위해 비디오를 틀어주고, 노래를 들려 주고, 또 인종이 다른 친구들과 자주 교류를 가지면서 아이의 정체성의 한 축으로 중국을 심어주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는 모습을 보였다. 중국 당국도 입양 첫 세대를 아무 사후 대책 없이 해외로 보내 갖가지 문제점들을 도출한 한국의 경험을 반면교사 삼아 입양가족과 입양아가 중국과 긴밀한 연계를 갖도록 많은 투자를 하고 있다고 한다.

한편 페로씨에게 정체성의 문제는 가슴속에 묻어둔 한(恨)에 다름 아니었다. 거울을 볼 때마다 파란 눈에 노란 머리의 백인 여자아이가 될 수 있기를, 그게 아니면 엄마가 자기와 같은 동양인이기를 바라던 소녀의 공허한 꿈은 누구와도 나눌 수 없는 것이었기에 서른이 넘을 때까지 가슴속 응어리로 남아 있었다.

다큐멘터리를 찍게 되면서 비로소 꽁꽁 숨겨 둔 '입양과 인종'에 대해 가족들, 특히 엄마와 얘기를 나누게 되었지만, 딸이 온전히 자신에게 속해 주기만을 바랐던 지난 세대의 사고방식과 아무리 백인이 되려고 노력해도 한국인이라는 외형을 바꿀 수는 없는 딸 사이의 대화는 종종 감정 대립으로 귀결됐다.

백인 가정 속의 한국인. 자신이 백인인가 싶다가도 완전히 그 속에 들어갈 수 없고, 한국인인가 싶다가도 그 안에 낄 수 없는 이방인. 그래도 그렇게 터 놓고 이야기하며 감정 폭발을 경험하고 나자 인정할 건 인정하고 포기할 건 포기할 수 있는 여유가 생기기 시작했고, 자신의 복잡한 정체성도 끌어안을 용기가 생겼다.

한국계 미국 입양아 딘 보쉐이 리엄씨의 얘기를 다루고 있는 다큐멘터리 <차정희라는 문제에서(In the matter of Cha Jung Hee)>.
 한국계 미국 입양아 딘 보쉐이 리엄씨의 얘기를 다루고 있는 다큐멘터리 <차정희라는 문제에서(In the matter of Cha Jung Hee)>.
ⓒ Katahdin Productions

관련사진보기


두 번째 필름은 <차정희라는 문제에서(In the matter of Cha Jung Hee)>였다. 필름제작자이자 주인공인 딘 보쉐이 리엄씨는 1957년생으로 일곱 살에 미국으로 입양됐다. 본명은 강옥진. 그런데 차정희라는 이름을 가지고 태평양을 건너야 했다. 왜냐하면 원래 미국 가정과 결연해 도움을 받다가 입양되기로 한 차정희라는 아이가 갑자기 사라져버렸기 때문이다. 친아버지가 데려간 것이었다.

미국으로 갈 때 신을 신발까지 선물로 보낸 미국 가정에 충격을 주지 않기 위해 고아원에서는 서류를 위조했고, 어린 강옥진은 차정희의 신발을 신고 다른 사람 행세를 해야 했다. 필름은 이후 뒤바뀐 운명 때문에 죄책감에 시달렸던 어린 소녀와 그 소녀가 미국으로 떠난 후 고아원으로 딸을 찾으러 갔던 친어머니의 이야기, 친가족과의 재회, 그리고 평생 마음의 빚으로 남았던 진짜 '차정희'를 찾기까지의 지난한 과정을 그렸다.

두 필름의 주인공 사이에는 근 20년 가까운 세대 차가 난다. 그 사이 한국도 많이 변했다. 전쟁 직후의 어수선한 한국 사회를 떠나 미국에서 자란 리엄씨가 자신을 혜택받은 사람으로 여기며 감사한 마음으로 자랐다면, 페로씨에게선 친부모에게서 버림받고 또 태어난 나라에서 버림받은 상처가 더 크게 느껴졌다. 한국이 더 이상 못사는 나라가 아니었던 탓이다.

해외 입양은 서울올림픽이 열리기 직전인 1987년 7949명에 이르렀다가 차차 줄어들고 있는 추세지만, G20 회원국이 된 오늘날에도 한 해 천여 명의 아동들이 해외로 입양되고 있다. 저출산율로 고민하는 나라, 세계 최고 수준의 테크놀로지 문명을 자랑하는 나라에서 태어났으나 그곳에서 자라지 못하고 해외로 보내진 오늘날의 입양아들이 자라면서 입게 될 정신적 혼란에 생각이 미치자 아찔했다.

입양아들의 대부분이 미혼모의 자녀이고, 미혼모들이 자녀를 포기하는 이유는 우리 모두 다 알고 있다. 한국 사회에서 눈총 받으면서 어렵게 자라는 것보다 외국일지라도 여유 있는 곳에서 자라는 게 행복하리라는 생각에서다. 그러나 칸을 통해 알게 된 입양인들의 성장 스토리는 '그건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르는 소리'라고 외치는 듯하다.

입양을 통해 새 가족과 만나면서 나이에 비해 일찍 조숙해진 아이들은 어디에도 속할 수 없는 정체성으로 인해 방황하고 아파하며 상상조차 하기 힘든 성장통을 겪으면서 성숙해 간다. 그 과정에서 소수는 친모 또는 친가족과 상봉하기도 하지만 대다수는 결혼을 앞두고, 자녀를 낳게 되면서 끊임없이 이어지는 질문들에 상처 받으며 일생을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사람은 빵으로만 사는 존재가 아니기에.

김밥 만들기 행사에 앞서 에모리대 학생들과 함께 한 스테이시 스크로더 '칸' 회장.
 김밥 만들기 행사에 앞서 에모리대 학생들과 함께 한 스테이시 스크로더 '칸' 회장.
ⓒ 김승규

관련사진보기


마음속에 숨겨둔 말 터뜨리기

행사 둘째 날에는 아침부터 각종 발표와 토론이 이어졌는데, 75분씩 진행되는 세션들이 같은 시간대에 네다섯 개씩 배정돼 있었다. 그러니까 주제를 보고 자신이 듣고 싶은 것을 골라서 들어가야 하는 것이다. 관심 가는 주제가 많아도 하나를 골라야 하는 아쉬움이 있었지만, 일단 들어가 앉은 곳에서 얻을 수 있는 정보와 경험에서 위안을 삼았다.

세션 중에는 성인 입양인들로 참가자가 제한된 경우도 종종 있었는데, 이런 세션에서는 정말 다루기 힘든 주제들을 다루고 있었다. 그중 하나는 발표자들의 이름마저 무기명으로 되어 있었는데, 성장기에 입양 가족으로부터 성적 학대를 받았던 경험을 나누는 자리였다.

한국계 미국인 심리학자와 친부모들이 패널로 참가해 진행된 세션도 있었는데, 한 사람은 백인 남자와 혼전 임신을 해서 아이를 입양 보냈던 친모였고, 또 한 사람은 결혼 실패와 생활고로 입양을 택했던 친부였다. 두 사람 모두 미국으로 건너오게 됐고, 친자식을 찾아 헤맨 끝에 재회에 성공했는데, 지난 세월 이야기를 솔직하게 나누고 입양 보낸 자식들에 대해 갖는 꿈을 이야기했다. 친부모에게도 입양은 평생 지워지지 않는 상처를 남긴다.

저녁 만찬 때는 애틀랜타 총영사관과 애틀랜타 한인회 회장단도 자리를 함께했다. 만찬 공연으로는 일인극을 선보였는데, 흑인 혼혈 배우인 리사 마리 롤린즈는 백인 가정에 입양된 흑인 소녀의 자전적 이야기를 카리스마 넘치는 연기로 표현하면서 인종간 입양이 안고 있는 결점들을 적나라하게 파헤쳤다.

이처럼 칸은 열린 소통의 장이었다. 여기서는 무엇이든 나눌 수 있는 것 같았다. 부모는 부모끼리, 자녀들은 자녀들끼리, 누군가 나와 닮고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만나 경험을 공유하는 것만으로도 상당한 치유 효과가 있을 것 같다. 이렇게 평생 동안 이어질 친구가 생기고, 의형제∙의자매가 탄생한다.

입양과 직접 관련이 없는 나에게도 백인과 동양인 패널들이 한 자리에 모여 인종적 편견에 대해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하는 것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이민 생활에서 종종 부딪히는 인종 차별 문제는 심증은 있으나 물증이 없는 범죄처럼 딱히 죄를 물을 수는 없지만 목에 걸린 가시가 되어 시시때때로 신경을 건드리곤 하는데, 백인들 스스로 인종이 다른 자녀를 키우면서 비로소 이 문제를 몸소 겪게 되고 그것을 다 함께 모인 자리에서 발산하고 공감하는 것이다.

부채 만들기에 한창인 참가자들.
 부채 만들기에 한창인 참가자들.
ⓒ 김승규

관련사진보기


경계가 사라진 자리에서 피어나는 새로운 희망

이번 칸 콘퍼런스에 발표자 자격으로 참가한 나는 입양인들이 정체성의 문제를 극복하는 한 수단으로 한글 학습을 제안하는 성인 대상 발표와 한글 자모를 이용해 영어 이름을 만들어보고 한국 역사와 이야기를 나누는 유스 프로그램을 진행했는데, 내가 맡은 프로그램 참가자들을 통해서 또 행사기간 내내 칸 콘퍼런스를 체험하면서 평소 궁금하던 점들에 대해서도 좀 더 깊게 생각해볼 수 있었다.

지난해 내가 다니는 한인교회의 한국학교 태권도반에 6살짜리 한국계 입양아가 한 명 등록했었다. 백인 엄마도 한국에 관심이 많은 듯했지만 양부모가 이혼한 상태라 마음이 쓰였는데, 그 다음 학기에 재등록을 하지 않았다. 그 후 이웃 교회의 입양 가족 초청 행사 때 우연히 그 가족을 다시 만나 물어보니, 아이가 원하지 않아서 그만뒀다고 했다.

많은 학술 보고서들이 뒷받침하듯 한국과의 문화적 연대가 입양아의 정체성 확립에 도움이 되리라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었지만, 자신을 버린 출생국에 대한 반감 혹은 다른 이민 2세들과 달리 인종이 다른 부모를 가진 현실을 자라나는 아이들이 어떻게 극복하게 할 것인지 답을 찾기가 쉽지 않았었다.

그런데 행사 마지막 날, 한글 유스 프로그램에 들어온 꼬마 친구들에게서 일말의 희망을 볼 수 있었다. 유치원을 마쳤거나 초등학교 저학년인 입양아들이 신통하게도 한글을 읽을 줄 아는 것이었다. 엄마에게 물으니, 뉴욕에서 온 이 아이들은 입양 부모들이 한인교회의 지원을 받아 세운 주말 한국학교에 다닌다고 했다. 그러고 보니 전날 다른 발표장에서는 캘리포니아 주에서 입양아들을 위한 한국학교를 세운 백인 엄마의 사례 보고도 있었다.

내가 간략한 한국 역사를 이야기로 들려줄 때, 루시라는 7살도 채 안 된 여자아이가 '신라'를 안다고 했다. 경주도 다녀왔고, 거기서 왕릉도 보았다고 했다. 한국 아이 둘을 키우는 루시 엄마에게서 자초지종을 들어 보았다.

"제가 한국 드라마를 자주 보는데, <선덕여왕>을 본 후 영상을 애들 수준에 맞게 편집해서 보여줬었어요. 그러다 얼마 후에 한국을 방문해서 경주에 갔었죠. 아이들이 많이 좋아하더라고요."

아이들은 스폰지다. 어른들이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그들의 인생이 달라질 것이라고 믿는다. 입양 부모뿐만 아니라 바로 우리가, 그리고 한국 사회가.

칸에서 한국계 입양인 고교 동창생 포레스트 윌킨슨씨를 만난 에모리대 '케임' 전 회장 김승규씨(오른쪽).
 칸에서 한국계 입양인 고교 동창생 포레스트 윌킨슨씨를 만난 에모리대 '케임' 전 회장 김승규씨(오른쪽).
ⓒ 고은아

관련사진보기


한편 올해 에모리대를 졸업한 '케임'의 전 회장 김승규씨는 며칠 사이에 입양인 유스 그룹들과 많이 친해졌는데, 칸에서 옛날 고등학교 친구를 만났다며 신기해 했다.

"9학년 때 유학 와서 노스캐롤라이나 주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했는데, 한국계 입양아였던 동창생을 여기서 만났어요. 정말 세상 참 좁죠? 5년 만에 만난 건데, 무척 반갑네요."

행사를 도왔던 에모리대 학생들 중에는 교포 학생들과 유학생들이 뒤섞여 있었다. 수년 전까지만 해도 서로 분리돼서 활동했는데, 요새는 점차 경계가 사라지는 중이라고 했다. 그 이유는 조기유학이나 중도 이민으로 초등학교 때, 혹은 중고등학교 때 미국으로 건너오는 학생들이 늘어 예전에는 확연히 구분되던 차이가 없어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칸에서 내가 본 가능성도 이런 것이다. 경계가 없어지는 것, 나아가 편견이 없어지는 것. 타국에서 자라는 입양아들과 한국인 2세들, 그리고 한국에서 자라는 아이들이 글로벌 시대의 주역으로 함께 성장하는 미래 말이다. 그러려면 우선 입양인 커뮤니티를 한국 사회의 일부분으로 받아들이고 보다 적극적으로 지원하는 일부터 선행돼야 할 것이다.

올 가을 6학년이 되는 내 딸아이는 첫날 행사장에 따라왔다가 마지막 날까지 나와 함께 다녔다. 뉴욕 주의 주도 알바니에서 열리는 내년 행사에도 따라가고 싶다는 딸아이를 보며 다음 세대는 우리 세대보다 좀더 잘해 주기를 기대해 본다.

칸에서 만난 입양인들의 정체성, 그건 한국을 빼고 생각할 수 없는 것이었다. 한국말을 한 마디도 못해도 그들은 한국인이다. 이중국적 문제에 대해 발표한 해외입양인연대(Global Overseas Adoptees' Link)의 김대원 이사가 얘기했듯, 입양인들에게 이 문제는 '국적 취득'이 아니라 '국적 회복'인 까닭이다.


태그:#칸, #입양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