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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윤수 화성외국인노동자센터 대표. "30년 전이나 지금이나 똑같아. 안 도와주면 죽을 것 같은 얼굴인데 안 도와줄 수 없는 거지. 사명감이 아니라"
 한윤수 화성외국인노동자센터 대표. "30년 전이나 지금이나 똑같아. 안 도와주면 죽을 것 같은 얼굴인데 안 도와줄 수 없는 거지. 사명감이 아니라"
ⓒ 노동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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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 전, 그는 10대 노동자들의 삶을 세상에 내보였다. 출판사 '청년사'의 사장으로 <비바람 속에 피어난 꽃>이란 책을 펴냈다. 책 속에서 당시 15살 최순희(가명)양은 "회사에서 20시간씩 일 시키면서 피로제와 타이밍을 마구 먹이는 것이다. 약을 먹는다 해도 고달프기만 한 몸은 곧 쓰러질 것만 같았다. 이런 사람이 있는지조차 모르고 있는 사회가 원망스럽다"라고 일기를 썼지만, 그는 오줌 눈다고 밥 먹을 때 국조차 주지 않던 당시 노동현실과 그 속에서 일하는 어린 노동자들을 결코 세상에서 잊히게 할 수 없었다. 그 덕에 그의 인생은 바뀌었다.

30년 후, 그는 30년 전 노동자들을 다시 만났다. 서른 살 출판사 사장은 환갑의 목사가 됐다. "두드려 맞고 돈 떼이고 성폭행 당하던" 10대 노동자들이 있던 자리엔 '코리안 드림'을 좇아 온 외국인 노동자들로 채워진 채 똑같은 현실은 되풀이됐다. 역시 그는 지나칠 수 없었다. 4년 전, 아무런 연고도 없이 한국에서 외국인 노동자들이 가장 많다는 경기도 화성으로 향했다. 외국인노동자센터를 세우고 무료 상담을 시작했다. '인생은 60부터', 다시 인생이 바뀌었다.

그는 다시 그들의 삶을 세상 밖으로 끄집어냈다. 한 언론에 '오랑캐꽃'이란 칼럼 연재를 시작한 것. 일명 '외국인 노동자 탐구생활' 백서다. 칼럼 첫 회에 그는 "많은 한국 대중에게 영락없이 오랑캐 취급을 당하는 외국인 노동자들. 하지만 삶의 속내를 알고 보면 오랑캐꽃처럼 어여쁘기에"라면서 칼럼 제목을 설명했다.

오랑캐꽃은 제비꽃의 다른 말이다. 땅바닥에 낮게 피는 제비꽃을 보려면 허리를 숙여야 한다고 꽃말은 '겸양'이다. 목사가 되어 허리 굽혀 오랑캐꽃밭으로 향한 그, 한윤수(63) 화성외국인노동자센터 대표다. 남들 쉬는 일요일이 제일 바쁘다는 그를 지난 7월 10일 일요일에 경기도 화성시 향남읍(발안) 시장통에 있는 화성외국인노동자센터에서 만났다. 그가 목사여서 일요일에 바쁜 건 아니었다.

성경 안 보고 학생들 이름 외워... 신학교의 'FBI'

1. 절대로 죽지 않는다.
2. 희망을 가진다.

IMF가 터져 최고로 어려울 때 한 대표가 아내와 합의한 사항이다. 1980년 <비바람 속에 피어난 꽃> 출간 이후 그의 삶은 순탄치 않았다.

"노동야학 하던 대학생들이 100여 군데 야학에서 글을 모아 온 거야. 2년 동안 보충해서 그걸 책으로 내는데 합수부(공안합동수사본부)에서 이미 몇 권을 찍을지까지 다 알고 있는 거여. 제본소에서 그 사실을 알려줘 집 팔아서 찍은 2만부를 그냥 200여 교회에 뿌린 후 도망 다녔지."

1984년 출판사를 후배에게 물려주고, 그는 경기도 고양으로 들어가 농사를 지었다. 가물치 양어장도 하고 다시 출판사를 차리기도 했지만 한 번 무너진 가계는 도무지 회복이 안됐다. IMF는 거기에 쐐기를 박았다. 빚은 엄청나게 불어났다. 한 언론 인터뷰에 줄여서 말한 액수가 40억이다. 사실은 60억이었다고. 저당 잡혔던 친구들 집 12채도 다 넘어갈 뻔했단다(다행히 양어장터가 택지개발지구에 수용돼 원금은 갚았다).

그 인맥이 더 대단해 보인다. 어떻게 하면 친구들이 집도 빌려주는지 궁금했다. 그는 "인덕보다 협박 받고 빌려준 거야. 내가 지 옆에 가 있기만 하면 협박이 된다고 하더라고…"라며 웃었지만 "친척, 친구들한테 몹쓸 짓 많이 했지" 하는 표정에선 시련의 아픔이 전해진다.

그 모진 시간을 어떻게 견뎠을까.

"어떻게 견뎠는지 나도 몰라. 죽지만 않으면 되는 거지. 죽을 필요는 없잖아."

감당할 수 없는 빚더미에 앉아있었지만 그와 아내는 '죽지는 말자'고 약속했다. 하지만 빚쟁이들은 집요했다. 빚쟁이들을 피해 전국에 안 가본 곳이 없었다. 나중엔 우크라이나까지 도망갈 고민도 했단다. 그나마 '안전하겠지' 했던 교회에까지 빚쟁이들이 쳐들어왔다.

"크리스마스날 빚쟁이들이 교회로 왔더라고. 내가 노래를 부르고 있으니까 빚쟁이들이 '넌 빚을 지고선 즐겁게 노래가 나오냐'고 하더라고. 빚쟁이들한테 몰려 마지막으로 간 데가 신학교인 거여. 자기네들도 꺼림칙할 거 아녀. 천당이 없을 것 같지만 만약 있다고 가정을 해보자고. 해코지하다가 나중에 죽어서 어떻게 될지 모르잖아. 확실히 목사가 될 사람한테는 덜 하지. 쪼는 게…."

워낙 오래 전부터 기독교집안이어서 유아세례를 받긴 했지만 기독교와는 담 쌓고 살던 그였다. 그런데 아내는 교회에서 만났다. 고2 때, "자장면을 실컷 먹게 해주겠다"는 선배의 꾐에 빠져 신자인 척 하며 교회 대항 배구대회에 참가했던 그를 아내가 먼저 좋아했다. 중학교 때까지 배구선수였던 그가 멋진 '플레이'로 그 교회를 우승으로 이끌었던 것.

많은 우여곡절을 겪고 6년 후 결혼에까지 골인하지만 독실한 기독교신자인 아내는 차마 그에게 교회에 같이 가자는 말을 못했다. 교회를 싫어하는 남편 대신 남편의 사진을 성경책에 끼워놓고 교회에 다녔다. 무려 25년 동안이나! 그랬던 그가 1998년 2월의 어느 날, 교회에 가겠다고 스스로 나섰다.

"IMF가 닥쳤다. 생활비는커녕 아이들 교통비도 갖다 주지 못했다. 모두가 풀이 죽어 있었다. 아내에게 미안했다. 내가 해줄 수 있는 일이라곤 아무것도 없었다. 교회에 가서 같이 앉아주는 것밖에는."

그는 자신이 쓴 산문집 <이 감자야>에서 당시 심정을 이렇게 전했다. 그렇게 교회에 가고 신학교까지 들어갔지만 그는 남이 하라는 것보단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했다.

"신학교에서도 보라는 성경은 안 보고 이상한 짓 많이 했지. 똑같은 성경을 만날 봐서 뭐하나. 차라리 사람들과 친해져야겠다고 학생들 얼굴과 이름을 외웠어. 거기가 전체 학생이 1700명쯤 됐는데 거의 다 외웠어. 그래서 내 별명이 CIA, FBI, KGB 등이었지."

외국인 노동자 제일 많은 화성, 돕는 사람 하나 없더라

지난해까지 화성외국인노동자센터 옥상에 걸려있던 만국기. 태풍에 깃발이 길가에 떨어진 후엔 철거했단다.
 지난해까지 화성외국인노동자센터 옥상에 걸려있던 만국기. 태풍에 깃발이 길가에 떨어진 후엔 철거했단다.
ⓒ 화성외국인노동자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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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순의 나이에 목사가 됐다. 그는 남들처럼 자기 교회를 세울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게 마음에 들지는 않아. 교회가 자기 것도 아니고…." 그의 눈엔 도시 곳곳에 솟은 교회의 십자가들보다 도시 외곽 '오지'에서 일하는 외국인 노동자들의 부르튼 거친 손이 더 크게 보였다.

"30년 전이나 지금이나 똑같아. 이 사람들이 너무 힘들어서 안 도와주면 죽을 것 같은 얼굴들을 하고 있는데 안 도와줄 수 없는 거지. 사명감? 그런 건 아니고 감정이 끌리는 거야. 이런 일을 해야 마음이 편하고…. 또 돈 버는 재주 없이 쓰는 재주만 있으니까 돈 쓰면서 사는 거지."

그가 2007년 화성에 외국인노동자센터(이하 센터)를 세운 이유? "미인에게 애인이 없는 이치"와 같단다.

"화성이 외국인 노동자들이 제일 많은데 도와주는 데가 한 군데도 없더라고. 당연히 애인이 있을 거란 생각에 미인에게 접근을 안 하는 것과 같은 거지. 오기 전에 시청홈페이지를 보니까 외국인 담당이 여성가족과하고 보건소에 한 명씩 딱 두 명 있어. 와서 그 사람들한테 '도와주는 데가 있습니까?'라고 물으니까 이렇다 할 데가 없대. 한 마디로 없다는 거지. 보건소에 갔더니 간호사가 자기가 사장들한테 전화 걸어서 돈을 받아준다는 거야. 그 말 듣고 '앞으론 내가 환자들을 데려올 테니 그거나 고쳐주고, 돈 받아달라는 사람들은 나에게 보내라'고 했지."

그는 화성에 "뼈 묻을 생각으로 왔다"고 덧붙였다. 처음엔 그는 사무실을 지키고, 그의 아내는 유인물을 돌렸다. 하지만 좀체 사무실로 들어서는 외국인 노동자들을 만나기 힘들었다.

"'센터'라고 하니까 무슨 치안센터 같은 걸로 아는지, 도와주는 사람이 없어서 그런지 무서워서 잘 들어오지 못하더라고. 이제는 쑥쑥 들어오지만…."

기자가 센터를 방문한 날은 한여름 찌는 듯한 무더위가 기승을 부렸다. 하지만 센터는 에어컨 바람이 밖으로 빠지는 걸 감내하면서 사무실 문을 열어놓고 있었다. 상담 대기자가 넘쳐 문밖 층계에까지 내려와 있었기 때문이다.

거의 주6일 일하는 외국인 노동자들이 쉬는 일요일엔 센터가 붐빈다. 보통 40~60건의 상담을 하는데 상담 오는 외국인 노동자들은 혼자 오지 않고 꼭 친구들을 대동하기 때문에 일요일이면 100명이 넘는 외국인 노동자들이 센터를 찾는다. 시간대를 달리 한다고 해도 19평 작은 사무실이 수용하기엔 벅차다.

지난 4년간 노력의 결과다. 사람들로 붐비는 식당엔 나름 대표 메뉴가 있듯 화성 외국인노동자센터가 전국에서 찾아오는 센터가 된 데도 대표 이유가 있다. 간단하다. '같이 있어준다는 것'. 뭐, 다른 센터는 외국인 노동자와 함께 안 하냐고? 그의 설명을 듣자.

"많은 센터가 노동부 같은 데 갈 때 그냥 이 사람들만 보낸다는 게 문제야. 그러면 돈 못 받아. 우리가 미국 가서 영어도 못하는데 미국 노동부 가서 따질 수 있겠냐고, 못 따지지. 미국 사람이 같이 가줘야 하잖아. 우리도 똑같아. 한국 사장들은 별별 해결사니, 법무사나 노무사 등까지 데려오는데 게임이 되겠냐고. 말도 잘 안 통하니까 한국 사장'님' 말은 다 옳고, 감독관도 한국 사람이니까 그쪽으로 기울게 되고…. 싸움이 안 되지. 아무런 지식이 없어도 노동부든 법원이든 출입국사무소든 이 사람들이 갈 때 한국인이 같이 가서 옆에만 앉아 있어줘도 이 사람들은 엄청난 힘이 되거든. 그런데 센터들이 그걸 안 하려고 해. 맨~ 문화행사나 해서 사진이나 찍으려고 하지. 외국인 입장에서 외국인 장기자랑해서 상품 주는 게 좋겠어, 못 받은 돈 받아주는 데가 좋겠어? 나는 좋은 센터인지 아닌지는 외국인 노동자들과 동행을 하느냐 안 하느냐에 달려있다고 봐."

업무 시작 전 달랑 15분... 이게 주일 예배 

목사는 일요일엔 예배도 보고, 전도도 해야 되는 거 아닌가, 물으니 그가 "우리도 예배 봐요"라고 답했다. 5명의 직원들과 일요일 업무 시작 전 15분 동안 예배를 본다고. 예배가 그렇게 짧을 수도 있구나, 또 다른 깨달음이 스쳐 지나간다.

"일요일날 꼭 예배보고 전도해야 하나. 누가 꼭 그래야 한다고 그랬나. 외국인들 도와주는 게 진짜 전도지. 예수님이 살아있었으면 전도하고 다녔겠어. 당장 두드려 맞고 돈 떼인 사람들, 아픈 사람들이 오는데 그들을 도와주고 있었겠지. 예수님도 나환자 등 아픈 사람을 고쳐줬지. '같이 예배보자~' 이랬겠냐고."

그는 '기브 앤 테이크'가 되는 것 같아서 상담만 하지, 전도는 안 한단다. 센터 소식지인 <손들> 회보엔 '외국인 노동자를 위한 기도'가 실린다. 그의 아내가 직접 썼다는 이 기도문엔 '이방인을 특별히 사랑하시는 주님'이란 표현이 나온다. 진짜 그런가.

"어떤 훌륭한 구약학자가 '구약이 원래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옹호'라고 말했어. 가난한 사람들 중 특히 고아, 과부, 나그네는 특별히 대접해야 한다고 성경 여기저기에 나와 있지. 나그네엔 타민족까지 포함되고. 우리나라도 나그네한테 대접 잘했잖아. 사랑방에 재우고, 밥 한 끼 먹여서 보내고, 말만 잘하면 노잣돈도 챙겨주고…. 이 사람들은 나그네라기보다는 중요한 생산 일꾼들인 거지. 주로 이들이 일하는 공장은 먼지가 많거나 시끄럽거나 냄새가 심하게 나는 곳들이야. 냄새가 너무 고약해 5분도 코를 못 들고 있는 공장들도 많고. 그런 일, 한국 사람들은 안 하려고 하잖아. 이들이 만든 부품들이 각종 전자제품에 들어가서 이들 나라로 수출되는 건데 중요한 사람들인 거지."

그의 이런 진심은 주변사람들을 전염시켰다. 건물 앞에서 조기를 파는 아줌마는 그가 노동부 등에 가느라 사무실을 비우면 센터의 파수꾼이 됐다. 오는 외국인 노동자들에겐 그가 어디 갔는지 알렸고, 그가 돌아오면 "베트남 다섯 다녀갔어" 식으로 보고했다. 이야기 도중 그가 막 생각났다는 듯 "오늘은 조기 아줌마가 안 나왔네. 어디 아픈가?" 걱정을 한다. FBI 등 각국 정보기관 이름이 별명인 이 사람, 오지랖이 넓긴 한가보다.

자원봉사자들도 늘어났다. 초창기, 그의 부인이 외국인 노동자인듯한 사람들에게 유인물을 나눠주면서 던진 "어느 나라 사람이에요?"라는 질문에 "방글라데시"라고 답하면서 센터까지 따라온 사람이 있었다. 그는 방글라데시 노동자가 아니라 지역 해병전우회 회장이었다. 문제 있는 회사에서 깡패 같은 노무담당자가 쳐들어오면 덩치가 좋은 그가 그냥 사무실에 앉아있는 것만으로도 상대를 움찔하게 했다. 지금은 센터의 이사가 됐다.

한 명, 두 명 늘던 후원자들도 지금은 170명에 이르렀다. 그들이 한 달에 1, 2만 원씩 보내는 후원금이 늘어날 때마다 직원을 늘려 지금은 외국인 통역 둘, 한국인 직원 셋이 됐다. 그래도 생활이 넉넉지 못해 한 대표가 센터에서 받는 월급은 없다. 그나마 작년까지는 정부의 지원금이 있었는데 올해는 그마저도 끊겼다.

그가 "우리가 정부 도움을 안 받겠다는 게 아냐. 도움 주면 좋지. 내가 그렇게 정부에 비판적인 사람도 아니고…"라고 말하다가 조금 걸리는 게 있는지 정정한다.

"물론 본의 아니게 칼럼에 쓸 때가 있지. 나로서는 정부를 괴롭히려는 게 아니라 기록은 솔직해야 되니까 솔직하게 기록하는 거지. 내 본의는 아닌데 그것 때문에 기분이 나빴다면 진짜 옹졸한 정부지."

돈 떼먹는 수법 계속 진화... 계속 기록해야지

일요일이면 화성외국인노동자센터엔 100여 명의 외국인노동자들이 다녀간다.
 일요일이면 화성외국인노동자센터엔 100여 명의 외국인노동자들이 다녀간다.
ⓒ 화성외국인노동자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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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 그것만큼은 그가 사명감으로 대하는 듯하다. 처음 일 주일에 두 번씩 쓰겠다고 한 '오랑캐꽃' 칼럼은 주 3회로 늘어나 벌써 400회가 넘었다. 두 번째로 출판사를 했을 땐 문학소녀였던 그의 부인이 쓴 고부일기를 책으로 냈다. "나도 할 말이 없는지 아니?" 한 마디 한 그의 어머니에게도 책을 쓰게 했다. 이 고부일기의 완결판이 바로 그가 쓴 <이 감자야>다. 일상의 기록이 그의 가족을 묶고 남의 가족도 돌아보게 했다. 그가 기록에 주목하게 된 건 대학교 1학년 때다.

"국사를 가르치던 교수가 '머리 나쁜 놈도 역사를 쓸 수 있다'고 하더라고. '기록은 할 수 있지 않느냐, 기록을 해라, 머리 좋은 놈이 나중에 그걸 가지고 역사를 만들거다'라는 얘기를 듣는데, '아, 나도 할 일이 있구나' 싶었지."

출판사 '청년사'를 하면서도 그는 기록을 책으로 냈다. 당시 출판계는 유명한 이들의 전기를 넘어 무명씨들의 전기가 나오기 시작했다. 시대의 흐름을 그는 놓치지 않았다. 처음 낸 책은 <판초 빌라>. 글도 모르는 무지렁이 산적 출신으로 멕시코 혁명을 이끌게 된 판초 빌라의 전기다. 이후에도 멕시코 하층계급 한 가족이 각자 자신의 생활사를 털어놔 묶은 집단 자서전 <산체스의 아이들>처럼 이름 없는 이들의 삶에 천착했다. 그가 10대 노동자들의 삶을 엮어 <비바람 속에 피어난 꽃>을 낸 건 어쩌면 운명이었을지도 모른다. 그에게 그토록 열심히 글을 쓰는 이유를 물었다.

"우리가 1년이면 3000명을 상담하는데 그런 사례들을 기록하는 거지. 시간이 지날수록 사장들도 돈 안주는 수법이 진화해. 우리도 진화해야 떼인 돈을 받을 수 있으니까 새로운 사례들을 계속 기록해 가는 거야."

돈 안 주는 수법의 진화는 이렇다. 그가 4년 전 화성에 왔을 때는 임금도 잘 안 주고 퇴직금은 아예 떼먹는 분위기였단다. 화성 센터가 퇴직금을 받아주니까 이제는 사장이 내야 할 퇴직보험을 노동자들 월급에서 떼는 식이 됐다. 예전엔 안 받던 기숙사비, 식비 명목으로. 그 역시 처리하니 이제는 국민연금을 떼먹더란다. 1년 일한 사람 퇴직금이 100만원이면 국민연금 낸 게 108만 원일 정도로 외국인 노동자들에겐 소중한 돈이다.

"아주 악질로 유명한 회사들이 좀 있거든. 유명한 회사 하나 꺾으면 수백개 회사를 꺾은 것과 같은 효과가 나지. 친목계가 있어서 거기서 말이 쫙 퍼지거든…."

처음엔 노동부를 상대하다가 요즘은 국민연금공단에 연락하는데 그럴 때마다 좋은 공무원들이 많지 않은 게 속상하단다.

"국민연금공단은 연금을 내지 않으면 회사 예금을 압류할 수도 있어요. 그런데 귀찮아서 안 하는 거지. 권한이 없어서 못하는 게 아니라 권한이 있는 데도 안 써. 남한테 싫은 소리 듣기 싫어서…. 차라리 외국인한테 싫은 소리 듣는 게 낫지, 한국 사람한테는 싫은 소리 안 들으려고 하지."

400회가 넘는 칼럼에서 그는 한국의 외국인 노동자 정책의 많은 불합리한 점들을 꼬집었다. 혹시 그 영향으로 바뀐 게 있을까. 그는 "공무원이 누가 대놓고 거기서 봤다고 하겠나. 바꿔도 슬그머니 바꾸겠지"하더니 이유는 얘긴 안하고 정부 부처 공무원이 애로사항이 없냐고 왔던 적은 있단다.

영화 속 제비꼬리 옷이 탐나 외교관이 되고 싶었다

좋은 공무원이 늘 아쉬운 그의 어렸을 적 꿈, 바로 공무원이었다. 고등학교 때 극장 옆에 사는 친구집에 자주 놀러갔다. 영화 끝나기 15분 전 상영관 문을 열어놓으면 친구와 둘이 들어가서 본 '15분 영화'들이 무진장 많단다.

"그때 인상적인 영화 중에 제비꼬리 같은 옷을 입고 춤을 추는 사람들이 나오더라고. 저게 뭐냐? 알고 보니 외교관이더라고. 그래서 외교학과에 갔지."

그가 서울대 외교학과를 다니던 시절은 1960년대였다. 당시 공무원인 외교관 월급은 1만5000원. 석유공사 등이 5만 원 받던 데 비해 턱없이 적은 액수였다. 도시 출신 학생들은 그 걸로는 품위유지가 안 되니 부잣집 딸과 결혼해야 한다는 말을 대놓고 했다. 순진한 '촌놈'이었던 그는 그 분위기에 적응 못하고 강의실보다는 도서관에서 살았다. "철학, 역사 등 남들이 안보는 책들 많이 보다보니 생각이 변환거야. 그러다가 인생이 이렇게 흘러온 것 같아. 하하하." 그의 호탕한 웃음소리가 좁은 센터 안에 울려 퍼진다.

거침없는 모습, 학창시절에 반장 감투 좀 썼을 것 같다. 그가 당연하다는 듯 "반장 많이 했죠" 한다. 인기 있을 때도 있었지만 주로는 너무 질서를 잡으려고 해서 독재자로 불리기도 했다고. 4·19 즈음이던 6학년 때 그가 잠깐 밖에 나갔다 오니 친구들이 막 책상에 올라가서 "히틀러는 물러가라"고 데모를 한 일화도 있다.

고등학교 땐 좀 인기가 있었다. 고3 가을에 학교 응원단장으로 전국체전 응원을 하러 가서 1주일씩 놀다 오기도 했단다. 그렇게 놀고 어떻게 대학에 갔을까. 그의 대답, "공부를 원래 잘했어요"다. 촌에서 대학에 가려니까 공부를 할 수밖에 없었다고. 적당히 놀고, 적당히 운동했다는 그에게서 '자유로운 영혼'이 느껴진다.

인터뷰 중간중간 그가 상담 온 외국인들이 건네는 인사에 살갑게 응대한다. 직원들한테도 항시 잔소리한단다. "타국에서 온, 몸둘 바 모르는 이들이니 인사 제대로 하라"고. 회사측과도 너무 싸우려고만 하지 말라고도 당부한다. 그러면서도 그는 인사보다는 싸움을 더 잘하는 편이란다. "물론 싸움할 때는 사납게 해야지. 싸움 안 하고 자유가 얻어지나요. 싸움을 안 할 수 없어요." 세상과 싸우며 걸어왔던 그의 연륜이 묻어난다.

"외국인 노동자가 해방돼야 나도 해방될 것"

"난 이들(외국인 노동자)이 해방돼야 전 인류가 해방되고 나도 해방된다고 생각해. 해방이 될 떄까지 계속 싸우면서 가는 거야" - 한윤수 화성외국인노동자센터 대표
 "난 이들(외국인 노동자)이 해방돼야 전 인류가 해방되고 나도 해방된다고 생각해. 해방이 될 떄까지 계속 싸우면서 가는 거야" - 한윤수 화성외국인노동자센터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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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그가 가장 싸우려고 하는 건 이명박 정부 들어서 더욱 후퇴된 고용허가제다. 그는 산업연수원제보다 진일보한 고용허가제에 '70점'은 줬었다. 1년 동안 직장이동이 불가능한 것 빼고는 예전보다 많이 나아졌다고. 그런데 이명박 정부 들어서 3년 동안 직장이동을 못할수도 있도록 수칙이 바뀌었다. 그걸 믿고 사장들이 별별 횡포를 다 저지르고 있어서 그 문제를 계속 거론하고 있다.

외국인 노동자들이 송출업자에게 1000만 원씩 알선비를 주고 한국으로 오는 근본적인 문제의 해결도 간절하다. 처삼촌의 돈까지 끌어 모아서 겨우 한국에 오는 외국인 노동자 한 명의 손에 20여 가족의 생계가 달려있는 셈이다. 1년 동안 일한 건 그 빚을 갚는데 쓰기 때문에 혹시라도 일이 잘못돼 1년이 못 돼 고국으로 돌아가게 되면 20여 가족 모두가 빚더미에 앉게 되는 악순환이 계속 된다.

그러하기에 그 악순환에 빠지지 않도록 돕는 한윤수 대표는 이들 외국인 노동자들에겐 '아버지' 같은 존재인 셈이다. 그가 베트남에 간 적이 있다. 한국에서 만났던 노동자가 그를 자기 집으로 모시기 위해 오토바이를 타고 공항까지 왔단다. 물론 그가 외국인 노동자들에게 마냥 편한 사람만은 아니다. 제 권리를 찾아먹지 못하는 모습을 보면 불같이 화를 내기 때문이다.

"근로감독관을 만나러 가야 하는데 이 친구가 자기 일 빠진다고 사장한테 전화를 해달라는 거야. 그러면 '넌 입이 없냐. 내 돈 받으러 가는 거냐. 네 돈 받으러 가는 거지'라고 막 야단을 친 적도 있지."

외국인 노동자들이 사장을 너무 믿는 것도 경계한다. 이런 경우다. 체류연장 신청기한을 1달 넘긴 채 일하고 있던 외국인이 있었다. 불법체류였는데 그는 단속반이 왔는데도 '사장님'이 보호해줄 거라 믿고 도망가지 않았다가 붙잡혔다.

"그런 날 술 한 잔 해야지. 애인이 와서 '한 달 월급 다 토해낼 테니까 옛날로 돌아가게 해 달라'고 하면서 막 우는데 어떻게 방법이 없는 거지. 그렇게 보낼 때는 짠해."

금욕을 중시하는 청교도식 기독교를 거부하며 그가 아직도 술과 담배를 끊지 못하는 이유가 곳곳에 널려 있다.

"난 이들이 해방돼야 전 인류가 해방된다고 생각해. 이들이 해방 안 되면 나는 절대로 해방이 안 될거야. 모든 인류가 해방돼야 자기도 해방되잖아. 해방이 될 때까지 계속 싸우면서 가는 거야."

인터뷰를 하면서도 센터로 들어서는 노동자들을 계속 살피던 그가 설파하는 '해방론'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인터뷰를 정리하면서 그가 출판사 사장으로 처음 냈다는 <판초 빌라>를 들췄다. 머리말을 보는데 '판초 빌라'가 '한윤수'처럼 보였다.

"판초 빌라는 일생을 청년같이 산 사람이다. 그는 아스펙과 마야의 빛나는 영광을 되찾은 현재의 멕시코를 만드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이다. 그는 생각하는 사람이기 보다는 행동한 사람이며, 행동한 사람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싸운 사람이다. 그는 뚜렷한 사상 같은 것은 갖고 있지 않았으나 옳다고 느끼는 바, 직관에 따라 목숨을 내걸고 무모할 정도로 용감하게 싸운 사람이다. 그러나 만일 그의 직관이 올바르지 못했거나 그의 속 마음에 꿍수가 있었다거나, 그의 행동이 한결같지 않았다면, 이렇게까지 사람들의 가슴 속에 선명히 남아 있질 않았을 것이다.

그는 의로웠고, 흙에 파묻혀 사는 억눌리고 말 못하고 가난한 멕시코 사람들을 위해 싸우고, 핏대를 올리고, 눈물을 흘리고,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산으로 들판으로 말을 치달렸다. 따라서 그의 행동은 극적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월간 <노동세상> 8월호에도 실렸습니다.



태그:#한윤수, #화성외국인노동자센터, #고용허가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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