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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군단 입단 전 교육을 마친 후 후보생 입단 선서를 하고 있는 모습
▲ 학군사관후보생 입단식 장면 학군단 입단 전 교육을 마친 후 후보생 입단 선서를 하고 있는 모습
ⓒ 심재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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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뿐인 아들이 지난 6월 입대했다. 그 녀석이 작년에 대학에 들어간 후 한 학기를 마칠 즈음, 학군사관(ROTC) 출신인 내가 ROTC 지원을 권유했다. 

"어차피 군에 갈 것인데 장교로 복무하면 사회 생활에 좋은 경험이 될 것이다"라는 나의 제안에 그 녀석의 대답은 분명했다.

"학교에서 '무대뽀' 큰 소리로 경례하는 걸 봤는데 정말 쪽팔려서 못하겠습니다."

내가 학군단에 지원한 것이 1982년이니깐 그로부터 거의 30년이 지났다. 그렇지만 강산이 세 번이나 변한다는 그 기간 동안에도 대학 내 학군단 문화는 변하지 않고 그대로였단 말인가 하는 자괴감이 드는 순간이었다.

구타로 얼룩진 30년 전 나의 ROTC 시절

ROTC 1년차라고 하는 대학 3학년, 그 1년 동안은 군에서의 일·이등병과 흡사한 과정을 거친다. 지금도 그런지는 잘 모르겠지만 모든 장교단의 그것처럼 학군단 역시 입단 전 교육이라는 기간을 거치는데 그때부터 구타는 학군사관후보생(이하 후보생)들에게 일상화되어 버린다. 학군단이 설치된 학교마다 약간의 분위기 차이는 있지만 서울보다 지방대에서 그런 구타 문화가 더 심했다는 것을 그 이후 다른 학군단 동료들을 만나면서 알게 되었다.

ROTC 지원자 중에 예능계는 좀 귀하다. 과 분위기가 그래서인지 여학생이 상대적으로 많은 것 때문인지 확실치는 않지만 전국적으로 예능계 출신 ROTC 지원자는 드문 편이다. 내가 지원할 당시에도 체육대를 제외한 예능대학에서는 나 혼자뿐이었으니깐. 예능계 출신이라서 그런지 원래 내 성격이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2년차(4학년)가 되면서부터는 내가 1년차들을 괴롭힐(?) 수 있게 되었는데도 결코 후배들에게 어떠한 폭력도 행사하지 않았다.

학군단 후보생으로 있을 때부터 나의 기본적인 생각은, 후보생은 주어진 군사학 시간에만 반 군인신분이지 그외 시간에는 대학생이다라는 신념이 있었기 때문에 폭력은 고사하고 2년차 때는 군사학 교육이 있는 날 외에는 정복조차도 잘 입지 않았다. 나같은 생각을 가진 후보생들이 더러 있었지만 아무도 그런 내색을 하지는 않았다. 아니 그런 분위기가 되지 못했다고 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사랑해서' 때리는 거라 굳게 믿었건만 

상무대(전남 장성에 있는 군사교육 시설·기관의 총칭)에서 초급장교 교육을 받을 때까지도 구타는 여전했다. 물론 후보생 시절보다는 덜했다. 각 교육중대의 구대장은 대부분 ROTC 선배들이 하고 있었는데 타 출신 장교들보다 더 편한(?) 마음으로 구타를 할 수 있었던 것 같았다. 물론 때리는 선배나 맞는 후배나 모두 후배를 사랑하는 마음에서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그러나 군홧발로 가슴을 차이는 폭력(?)을 당해 본 나는 결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다른 동료가 맞을 때는 별 신경없이 지나갔지만 막상 내가 당했을 때의 모욕감은 30년이 지난 지금도 결코 잊을 수 없다. 상무대에서 교육을 마치고 수료식을 하는 날이었다. 연병장에 빨리 집합시키지 않는다고 소령 한 명이 와서는 구대장 중의 한 명을 후배 장교 모두가 보는 앞에서 세차게 뺨을 갈겼다.

가을이 되면 대부분의 군에서는 벼 베기 대민지원을 나간다. 우리도 예외는 아니어서 사단 수송대에서 차량 지원을 받아서 나간 적이 있다. 차량과 함께 지원나온 운전병 중 한 명이 병장이었는데 우리 중대와 함께 지원나가게 되었다. 병장인데다 우리 부대 소속이 아니어서 벼 베기 하는 동안 알아서 대기하라고만 하고 우리 중대만 벼 베기 지원에 나섰다.

하루 일과가 끝나고 부대로 복귀하려고 차량을 부르는데 우리 차량이 그만 논두렁에 빠지고 말았다. 다가가서 살펴보니 운전병 입에서 술 냄새가 나는 게 아닌가? 벼 베기에 동원도 안 시켰는데 자기들끼리 따로 가서 술을 먹고 온 것이다. 순간 나도 모르게 열이 확 받아서 군홧발로 그 녀석 가슴을 차고 말았다. 주위에 민간인들이 있는 것도 깜박한 채 말이다. 귀싸대기도 몇 번….

"아유, 저런! 어쩌나, 불쌍해서…."

동네 할머니 한 분이 하는 소리가 귓가에 들리는 순간 멈칫해졌다.

강화도 해병대 해안소초에서 발생한 총기사고로 희생된 고 이승훈 중사, 고 이승렬 병장, 고 박치현 병장, 고 권승혁 상병의 합동영결식이 6일 오전 경기도 분당 국군수도병원 연병장에서 해병대사령부 주관으로 열리는 가운데, 고인들과 생활을 함께 한 동료가 추도사를 마친 뒤 유가족들을 향해 경례를 하고 있다.
 강화도 해병대 해안소초에서 발생한 총기사고로 희생된 고 이승훈 중사, 고 이승렬 병장, 고 박치현 병장, 고 권승혁 상병의 합동영결식이 6일 오전 경기도 분당 국군수도병원 연병장에서 해병대사령부 주관으로 열리는 가운데, 고인들과 생활을 함께 한 동료가 추도사를 마친 뒤 유가족들을 향해 경례를 하고 있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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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위에게 뺨 맞고 소대원들에게 '화풀이'

내가 근무하는 대대는 사단장 공관을 지키는 임무도 맡고 있었다. 내가 신참 소위 때의 일이다. 당시 사단장 부관이 육사 출신 중위였는데 밤에 사단장 공관에 오면서 공관 주위에 있는 우리 내무반에 들렀다. 그는 술에 약간 취해 있었는데 당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정확하게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뭔가 잘못이 있었는지 그가 내 뺨을 때렸다.

알다시피 경계 근무 중인, 그것도 장교를 같은 위관급이 뺨을 때린다는 것은 무척 드문 일이다. 신참 소위 때이고 사단장 부관이라는 것 때문에 그 당시 나는 찍소리도 못하고 뺨을 맞았다. 물론 기억 상으로는 딱 한 대 맞은 걸로 기억난다. 어찌되었든 "쌘삐" 소위라면 대대장도 은근히 즐긴다는 부대 내 군기반장 아닌가? 여하튼 그날 밤 우리 소대원들은 전부 연병장에 엎드려 뻗쳐 하고는 M16 개머리판으로 엉덩이를 제법 많이 맞았다.

당시 내가 근무할 때만 해도 구타금지 명령이 전 군에 확산되고 있을 때였고 간부라고 하더라도 극히 민감할 때였다. 이 일이 대대장 귀에까지 들어가 난 문책을 받아야 할 지경에 이르렀다. 당시 대대장은 육사 출신이었다. 불행 중 다행일까? 당시 대대 작전과장이었던 소령 한 분이 나와 같은 학군 출신이었다. 그분이 나에게 이런 조언을 하였다.

"부관에게 맞은 이야기를 공식적으로 이야기해라!"

그 말이 효과가 있었는지 쌘삐 소위라서 봐준 건지 정확하게는 모르겠지만, 그 사건은 유야무야 지나가고 말았다.

소대장이 병장에게 멱살 잡히는 '개망신'까지

역시 내가 소위 때 겪은 이야기다. 군 구타 관행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 바로 나의 이런 경험과 많은 연관성이 있다고 믿는다.

대대훈련 중이었는데, 소대장 중 유일하게 본부중대 소대장이었던 나만 부대에 남아서 전역 대상자들만 모아 부대를 지키고 있었다. 알다시피 쌘삐 소위 눈에는 말년 병장이든 뭐든 잘 안 보인다. 그저 원칙에만 충실할 뿐. 그리고 일과시간 중에는 내무반 침상에 드러누워서는 안 되며 더군다나 내무반에 간부가 들어오면 어떤 사병이라도 벌떡 일어나야만 하는 것이 원칙이다.

사건의 발단은 바로 그것 때문이었다. 전역 1주일을 남긴 병장 중 한 명이 일과시간 중, 그것도 내가 내무반에 들어갔는데도 침상에 드러누워 있는 것 아닌가? 처음엔 일어나라고 말로 지시를 했지만 대장 위에 병장인지 내일 모레 예비군 마크를 달 생각이어서인지 꾸물꾸물 어기적거린다. 확 열이 나서 들고 있던 전투모로 머리를 한 대 때리며 빨리 일어나라고 했다.

그 순간 이 녀석이 갑자기 내 멱살을 쥐고 덤볐다. 순간적으로 당한 일이라 피할 틈도 없이 반대편 침상 쪽으로 넘어졌다. 완전한 하극상이 벌어지는 순간이었다. 옆에 있던 다른 병장들이 깜짝 놀라 그 녀석을 제지했지만 난 완전 쇼크 상태였다. 말로만 듣던 하극상이 나한테 일어나다니….

그 순간 계급장이고 뭐고 한 판 붙고 싶었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이겨도 개망신이고 져도 개망신. 그 녀석의 나이는 나하고 거의 비슷했다. 이건 도저히 조용히 넘길 일이 아니라고 판단한 나는 당시 야외 훈련 중이던 중대장에게 긴급 보고를 했다. 중대장의 말은 간단했다. 그 녀석을 훈련장으로 보내라는 지시였다. 그리고는 훈련 마지막 날 하는 100km 행군을 받게 하는 걸로 모든 일은 마무리되었다.

개구리 올챙이 적 모르는 건 사병이나 장교나

같은 수색대대에 발령이 난 동기생들은 모두 소대장으로 있었지만 나는 중위 중반쯤 본부중대장이 되었다. 이미 시간이 많이 흐른 탓에 나와 같은 시기 입대한 병사들은 물론이고 나보다 일찍 입대했던 고참 병사들과, 간부와 사병의 관계를 떠나 인간적으로도 아주 친하게 되었다. 중위이고 본부중대장이었던 나는, 다른 고참 장교들과 마찬가지로 사병들에게는 물론 대대 최고참 부사관들에게 있어서도 이미 다른 차원(?)의 위치에 있었다.

어느 날 본부중대 소대장으로 3사관학교 출신의 신임 소대장(물론 쌘삐 소위)이 전입하였다. 그는 수색대대에 어울리지 않게(?) 키도 작고 얼굴도 아주 예쁘장하게 생겼었다. 게다가 나이도 고참들 중 대학 2년 이상 마치고 온 녀석들보다 어리기까지 하였다. 이미 친할 대로 친해진 고참 병장들 중 몇 명이 나에게 대놓고 이야길 한다.

"중대장님! 신임 소대장 진짜 뭘 너무 모릅니다. 아~참." 

내가 지금까지 후회하는 게 있다면 바로 그때 그 녀석들을 엄청 심하게 돌리지 못했다는 것이다. 겨우 한다는 소리가, "야 임마들아! 군대는 계급이야. 그 따위 소리들 하지 마라! 하극상 같은 짓거리 하면 절대 그냥 안 둔다. 소대장 보좌들 잘해라. 특히 하사들도 온 지 얼마 안 되니깐 너희들이 특히 더 잘해야 한다" 정도였다.

아마 내가 정말 군인정신이 투철한 간부로 근무를 했고 그런 모습을 사병들이 지켜보았다면 결코 내 면전에서 그런 소리를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다른 이야기지만, 지금 스스로 나에게 반문해 본다. 만약 그 신임 소대장이 학군 출신 후배였다면 어떻게 했을까?

고참 말년 병장이 자신의 이등병 시절을 쉽게 잊어먹듯이 장교들 역시 자신들의 소위 시절을 쉽게 잊어버린다. 그리고 전역 후에는 마치 군 생활에 병장 시절만 있었다는 듯이 각종 무용담을 장황하게 늘어놓는다. 장교들 역시 그렇다. 하지만 사병들의 망각보다 장교들의 망각은 더 심각한 문제를 일으킨다.

사병들이 일으키는 문제보다 장교들이 일으키는 문제는 훨씬 더 심각하다는 것이다. 게다가 어떤 경우에서든지 장기복무 간부들에게 있어서 자기 지휘권 내에서의 사건 사고는 피하고 싶은 일이다. 진급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군인권센터와 인권연대는 14일 오후 서울 영등포구 미래여성센터에서 '해병대 사태 관련 긴급 기자회견'을 열어 해병대 가혹행위 등 인권침해 사례를 공개하며 김관진 국방부장관과 유낙준 해병대사령관 사퇴를 촉구했다. 이날 기자회견에는 강화도 해병대 총기사건 주범인 김아무개 상병과 공모했다고 국방부가 발표한 정아무개 이병의 부모가 참석해서 아들이 공모하지 않았다며 국방부의 발표를 반박했다.
 군인권센터와 인권연대는 14일 오후 서울 영등포구 미래여성센터에서 '해병대 사태 관련 긴급 기자회견'을 열어 해병대 가혹행위 등 인권침해 사례를 공개하며 김관진 국방부장관과 유낙준 해병대사령관 사퇴를 촉구했다. 이날 기자회견에는 강화도 해병대 총기사건 주범인 김아무개 상병과 공모했다고 국방부가 발표한 정아무개 이병의 부모가 참석해서 아들이 공모하지 않았다며 국방부의 발표를 반박했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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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대가 사회 민주화에 기여하는 '선순환'은 정녕 꿈인가

에둘러 이야기했지만 이 글에서 나는 크게 두 가지를 말하고 싶다.

첫째, 원칙에 따른 군인복무규율까지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하극상을 막는 것에 군은 최선을 다해야 한다. 사병이든 부사관이든, 특히 장교에게(대부분 신임 소위) 있어 하극상은 군 생활에 있어 치명적인 모욕이다. 이유불문하고 그런 일을 당하면 주위 동료들에게 도대체 "쪽팔려서" 얼굴을 들 수가 없다. 심각한 사고 발생의 원인이 됨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둘째, 출신 성분에 따른 장교 차별을 근본적으로 없애지 못하면 병영 내 구타 관행보다 더 심각한 우리 군의 아킬레스건이 되고 말 것이다. 아니 이미 그건 되어버렸다.

우리 군의 많은 문제는 고급 간부들에 의해서 발생하는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결코 사병들의 문제가 아니다. 수많은 사병, 부사관들이 존재하는 군대에는, 그들이 사병이라서가 아니라 사람 많은 곳에 문제도 많은 것과 같은 이유로 '당연한' 문제들이 일어난다. 하지만 작금에, 아니 몇 십 년 전부터 일어나고 있는 군의 고질적인 문제는 바로 비정상적인 군 장교시스템에서부터 비롯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장교 교육과정에서부터 원칙에 따라 교육한다면, "군 간부들의 민주 및 인권에 대한 의식전환 → 군대 민주화 → 강한 군대 달성 → 진정한 인권, 민주 의식을 지닌 시민 배출 → 사회 민주화 달성"이라는 선순환의 결과를 만들 것이라고 믿는다. 실제로 우리 사회의 많은 모순과 부조리는 아이러니컬하게도 군에서 많이 배우고 있다.

한글도 모르고 입대해서 행정시스템에 대한 교육까지도 군에서 배우고 나오던 시절이 있었다. 그런 군이, 60년이 지난 지금까지 잘못된 관행을 모르쇠하고 엉뚱한 곁가지에만 신경쓴다면 지금과 같은 사건 사고는 결코 끊이지 않을 것이다.

자랑스런 장교 출신 아빠가 되기엔 너무 늦었나

초등학교 2학년 때 담임에게 뺨 한 대 심하게 맞고 집에 온 아들 녀석이 며칠 간 우울해했던 적이 있다. 나는 물론이고 아내도 그런 사실을 모르고 있다가 며칠이 지난 후에 뭔가 이상해서 아내가 물어보자 맞은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도대체 초등학교 2학년이 얼마나 큰 잘못을 했기에 애가 넘어질 정도로 뺨을 때렸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알고 보니 50대 초반의 담임은 다른 학생들 부모들에게도 이미 소문이 난 교사였었다. 그 이야기를 들은 바로 다음 날 출근길에 학교에 가서 담임에게 체벌문제에 관해 상담 좀 하자고 했다. 비겁하게 횡설수설하던 그 교사를 지금도 잊을 수 없다.

학교에서, 심지어 사회에서조차 선배랍시고 후배에게 구타를 하곤 한다. 학교가, 회사가 그리고 군이라고 하더라도 가해자들에 대한 처벌과 조치가 원칙에 맞게 뒤따른다면 장담컨대 1년 안에 구타 문제만이라도 획기적으로 바뀔 수 있다고 믿는다. 같은 출신, 같은 동료, 잘 아는 사이, 좋은 "빽" 등이 통하지 않는 원칙대로 한다면 말이다.

구타 관행은 우리 군의 고질적인 문제들에 대한 결과물 중의 하나라는 것을 군은 확실하게 인식하여야 할 것이다.

학문의 전당이라는 대학에서의 지나친 경례 소리가 쪽팔린다며 학군단 지원을 포기하고 사병으로 복무 중인 아들 녀석에게, 자랑스런 장교 출신 아빠가 되기에는 이미 너무 늦어 버린 것인가.

덧붙이는 글 | 이 글이 또 어느 집단이나 군에 대한 모독이라는 이상한 방향으로 흐르지 않기 바란다. 나의 부끄러운 과거를 고백하는 것은 진정으로 우리 군이 바뀌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다. 지금 이등병으로 군 생활 하고 있는 내 아들을 위해서라도 말이다. '병영 구타의 추억' 응모 기사입니다.



태그:#구타, #장교, #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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