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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산임수의 문전옥답을 가진 비옥한 땅을 소유한 양반집성촌으로 손씨와 이씨 가문이 경쟁하면서 조선조에 참판급 이상 7명, 과거 합격자 116명(사마시 포함) 그리고 이보다 많은 진사를 배출하였다.
▲ 경주 양동마을 - 배산임수의 문전옥답을 가진 비옥한 땅을 소유한 양반집성촌으로 손씨와 이씨 가문이 경쟁하면서 조선조에 참판급 이상 7명, 과거 합격자 116명(사마시 포함) 그리고 이보다 많은 진사를 배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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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요한 행사날을 잡으면, 반드시 날씨가 궂다. 이 말은 행사를 기획하는 한국 사람들의 중론이다. 일종의 징크스인 것이다. 대표적인 어록이 수능시험에서 나온다. 수능시험 날만 잡으면 반드시 기온이 뚝 떨어지고 강추위에 시험 보는 수험생뿐만이 아니라 응원 나온 학모님들을 몸서리치게 만든다. 

전국에서 500여 명의 문학도 대학생들이 운집하는 행사가 경주 교육문화회관에서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행사 며칠 전부터 주말 경남북지방에 200~300mm의 폭우가 쏟아진다는 뉴스가 계속 나오고 있었다. 교수들의 집결지인 서울역 주변에도 새벽부터 여름 장마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아침뉴스를 보니, 비구름대가 중부에서 오후부터 밤사이에 남하할 예정이라는 예보가 나왔다.

행사 뒷정리를 담당하는 준비요원 학생들과 아침식사를 마치고 대구 경북지역 진행책임자의 인사를 받으면서 준비된 자가용에 몸을 실었다. 먹구름이 잔뜩 끼고 비는 조금씩 뿌리고 있었지만, 비구름대가 중부지역으로 북상했는지, 폭우가 쏟아질 분위기는 아니었다. 정말로 다행이었다. 하루 종일 강행군을 해야 할 처지인데 폭우까지 온다면, 목표한 문화유적지를 모두 둘러보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최근의 나가수 음악이 밤새 일행들과 과음한 탓으로 나른한 몸을 가볍게 전환시키는 가운데 자가용은 어느덧 경주 시내에 있는 한 왕릉에 도착했다. 우산을 받쳐 쓰고 무덤 쪽으로 나아갔다. 신기한 것은 왕릉의 좌우 쪽에 사당 비슷한 기와건물이 위치하고 있는 점이었다. 그 왕릉은 바로 신라의 제 4대왕이었던 석탈해왕의 능이었다. 탈해왕릉의 오른쪽 건물은 '숭신전'이라는 탈해왕의 사당이었다.

- 고향에서 알로 태어나 축출되었으나 석씨인데도 신라 제4대왕으로 등극한 석탈해는 역사 속에서 신화로 남아 있는 인물이다.
▲ 탈해왕릉 - 고향에서 알로 태어나 축출되었으나 석씨인데도 신라 제4대왕으로 등극한 석탈해는 역사 속에서 신화로 남아 있는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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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해왕의 등극과정은 매우 험난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 이유는 아무래도 초대왕이었던 박혁거세의 박씨 혈족에서 석씨로 넘어가는 것이 쉽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탈해왕은 출생과정부터 신비롭다. 그것은 석탈해를 영웅으로 신격화하기 위한 목적 때문이다. 삼국유사를 보면, 왜국으로부터 동북쪽으로 1천리 떨어져 있는 다파나국(多婆那國) 또는 용성국의 왕비가 잉태한 지 7년 만에 큰 알을 낳았다. 이는 상서롭지 못한 일로 간주되어 그 알을 궤에 넣어 바다에 버렸다. 그런데 그 알은 파도를 타고 동해 아진포구에 닿았다. 그 때 한 할머니가 이것을 열어보고 어린아이가 있어 데려가서 길렀다. 그런데 신기롭게도 배에 까치들이 울며 따라왔으므로 '까치작(鵲)'자에서 새조(鳥)자를 떼어 '석(昔)'을 성으로 삼았다는 것이다.

또 하나 흥미로운 사실은 탈해가 호공의 집터를 강탈했다는 기록이다. 역사학계에서는 2대 남해왕 때에 비약적인 성장의 기틀을 마련하고, 탈해의 석씨 가문과 결합을 하였다. 이 탈해의 석씨 가문을 울산 방면의 철산지를 장악하고 있던 세력으로 본다. 탈해가 지팡이를 잡고 노비 둘을 이끌고서, 토함산 위로 올라가 돌무덤을 쌓고 7일 동안 머물렀다. 성안에서 있을 만한 곳을 찾기 위해서였다. 한 봉우리를 보니 마치 초승달과 같아 오래 머물만한 형세였는데, 내려가 살펴보니 호공(瓠公)의 집이었다. 잔꾀를 내어 미리 집 곁에다 숫돌과 숯을 몰래 묻었다. 다음 날 아침 호공을 찾아가서 선조 때부터 자신의 집이라고 우겼으나 호공은 아니라고 주장했다.

- 탈해왕릉 바로 오른 쪽에 위치한 사당으로 탈해왕의 제사를 모시기 위한 건물로써 1898년 당시 군수였던 권상문의 제안으로 지어졌다.
▲ 숭신전 - 탈해왕릉 바로 오른 쪽에 위치한 사당으로 탈해왕의 제사를 모시기 위한 건물로써 1898년 당시 군수였던 권상문의 제안으로 지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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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관아에게까지 집 문제가 알려졌다. 관리들이 어떤 연유에서 네 집이라고 주장하느냐고 물었다. 탈해는  땅을 파서 조사해 보라고 답을 하였다. 결국 관리들이 땅을 파보니, 과연 숫돌과 숯이 나왔다. 그래서 탈해는 호공의 집터를 빼앗아 그곳에서 살게 되었다. 이 일로 인해 남해왕은 탈해가 지혜로운 사람임을 알아보고 큰 공주인 아니부인(阿尼夫人)과 짝을 지워준다. 이러한 기록은 석씨 씨족이 박씨 씨족과 집안끼리 결속한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가문끼리의 혼맥으로 인한 결탁은 나중에 정치적인 결속으로 이어지게 된다. 

또 탈해왕이 왕위를 계승한 것도 신비롭기만 하다. 원래 신라의 2대왕인 남해왕은 아들보다 나이도 많고 지혜로운 탈해로 왕위를 이어가려고 했다. 하지만 남해와의 아들인 노례는 탈해와 이빨숫자 내기를 하자고 제안하여 승리함으로써 왕위를 이어 받는다. 이러한 이야기는 박씨에서 석씨로 왕위가 넘어간 것에 대한 후세의 설화가 덧보태진 것으로 판단된다. <삼국유사>를 보면, 노례는 처음에 왕이 되었을 때, 나이도 많고 지혜로운 매부인 탈해왕에게 자리를 양보하려 했다고 한다. 탈해가 무릇 덕 있는 자는 이가 많으니, 이를 가지고 시험해 보자고 제안하여, 떡을 물어 살펴보니 노례왕의 이가 많으므로 먼저 자리에 올랐는데, 이 때문에 닛금이라 이름을 지었다고 전해진다. 닛금이라 부르는 것이 노례왕부터 시작되었다. '닛금'으로부터 '임금'이란 말이 나온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 이언적의 동생 이언괄을 추모하기 위해 지은 집인데, 이언괄은 형 대신에 노모를 모시기 위해 관직에도 나아가지 않았다.
▲ 심수정(心水亭) - 이언적의 동생 이언괄을 추모하기 위해 지은 집인데, 이언괄은 형 대신에 노모를 모시기 위해 관직에도 나아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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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는 여전히 부슬부슬 내렸다. 빗줄기는 가늘었다 굵어졌다를 반복하면서 차창을 때렸다. 그런대로 우수에 젖게 하는 날씨 속에서 양동마을에 도달했다. 주차장에는 우천에도 불구하고 관광버스  5~6대를 비롯하여 수많은 자가용들이 주차해 있었다. 대구은행이 발간한 양동마을 책자를 대충 훑어보고 여섯 코스의 길안내만을 메모한 후에 도보여행을 시작했다. 1코스는 심수정과 강학당 그리고 이향정, 안락정을 둘러보는 하촌코 스였다. 심수정(心水亭)은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 1491~1553)의 동생 이언괄을 추모하기 위해 지은 정자였다. 이언괄은 벼슬을 마다하고 형 대신에 노모를 모셨다. 심수정은 여주 이씨 집안의 종가인 무첨당과 향단을 바라보기 위해 'ㄱ'자로 꺾고 그 자리에 누마루를 두었다.

양동마을에는 월성 손씨와 여강 이씨 두 집안의 집성촌이 중심을 이룬다. 그 중에서도 양동마을이 유명하게 된 것은 숙질사이인 손중돈(1463~1529)과 이언적 때문이다.  경상도 청송에 살던 손소가 1458년 처가가 있는 경주 양동마을에 들어와 살면서 양동마을의 역사가 시작된다. 손소는 세조 때 이시애의 난을 평정하는데 큰 공을 세워 공신의 반열에 오른다. 손소는 5남 1녀를 두었는데, 손중돈은 둘째아들이었다.  우재(愚齋) 손중돈은 김종직 문하에서 배워 26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승승장구하였다. 상주 목사를 하면서 선정을 베푼 후 승지와 참판을 거쳐 전라·충청·경상·함경 4도의 관찰사를 역임한 것으로 봐서 청백리의 상징이었던 선비로 판단된다.

- 지족당 이연상이 조선 고종 때 지은 가옥으로 이씨 문중의 서당으로 손씨 문중의 안락정과 쌍벽을 이룬다.
▲ 강학당 - 지족당 이연상이 조선 고종 때 지은 가옥으로 이씨 문중의 서당으로 손씨 문중의 안락정과 쌍벽을 이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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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중돈의 누이는 여주 이씨인 생원 번과 결혼하여 1491년 첫 아들을 낳았는데, 그가 바로 성리학의 대가가 된 회재 이언적이다. 이언적은 열 살 때 부친을 여의었다. 하지만 똑똑하고 출중했던 이언적을 외숙부인 손중돈은 눈여겨보았으며 스스로 후원자가 되었다. 이언적은 외숙의 기대 속에 24세 때 과거에 급제하여 학문적으로 성숙해갔다. 특히 경주 향교의 교관으로 있을 때, 정통 성리학에 반한 이론을 폈던 조한보와 '태극무극 논변'을 벌여 앞으로 성리학을 이끌 신예로 주목을 받았다. 훗날 이언적은 주희의 주리론(主理論)을 조선조 정통 유학의 흐름으로 정립했으며, 영남 유림의 거두가 된 이황에게 영향을 미쳤다.  회재는 동방오현의 반열에 오른 인물이 되었다. 

이언적의 아들로는 이응인이 있었고, 이응인은 의윤, 의징, 의활, 의잠, 의택의 다섯 아들을 두었다. 그 중에서 무첨당이 큰 아들 이의윤이었고, 설천정이 셋째 아들 의활, 수졸당이 넷째 아들 의잠이었다. 무첨당·설천정·수졸당은 모두 양동마을의 중요한 문화유산으로 남아 있다. 한편 이언적의 동생 언괄에게는 이응기라는 아들이 있었고 그에게는 향단공 의주와 봉사동 의흡 형제가 있었다. 이의주가 지은 향단은 현재도 여강 이씨 집안의 종가로 수많은 관광객들의 발길이 머무는 곳이기도 하다.  

강학당(講學堂)은 이씨 문중의 서당으로 손씨 문중의 서당인 안락정에 대응하는 공간이다. 조선조 고종 때 지은 집으로 울창한 숲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강학당은 지족당 이연상이 고종 7년 1870년경에 지은 서당으로 공부하는 공간이므로 대문과 담장이 없는 것이 특징이다.

- 촉규나 촉규화로도 불리는 꽃으로 약용 아니면 관상용으로 재배한다. 특히 도종환 시인의 <접시꽃 당신>으로 유명해진 꽃이다.
▲ 접시꽃당신 - 촉규나 촉규화로도 불리는 꽃으로 약용 아니면 관상용으로 재배한다. 특히 도종환 시인의 <접시꽃 당신>으로 유명해진 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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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수정과 강학당을 완상하고 큰 길로 내려오니 초가집 담장에 '능소화'가 탐방자를 반긴다. 또 길가에는 도종환 시인의 시 「접시꽃 당신」으로 유명해진 짙은 자줏빛을 띤 '접시꽃'이 미소를 짓고 있었다. 개울 건너편에 위치한 4코스 안골코스로 접어들었다. 안골코스는 볼 곳이 많으므로 모두 관람하는 데는 시간이 많이 걸린다. 4코스는 가장 오래된 서백당을 중심으로 여러 고가들이 일렬로 배치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양동마을의 백미에 해당된다. 근암고택은 안골로 들어가는 입구 오른쪽 산등성이에 자립잡고 있다. 조선 정조 때 태로 이정수가 살던 집으로 당호는 그의 현손으로 홍릉 참봉을 지낸 이희구의 호를 땄다. 상춘헌은 안골 초입의 근암고택 옆에 있다. 조선 영조 때 동고 이덕록이 지었고 그의 증손으로 예조참의와 대사간을 역임한 이정덕이 동편 사당을 증축했다. 후손인 이석찬의 호를 따서 '상춘헌'이라 불렀다.

 - 양동마을에서 가장 고색창연함을 자랑하는 가옥이다. 월성 손씨의 종손인 손성훈씨가 주말에는 흰 모시 한복을 입고 반드시 종가집을 지키면서 관람객들을 맞이한다.
▲ 서백당 - 양동마을에서 가장 고색창연함을 자랑하는 가옥이다. 월성 손씨의 종손인 손성훈씨가 주말에는 흰 모시 한복을 입고 반드시 종가집을 지키면서 관람객들을 맞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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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호당은 진사를 지낸 사호당 이능승이 1840년에 지은 집인데, 안채와 사랑채의 구분이 확실하면서도 문을 통해 바로 연결되는 것이 특징이다. 방문할 때 집이 헐어서 개축을 하고 있었다. 서백당은 참을 인을 백번 쓴다는 뜻이다. 안골 중심의 산중턱에 위치하고 있는데, 양민공 손소가 1454년에 지은 월성 손씨의 종가로 '송첨'이라고도 불린다. ㅁ자 몸채와 ㅡ자형 문간채가 전후로 배치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몸채의 동북쪽에 사당이 위치하고 있으며, 수령 600년 된 향나무가 안뜰에 가지를 뻗어나가고 있어 고색창연함을 상징해주기도 한다.

낙선당은 서백당 북쪽 중턱에 위치하고 있다. 손중돈의 아우인 손숙돈이 분가한 집으로 1540년에 지은 집이다. 병자호란 때 순절한 낙선당 손중로의 호에서 이름을 따왔다.  안채, 아래채, 사랑채, 곳간채, 문간채, 사당, 화장실로 구성되어 있으며, 평면은 ㄷ자형 안채와 ㅡ자향 아래채가 근접하여 튼ㅁ자형 평면을 구성하고 여기에 서쪽으로 ㅡ자형의 사랑채가 돌출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창은정사는 살림집으로 안골 제일 깊숙하고 높은 곳에 자리 잡고 있다. 안채, 사랑채, 문간채의 3동으로 구성되어 있다.   

-여강 이씨의 종가집으로 이언적의 부친 이번공이 거주하던 집이다. 마침 국제교류재단의 초청으로 한국문화를 탐방하려고 온 미국의 사회과목 담당 선생님들이 방문하고 있어 시끌벅적했다.
▲ 무첨당 -여강 이씨의 종가집으로 이언적의 부친 이번공이 거주하던 집이다. 마침 국제교류재단의 초청으로 한국문화를 탐방하려고 온 미국의 사회과목 담당 선생님들이 방문하고 있어 시끌벅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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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골코스를 보고 다시 내려와 무첨당이 있는 물봉골 코스로 접어들었다. 비는 여전히 을씨년스럽게 내렸다. 시원한 느낌을 주어서 태양이 이글거리는 날씨보다는 고개길을 오르는데 훨씬 좋았다.  이씨 종가인 무첨당을 보고 내려오면서 설천정사와 영귀정을 구졍하는 코스이다. 보물 제411호인 무첨당은 여강 이씨 종가의 사랑채로 회재 이언적의 부친인 이번공이 살던 집이다. 무첨당은 이언적의 맏손자인 이의윤의 호에서 이름을 따온 것인데, '조상에게 욕됨이 없게 한다'는 의미이다. 무첨당의 마루에서 우측 벽에는 대원군이 직접 찾아와 썼다는 '좌해금서(左海琴書)'라는 편액이 걸려 있는데, 도연명의 「귀거래사」에서 차용한 말이다.

마침 무첨당을 들어가니, 수많은 외국인들이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또 MBC TV촬영팀이 회재 이언적의 17대 손인 이지락씨와 외국인들의 인솔책임자인 듯한 인물과의 인터뷰를 화면에 담고 있었다. 커플인 것으로보이는 외국인 남녀에게 몇 마디 물어보니 미국의 사회과목 선생님들이라고 소개했다. 국제교류재단 초청으로 외국인에게 방학 중에 진행하는 한국 문화소개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생각되었다. 무첨당의 뜰에는 토종인 흰색의 경주개가 개집에서 손님을 맞고 있었다.

- 국제교류재단은 방학을 활용하여 대중전파성이 강한 교사, 교수, 종교계 인사, 언론인 등을 초청하여 한국문화를 소개한다.
▲ 무첨당에서 만난 미국의 사회과 선생님들과 함께 인증샷 - 국제교류재단은 방학을 활용하여 대중전파성이 강한 교사, 교수, 종교계 인사, 언론인 등을 초청하여 한국문화를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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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천정사는 회재의 셋째 손자로 순천부사를 역임했던 이의활이 살았던 집이고, 그 옆의 영귀정은 회재가 관직생활 중 고향집에 내려와 심신을 가다듬던 공간이다. <논어>에 나오는 스승 공자와 제자 증점의 대화 가운데 기수에서 목욕하고 제단에서 바람을 쐰 다음에 시를 읖조리다 돌아오겠다는 구절에서 따왔다고 한다. 서남쪽으로 안강 평야 일대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것이 특징이다.

- 경주의 토종개로 멸종을 막기 위해 보존사육하고 있는 동물로 ‘동경이’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 경주의 토종개 ‘동경이’ - 경주의 토종개로 멸종을 막기 위해 보존사육하고 있는 동물로 ‘동경이’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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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코스인 물봉골 코스를 구경하고 주차장이 있는 큰길가로 내려오니 땀이 온몸으로 스며들고 있었다. 그동안 바쁘게 고개 길을 오르다보니 느끼지 못했던 시장기도 들었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는 말이 떠올랐다. 급히 자동차에 올라 에어컨을 '강'으로 돌렸다. 한참을 차가 달리니 몸의 땀이 말라서 시원함이 느껴졌다. 근처에 식당을 찾았으나 마침 국수와 보리밥집은 일요일이라 문을 닫았다. 할 수 없이 10여 km나 떨어진 안강읍으로 찾아갔다.  삼겹살과 된장찌개로 간단하게 점심을 때우고 다시 양동마을로 돌아왔다. 벌써 시계는 2시 3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덧붙이는 글 | 2010년 유네스코는 경주의 양동마을과 안동의 하회마을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했다. 이전에 몇 차례 가봤으나 세계문화유산 지정후에 다시 방문하니 감회가 새로웠다. 우리나라의 한옥마을의 하나로서 원형콘텐츠의 측면에서 가장 예술적 가치가 있는 곳으로 생각되었다.



태그:#양동마을문화탐방, #탈해왕릉, #무첨당, #서백당, #접시꽃당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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