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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남아 천혜의 밀림이 잘 보존된 수빅(subic)은 마닐라 북서쪽 88km에 위치하고 있다. 16세기에 스페인군이 점령하면서부터 역사가 시작된 수빅은 19세기에는 미군에게 점령을 당한다. 이후 1991년까지 약 50년 동안 수빅에는 미국의 최대 해외 해군본부가 자리 잡았었다. 미군이 떠난 이후 경제적 침체기를 겪었던 수빅은 다시 활발한 관광지로 자리 잡아가고 있다.

자유무역항 수빅은 세계적인 원시림 보존지역인 필리핀 잠발레스(Zambales) 산맥의 무성한 정글에 위치하고 있다. 우리는 마닐라에서 버스를 타고 수빅만으로 향했다. 버스는 큰 입간판이 들어선 마닐라 외곽에서 고속도로로 접어든 후 끝없이 논이 펼쳐진 고속도로를 달렸다. 날씨는 덥지만 햇살 따가운 농촌의 한적한 풍경이 이어지고 있었다.

고속도로를 벗어난 이후 버스는 천천히 달리기 시작했다. 우리나라와 다르게 버스는 전혀 서두르지 않았다. 수빅까지 거리는 가까웠지만 2시간 30분이 소요되었다. 수빅으로 들어가는 입구 톨게이트는 독특한 모양을 하고 있었다. 미군 철수 이후 개발되는 자치구역이었기에 수빅으로 들어가는 관문에서는 필리핀 현지인의 출입을 통제하고 있었다. 그래서 필리핀 사람들은 수빅이 테러의 위협 속에서도 안전하다고 했다.

마닐라에서 흔해 빠진 지프니와 트라이시클도 통제 때문인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동양의 캘리포니아'라는 별칭답게 수빅은 안락한 여행지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왠지 필리핀 같지 않고 미군 휴양지로 들어서는 느낌이 든다.

미군의 수빅 주둔은 역설적으로 수빅의 자연환경 보존에 아주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수빅의 아름다운 자연경관들이 군사시설 주변에 있어서 자연이 훼손되지 않고 양호하게 보존된 것이다. 그래서 수빅의 밀림은 미국의 디스커버리 채널이 자연 다큐멘터리 채널을 취재할 정도로 유명한 곳이 되었다. 관광자원 개발을 위해 힘쓰고 있는 수빅 시는 이 밀림 속에서 다양한 놀이거리를 만들어 관광객들에게 제공하고 있다. 그래서 내가 지금 향하는 주빅 사파리(Zoobic Safari)도 이러한 배경에서 2004년에 수빅에 만들어졌다.

미군이 주둔했던 곳에 세워진 필리핀 최대의 동물원이다.
▲ 주빅 사파리. 미군이 주둔했던 곳에 세워진 필리핀 최대의 동물원이다.
ⓒ 노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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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빅 사파리(Zoobic Safari)! 참 재미있게 잘 붙인 이름이다. 수빅(Subic)지역 내에 있는 동물원(Zoo)라서 주빅 사파리(Zoobic Safari)인 것이다. 필리핀에서 가장 큰 이 동물원에는 호랑이 사파리, 사바나관, 파충류관, 악어관, 설치류관, 아에타(Aeta) 족 민속춤 공연장이 다양하게 자리 잡고 있다. 필리핀 뿐만 아니라 필리핀 주변 국가의 많은 동물들을 한 눈에 볼 수 있다. 게다가 울창한 숲에는 조화로운 삶을 사는 나무들이 어우러져 있다.

입장료를 내고 사파리 입구를 통과하자 사파리 안내원이 손등에 도장을 찍어준다. 입장료를 냈다는 표시로 작은 호랑이 발자국 모양을 찍어준 것이다. 호랑이 사파리가 이 동물원의 핵심이고 가장 인기가 있는 곳이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진짜 호랑이 발자국이 내 손등에 실제로 새겨졌다면 나는 이미 이 세상 목숨이 아니었을 것이다. 손등에 새겨진 발자국은 문지르면 번져서 불편했다.

사파리 안에서 우리를 안내할 가이드는 젊은 필리핀 아가씨였다. 얼굴이 둥글고 눈과 입이 큰 전형적인 필리핀 아가씨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약간 부자연스러운 필리핀식 영어로 사파리 내의 이동코스를 설명해 주는데 알아듣는데 큰 무리는 없었다. 이 아가씨는 취업이 힘든 필리핀에서 좋은 직장을 가지고 있는 편일 것이다. 무엇보다도 젊은 아가씨가 밝은 웃음으로 손님들에게 친절하게 답변을 해 주니 여행자 입장에서는 대만족이다.

작은 우리에 갇혀 있지만 호랑이의 강렬한 눈빛은 살아있다.
▲ 백호. 작은 우리에 갇혀 있지만 호랑이의 강렬한 눈빛은 살아있다.
ⓒ 노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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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파리 입구에는 이 사파리가 호랑이를 마스코트로 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호랑이 우리가 있다. 이 작은 우리에는 백호들이 갇혀 있고 관람객들은 우리의 쇠창살 너머로 백호들을 구경하고 있었다. 처량하게 힘없어 보이는 백호들이지만 그 눈빛에서는 아직도 살기가 느껴졌다.

130종이 넘는 다양한 동물들이 있는 주빅 사파리. 주빅 사파리의 제1 코스인 파충류 전시관은 밖에서 보니 미군들이 주둔할 때 사용되던 벙커였다. 당시 미 공군이 사용하던 벙커와 참호 등 군 시설들이 그대로 동물원으로 개조된 것이다.

암컷과의 교미에 대비해 배가 오목하다.
▲ 수컷 거북이. 암컷과의 교미에 대비해 배가 오목하다.
ⓒ 노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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벙커 밖으로 나오니 작은 거북이들이 움직이고 있었다. 사파리 안내원이 갑자기 거북이 한 마리를 집어 들더니 거북이의 배를 보여준다. 묘하게도 거북이의 배가 안으로 오목하게 들어가 있었다.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젊은 필리핀 아가씨 안내원이 묘한 웃음을 지으며 설명을 시작했다.

"이 거북이 배가 안으로 오목한 게 보이죠? 애는 수컷이예요. 암컷 거북의 등이 볼록하잖아요? 거북이 수컷도 암컷의 뒤에 올라타서 교미를 하는데 암컷의 등이 너무 높으니까 교미를 잘 하기 위해서 배가 오목한 모양으로 바뀐 거예요."

지구 자연 안에서의 동물의 진화는 경탄을 느끼게 할 때가 한 두 번이 아니다.

우유를 미친 듯이 빨아대는 새끼 염소를 체험할 수 있는 시간이다.
▲ 염소 우유 주기. 우유를 미친 듯이 빨아대는 새끼 염소를 체험할 수 있는 시간이다.
ⓒ 노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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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영이가 신이 난 것은 염소에게 우유를 주는 코너에서였다. 신영이와 친구들이 분유병에 든 우유를 가지고 염소 우리 안으로 들어서자 어디서 나타났는지 모를 어린 염소들이 바로 뛰어와서 분유병을 물었다. 젖꼭지를 빠는 모습이 며칠을 굶어 배가 고픈 어린 염소들 같았다. 아마도 우유를 굶긴 상태에서 관광객들 앞에 등장했을 것이다. 아무튼 분유병을 물고 있는 초식 동물의 새끼들은 눈망울이 선하고 친근감이 느껴진다. 염소 새끼의 적극성에 아이들은 놀라면서도 새로운 경험을 즐거워하고 있었다.

사파리 안의 새들은 사람이 접근해도 도망갈 줄을 모른다.
▲ 열대 새. 사파리 안의 새들은 사람이 접근해도 도망갈 줄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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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대의 화려함은 열대 밀림을 날아다니는 새들에게서 발견된다. 커다란 새장 안에는 노란색, 초록색, 파란색 등 온갖 색상의 화려함을 자랑하는 앵무새들로 가득하다. 그 새장 바로 앞에는 파푸아 뉴기니에서 잡아 온 수백 마리의 뿔닭(guinea fowl)이 닭인지 꿩인지 모를 신기한 외양을 자랑하고 있고 우리 밖에서는 부리가 엄청나게 긴 앵무새 한 마리가 어슬렁거리고 있다. 사람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 이 열대의 새는 사람이 옆에서 사진을 찍어도 도망가지 않고 포즈를 취해준다.

곰 같기도 하고 고양이 같기도 한 베어켓이 재빨리 먹이를 먹는다.
▲ 베어캣 바나나 주기. 곰 같기도 하고 고양이 같기도 한 베어켓이 재빨리 먹이를 먹는다.
ⓒ 노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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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림 속 동물원의 나무 사이 하늘 위에 작은 나무다리가 걸려 있었다. 그 위에는 작은 곰만한 동물이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고양이도 닮고 곰도 닮은 이 귀여운 동물은 베어캣(bearcat)이다. 이름은 베어캣이지만 실제로는 곰도 고양이도 아니다. 필리핀 팔라완의 밀림에서 자라는 이 친구들은 귀여운 외모 때문에 밀림의 사냥꾼들에게 목숨을 빼앗기기도 한다. 신영이가 막대 끝에 바나나를 달아서 베어캣에게 건넸다. 바나나를 잽싸게 빼 먹은 녀석은 밀림 속에서 사람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지프니에 달린 창살이 사람들의 목숨을 지켜준다.
▲ 사파리 지프니. 지프니에 달린 창살이 사람들의 목숨을 지켜준다.
ⓒ 노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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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하이라이트, 호랑이 사파리는 지프사의 사륜 구동차를 개조한 지프니를 타고 이동한다. 호랑이 색상으로 칠해진 지프니는 철창으로 꽁꽁 둘러싸여 있었다. 지프니의 촘촘한 철창은 자유롭게 뛰노는 호랑이들 사이에서 사람들의 목숨을 지켜줄 것이다. 나는 지프니 창문의 철창이 튼튼한지 한 번 흔들어 보았다.

주빅 사파리에서 사람들을 맞는 호랑이들은 벵갈 호랑이들이다. 우리는 천천히 움직이는 지프니를 타고 높은 철책과 거대한 철문을 통과하여 벵갈 호랑이들 사이로 들어갔다. 더위를 피해 나무 그늘 아래에 앉아 있는 호랑이들이 10 마리는 넘어 보인다. 열대지방에서 자라는 호랑이들은 덩치가 크지 않고 몸매가 홀쭉했다. 호랑이들의 배가 축 처진 걸로 봐서는 손님들을 위해 배고픈 호랑이들만 모아 둔 것 같다.

우리가 생닭 한 마리를 사자 호랑이에게 생닭 시식을 시켜 줄 한 안내원 한 사람이 우리 지프니에 올라탔다. 이 안내원이 지프니의 창문 철창 사이로 난 조그마한 구멍으로 닭고기를 걸친 채 호랑이를 약 올리며 유인하기 시작했다. 먹이를 주는 구멍은 사람의 머리가 드나들 수 있을 정도로 컸다.

배고픈 호랑이의 돌진에 간담이 서늘해진다.
▲ 호랑이 사파리. 배고픈 호랑이의 돌진에 간담이 서늘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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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가 고픈 호랑이는 철창을 부셔버릴 듯한 기세로 달려들어 철창 구멍 사이로 입을 집어넣는다. 지프니 안은 호랑이의 습격에 난장판이 되고 여자와 아이들의 비명 소리가 진동을 한다. 호랑이는 아랑곳하지 않고 생닭 뼈의 마디 마디를 씹어 먹는다. 호랑이 이빨이 철창을 울리는 마찰음에 소름이 끼친다. 호랑이의 날카로운 발톱과 누런 이빨에 살기가 가득하다. 호랑이가 눈 앞에서 생생하게 입을 벌리는 모습에 간담이 서늘해진다.

사파리의 가이드는 우리를 호랑이들이 우글거리는 호랑이 우리로 안내했다. 6개의 우리 안에는 각각 2마리씩의 호랑이가 있었다. 이곳은 호랑이 오줌 체험을 하는 곳인지 우리 안에 오줌냄새가 진동했다. 오줌으로 자신이 다니는 길을 표시하는 호랑이는 자신의 냄새가 한동안 사라지지 않을 만큼 강한 오줌 냄새를 가지고 있다.

코를 막고 호랑이를 구경하는데 안내원이 호랑이 오줌을 맞는 사람은 액땜을 하고 재수가 아주 좋을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 같이 간 한 한국 아주머니가 비명을 지르며 뛰어나갔다. 호랑이 한 마리가 우리 옆을 지나는 이 아주머니에게 시원하게 오줌을 쏜 것이다. 우리는 호랑이 오줌을 맞았으니 이 아주머니가 10년 동안 재수가 좋을 것이라며 한참을 웃었다.

주빅 사파리 내의 사바나에서는 방목된 타조가 정신 사나울 정도로 뛰어다니고 있었다. 아프리카와 호주에서 온 이 타조는 질주본능대로 신나게 뛰어다니고 있었다. 사바나에서는 필리핀 멧돼지도 맘껏 뛰어놀고 있었다. 풀어져 다니는 동물들은 사람을 경계하지도 않는다.  우리에 갇힌 돼지만 보다가 자유롭게 뛰노는 돼지를 보는 것도 신기한 경험이다. 동물원 동물들은 우리에 갇혀 있어서 불쌍하다고 하지만 이 사바나의 돼지들은 최상층 생활을 하고 있었다. 이 멧돼지들은 차에 치일 걱정을 안 해도 되고 통바베큐가 될 걱정을 안 해도 될 것이다.

키 작은 원주민의 눈빛이 강렬하다.
▲ 아에타족 키 작은 원주민의 눈빛이 강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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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상적인 만남은 필리핀에서 가장 오래 된 원주민인 아에타(Aeta) 족의 민속춤 공연이다. 루손(Luzon) 섬에서 원시적인 수렵과 채집생활을 하던 아에타족은 반정착을 하는 원시농업을 배웠다가 이제는 사파리에서 민속춤 이벤트를 하는 신세가 되었다. 이들은 키 작고 왜소한 니그리토(Negrito) 흑인종으로 분류되는데 아프리카 흑인과는 혈연계통이 다른 동남아시아의 흑인종이다. 현재 4만 명도 채 남지 않았다는 소수 종족이다.

어깨를 들썩거리며 활쏘기 춤을 추고 있다.
▲ 아에타족 공연. 어깨를 들썩거리며 활쏘기 춤을 추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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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cm 정도의 키에 곱슬머리를 가진 이들은 잘 그을린 검은 피부와 작은 체구를 가지고 있다. 몸에는 기저귀 같이 생긴 천연색의 팬티만 가리고 있어서 춤을 추면서 보이는 뒷모습은 여자들이 쳐다보기에 민망한 수준이다. 우리는 공연장 주변의 의자에 둘러 앉아 이들 아에타 원주민 3명이 추는 춤을 구경했다.

이들은 곱슬머리를 맷돌 돌리듯이 돌리다가 어깨를 들썩거리며 팔로는 물결 타기 춤을 춘다. 어딘가를 응시하는 눈빛이 강렬하다. 숲 속에 사는 원숭이를 흉내 내다가 원숭이처럼 나무를 타고 오른다. 마치 원숭이인양 이들은 반질거리는 작은 나무로 올라갔다가 큰 나무로 올라간다.

그들은 공연 후에 관광객들과 일일이 사진을 찍어주고 있었다. 동물을 구경하는 사파리 안에서 관광객들을 상대로 전통춤을 추는 것이 아에타 족의 실상이었다. 따로 정착지가 없었던 아에타 족의 후예 3명은 이 동물원 안에 자리를 잡은 듯 했다. 선조들에 비해 먹을 걱정은 안 하고 살고 있으니 오히려 잘된 일인 지도 모르겠지만 왠지 씁쓸하다. 나는 많은 종족들이 모여 사는 필리핀에서 아에타족 같은 소수부족들이 사라지지 않고 잘 보존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보았다.

필리핀의 정글 속에서는 이름 모를 새들이 울고 있었다. 나무가 우거진 밀림 속은 덥지 않았다.

덧붙이는 글 | 이 여행기는 2010년 2월의 필리핀 여행 기록입니다. 제 블로그인 http://blog.naver.com/prowriter에 지금까지의 추억이 담긴 세계 여행기 약 270편이 있습니다.



태그:#필리핀, #수빅, #주빅 사파리, #동물원, #호랑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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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와 외국을 여행하면서 생기는 한 지역에 대한 궁금증을 해소하는 지식을 공유하고자 하며, 한 지역에 나타난 사회/문화 현상의 이면을 파헤쳐보고자 기자회원으로 가입합니다. 저는 세계 50개국의 문화유산을 답사하였고, '우리는 지금 베트남/캄보디아/라오스로 간다(민서출판사)'를 출간하였으며, 근무 중인 회사의 사보에 10년 동안 세계기행을 연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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