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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는 6월 25일은 한국전쟁 발발 61주년을 맞는 날이다. 한국전쟁이 발발했을 때 호주는 미국에 이어 두 번째로 한국전쟁에 유엔군의 일원으로 참전할 것을 발표했다. 그 후 호주는 유엔 군 16개국 중 다섯 번째로 많은 병력인 육군 1만657명, 해군 항공모함 1척, 구축함 2척 등 4507명, 공군 1개 전투기 대대 2000명 등 연인원 1만7164명을 한국에 파병했다.

참전 호주군 중 340명은 전사했고 1216명은 부상당했다. 베트남전 10년 동안 호주군 512명이 생명을 잃은 것에 비해 단 3년 만에 한국전쟁에서 호주군의 사망자 수는 이렇게 많았다. 그것은 한국전쟁이 그 만큼 치열했던 전쟁이었음을 반증한다.(관련기사: "총 성능 시험해보려 북한 노인 쐈다")

호주군은 특히 1·4후퇴로 전쟁에 개입한 중공군의 인해전술을 맞아 경기도 가평 방어선 전투에서 많은 희생자가 생겼다. 이 가평전투에서만 호주군 32명이 전사했고, 59명이 부상당했으며, 3명이 중공군 포로가 되었다. 281구의 호주군은 지금 부산 유엔국립묘지에 안장되어있다. 

해리 스파이서 2011년
▲ 해리 해리 스파이서 2011년
ⓒ 해리 스파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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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리 스파이서(Harry Spicer)씨는 지금 호주 한국전쟁 참전용사회 회장이다. 나는 현대사를 공부했지만 부끄럽게도 한국전쟁에서 호주군의 역할과 희생에 대해 그동안 깊이 알지 못했다.

몇 년 전 호주 시드니와 캔버라로 출장을 가서 전쟁박물관 등을 방문한 적도 있었지만 유럽이 비하면 신생 국가인 호주가 한국전쟁 중 어떤 공헌을 했는지도 잘 알지 못했다. 그래서 이번 한국전쟁 61주년을 맞아 이 기사를 준비했다. 아래는 지난 몇 주간 해리 스파이서씨와 내가 나눈 이메일 인터뷰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 먼저 한국전쟁에 참전한 것을 감사드린다. 한국전쟁 당시 당신의 계급과 역할은 무엇이었나?
"난 상병이었고 분대장으로 7~10명의 부하가 있었다. 호주 미들섹스 보병연대 1대대 소속 이었다. 당시 나는 젊은 군인 사병이었기 때문에 내 역할은 그저 상부의 명령에 따르는 단순한 것이었다."

- 1950년 처음 한국에 대해 들었을 때, 그리고 한국에 간다고 했을 때, 또 한국에 도착했을 때 인상이 어땠나?
"한국에 전투하러 간다고 들었을 때 나는 한국에 대해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전쟁 전 우리군은 홍콩에 주둔해 있었다. 당시 홍콩에서 한국으로 도착하니 한국 경치가 홍콩처럼 산이나 언덕이 많았고 나는 우리가 막 떠난 홍콩과 한국의 경치가 너무 비슷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때 난 19살에 불과해서 뭔가 흥미 있는 일이 없을까 생각했다. 지금 생각하면 참 철이 없었다.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상상도 못한 채 말이다."

"눈 앞에서 전우가 사라졌을 때, 최악이었다"

- 한국전쟁 중 가장 충격적인 경험이 무엇이었나? 또 어려운 임무는 무엇이었나.
"최악의 경험은 내 앞에서 금방 이야기를 나누던 멀쩡하던 전우가 한 순간에 죽거나 부상당하는 순간이었다. 또 한국 피난민들이 당시 비참한 상황에서 살려고 몸부림치던 모습도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다. 중공군과 북한군으로 부터 탈출하려고 사력을 다하는 한국 피난민들의 모습도 보았다.

더욱이 영하의 추운날씨에 불씨 하나 없이 한데서 자며 덜덜 떠는 노인, 여성, 아이들의 모습도 너무 불쌍했던 기억이 난다. 걸어서 피난 가는 행렬을 여기저기서 봤다, 등에다 짐을 지고 가는 사람들, 길가 여기저기 죽어서 빨래처럼 널브려져있는 피난민들 시신도 봤다. 더욱이 탱크에 깔려서 마른 오징어처럼 납작하게 죽은 채 길가에 그대로 버려져 있던 아이들 시신도 지금 내 눈앞에서 어른거린다. 참 이상하다 이렇게 세월이 흘렀는데 하나도 안 잊힌다.  

한번은 1950년 9월 인데 우리부대가 길 건너 한 언덕 위 고지를 점령한 적이 있다. 그런데 미 공군이 우리 군에게 네이팜탄을 투하했다. 아마 우리가 그 부근에 있던 적군인 줄로 알았던 것 같다. 그 폭격으로 우리 군에 백여 명의 사상사가 생겼다.

부상자들은 모두 화상인데 피부가 시커멓게 타들어간 전우들 모습을 보니 무섭게 소름이 끼쳤다. 또 그 부근에서 네이팜탄 폭격으로 북한군 2명이 지프차에 앉은 채 그대로 죽어있었다. 가까이 가보니 그 북한군 몸 덩어리가 마치 숯처럼 새카맸다.

어려운 임무는 중공군의 참전으로 유엔군이 후퇴하기 시작했을 때 유엔군을 엄호하는 것이었다. 나는 후퇴를 안 하고 후퇴하는 유엔군을 엄호하기 위해 돌진하는 중공군에게 총을 미친 듯이 쏘아댔는데 정말 하기 싫었다. 그 와중에 미처 후퇴를 못하고 중공군과 육박전을 하는 유엔군의 모습도 보았다, 아군과 적군이 서로 괴성을 지르면서 총과 대검으로 때리고 찌르면서 죽고 죽이는 모습을 보니 그게 바로 생지옥이란 생각이 들었다."

1950년 한국전쟁 중  해리 스파이서, 오른쪽 앞
▲ 해리 1950년 한국전쟁 중 해리 스파이서, 오른쪽 앞
ⓒ 해리 스파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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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쟁 중 당신이 직접 중공군이나 북한군과 마주친 적도 있었나?
"우리가 적군과 격렬한 전투를 벌인 곳은 낙동강전선에서였다. 적군은 우리에게 박격포를 엄청 쏘아댔다. 또 한 번은 9월 중순인데 우리소대는 낙동강을 넘어서 정찰을 나갔다. 그때 열린 들판 언덕 위에 북한군이 있었는데 우리를 향해 기관총을 비 오듯이 쏘아댔다. 내 전우들은 거의 속수무책으로 꼼짝 못하고 픽픽 쓰러졌다.

총알이 내 주변 땅을 탁탁 소리를 내며 소낙비처럼 내리 꽂았다. 나는 너무 긴장감이 들고 무서웠다. "그래서 날 죽이려면 죽여! 죽이란 말이야. 그럼 다 끝난다"라고 소리 쳤다. 우리소대원들의 사상자가 생겼고 전우 한 명은 총알이 철모를 관통했다. 내 오른쪽 소매도 총알이 관통했다. 또 한 번은 중공군과 심한 총격전을 벌였는데 전투가 끝나고 정신을 차려보니 주변에 있던 전우 몇 명과 소대장이 전사해 있었다.

북한군 전쟁포로도 본 적이 있다. 그런데 그들이 영어를 못하고 나는 한국말을 못하니 서로 말이 안 통했다. 그래서 북한군과 의사소통하는 것을 아예 포기했다."

- 생각하고 싶지 않겠지만 전쟁 중 가장 참혹하다고 느낀 순간은 언제인가?
"너무 많았다. 북쪽으로 진군할 때 하루는 마치 내가 그날 죽을 것 같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그날 온종일 죽음만 생각했다. 마음도 아주 우울했고 극도로 조심했다. 무사히 밤이 가고 다음 날이 밝았을 때 비로소 안도감이 들었다. 내가 살아 있다는 사실이 너무 기뻤다." 

호주 한국전쟁기념 시설 짓는데 앞장

해리 스파이서 연설 중, 2010년 호주 뉴사우스 웨일스 주 한국전쟁기념비 제막식 중
▲ 해리 해리 스파이서 연설 중, 2010년 호주 뉴사우스 웨일스 주 한국전쟁기념비 제막식 중
ⓒ 해리 스파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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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주정부로 훈장을 받으셨는데, 어떤 이유로 훈장을 받았나?
"훈장을 받은 것은 1996년이고 한국전쟁 때는 아니다. 그 훈장은 한국전쟁과는 직접 상관은 없다. 다만, 나는 지난 10년간 호주 한국전쟁 참전용사회 회장을 지냈다. 나는 호주 뉴사우스웨일스 주에 한국전쟁기념시설을 짓는데 앞장섰다. 그리고 뉴사우스웨일스 주 지방정부 도움으로 지난해 한국전쟁기념시설을 건설할 수 있었다. 준비하면서 짓는 때까지 총 3년이 걸렸다." 

- 전쟁이 끝난 후에는 어땠나? 전쟁 후유증 같은 것을 경험했나?
"물론 경험했다. 지금도 후유증이 있다. 난 성격이 다혈질이다. 그래서 그런지 전쟁 직후는 물론이고 지금까지 항상 한국전쟁 당시가 뚜렷하게 회상되고, 그럴 때마다 식은땀이 난다. 밤에는 숙면을 못하고 정신적후유증(PTSD: post traumatic stress disorder)에 지금도 시달리고 있다. 세월이 지나고 나이가 먹어 가면 좀 나아질 줄 기대 했는데 오히려 후유증이 심해지는 것 같다." 

- 전쟁 후 한국을 다시 방문한 적이 있는가? 있었다면 그때 무슨 느낌이 들었나?
"있다. 전쟁 후 첫 방문은 1985년이었는데 내 느낌은 한 마디로 충격 그 자체였다. 내가 한국에서 1951년 떠났으니 34년 만에 다시 찾아 간 것인데 그때 나는 "이곳이 그 폐허였던 나라가 맞나?" 의심이 들 정도였다. 그 후 나는 한국을 10번 정도 더 방문했는데 그 중 3번은 태권도 훈련 때문이었다. 나는 지금 태권도 5단의 검은 띠다. 지금도 나는 한국을 방문할 때마다 "이 나라가 1950년대 초 내가 싸우던 그 나라와 같은 나라인가?" 믿을 수 없을 정도다.

한국은 그 사이 정말 전혀 알아 볼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나게 변했다. 그래서 나는 한국을 방문할 때 마다 큰 자부심을 느끼고 기분도 즐겁다. 나는 한국인들이 오늘 이러한 성공과 성취를 거둘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도록 내가 한국전쟁 당시 조금이라도 어떤 역할을 했다는 것을 생각하면 내 자신에 대해 묘한 자부심을 느낀다."

"세계 속의 한국, 자부심이 생긴다"

- 오늘 한국인들, 특히 한국의 젊은 세대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나?
"나는 한국 젊은이들이 역사를 공부하기 바란다. 특별히 한국전쟁의 역사 말이다. 그리고 지금 북한에 살고 있지 않고 남한에 살고 있다는 것에 어떤 감사함을 느끼기 바란다. 오늘 남한의 번영에 비해 북한의 빈곤함과 독재정권을 봐라."

해리 스파이서, 1950년 한국전쟁 중
▲ 해리 해리 스파이서, 1950년 한국전쟁 중
ⓒ 해리 스파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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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전쟁의 교훈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당신 개인에게, 한국인들에게, 또 전 세계인들에게?
"만약 당신이 자유를 원한다면 그 자유를 쟁취하기 위해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싸워야 한다. 내가 한국전쟁에 참전했을 때 나는 "정말 이렇게까지 자유를 위해 싸워야 하나?" 하고 싸우는 것에 회의를 느끼고 심지어 나 자신을 미워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나는 지금, 그 자유를 쟁취하기 위한 싸움의 한복판에 내가 있었던 것을 기쁘게 생각한다. 그 싸움은 작게 보면 내가 한국인을 위해 싸운 것이지만 크게 보면 내가 내 나라 호주를 위해 싸운 싸움이고 나는 그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특별히 오늘날 한국이 세계에서 성취한 한국의 국제적 위상을 볼 때 내 자부심은 더 하다. 그리고 그 한국인들의 놀라운 성취에 내가 작게나마 공헌했다는 것도 정말 자랑스럽다. 우리는 우리가 옳다고 믿는 것을 위해서 싸우다 보면 고통이나 고난을 받을 수도 있다. 그러나 당신이 옳다는 확신이 있을 때 그 고난과 고통은 충분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지금도 어떤 나라나 개인을 불의하게 괴롭히거나 공격하는 나라가 있다면 우리는 그러한 불의에 맞서서 싸워야 한다."


태그:#6.25, #정신적후유증(PTSD), 군대, 모병제, 군미필자, 용병, #한국전쟁, #호주, #해리 스파이서, #김성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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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영국통신원, <반헌법열전 편찬위원회> 조사위원, [폭력의 역사], [김성수의 영국 이야기], [조작된 간첩들], [함석헌평전], [함석헌: 자유만큼 사랑한 평화] 저자. 퀘이커교도. <씨알의 소리> 편집위원. 한국투명성기구 사무총장, 진실화해위원회, 대통령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투명사회협약실천협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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