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저는 서울대학교 사범대학에 재학중인 3학년 학생입니다. 언론을 통해 단편적인 정보들만이 사람들에게 알려지고, 일부 보수 성향의 일간지들이 저를 포함한 서울대 학생들의 본부 점거를 자기 입맛에 맞게 매도하는 상황에서 현재 서울대학교의 분위기를 제대로 알려드리기 위해 감히 글을 씁니다. 지금 쓰는 글은 학생 전체의 의견이 아닌 제 주관적인 견해를 피력하는 것임을 미리 알려드립니다.

6년 만의 비상 총회 성사, 그리고 본부 점거

지난 5월 30일 오후 6시부터 참가자 접수를 시작한 비상총회는 2000명이 넘는 학생들의 참여로 6년 만에 성사됐습니다. 법인화 논의가 시작된 지 5년이 넘은 시점에서 성사된 비상총회는 서울대학교 재학생의 십분의 일인 1500여 명을 훨씬 상회하는 학생들이 모여 본부의 일방적인 법인화 추진에 대한 총의를 모았습니다. 2시간 가량 진행된 아크로에서의 대규모 집회는, 총회 성사에 회의적이었던 학내 여론을 단박에 뒤집는 쾌거로 본부 측은 물론 아크로 광장에 모인 학생들 스스로에게도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비표를 들어 표결을 하고 있는 학우들의 모습
▲ 표결 비표를 들어 표결을 하고 있는 학우들의 모습
ⓒ 김정현

관련사진보기



비상총회에서는 법인설립준비위원회(이하 설준위) 해체를 안건으로 법인화에 대한 전면적인 재검토를 요구하는 행동에 돌입할 것인지(학생회 안 찬성), 아니면 설준위에 참가하여 장학과 복지 분과라는 제한된 범위 내에만 참여가 보장된 협상 테이블에 응할 것인지(학생회 안 반대)를 놓고 표결이 진행되었습니다. 찬반 표결 전 각각의 안을 지지하는 학생들의 의견을 듣는 시간이 있었고, 학생들은 찬반 양측 의견 모두를 존중하며 박수로 화답했습니다.

표결 결과 1810명의 학생들 가운데 1715명의 찬성으로 '설준위 해체' 안이 가결됐습니다. 구체적인 행동방안의 표결에서는 1329명의 학우들 가운데 1110명이 본관 점거 안을 지지함으로써 본격적인 행동에 돌입했습니다.

30일 밤 10시 무렵 1000여 명의 학생들이 네 갈래로 나뉘어서 본부의 동서남북 출입구로 향했으나 본부 출입문은 이미 잠긴 상태였습니다. 그러자 정문 근처에 모인 학생들은 "설준위를 해체하라" "총장님은 나와라" "문열어라 문열어라"와 같은 구호를 외치며 농성을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문은 열리지 않았고 문을 걸어잠근 몇몇 청원 경찰과 직원들이 그런 학생들을 말없이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20여 명의 학생들이 2층 기자실 창문을 통해 본부 내로 진입했습니다. 본부 내로 진입한 학생들은 기자실 앞 복도에서 잠시 대기하다가 빠른 속도로 1층 로비로 내려와 정문을 열었고 정문 앞에서 농성 중이던 수백 명의 학생들이 정문을 통해 본부로 진입했습니다. 경찰과 직원들의 제지가 있었지만 워낙 많은 수의 사람들을 막을 수는 없었습니다.

▲ 본부 진입 비상총회 직후 학우들이 본부에 진입하는 장면입니다
ⓒ ⓒtiving(유튜브)

관련영상보기


본부 안 풍경

6월 3일 새벽 1시 50분 현재 본부에는 100여 명 가량의 학생들이 본부 1층에서부터 4층 곳곳에 포진해 있습니다. 1층과 2층에는 동아리와 과반을 비롯한 여러 자치단위들이 삼삼오오 모여 담소를 나누거나 노래를 부르며 시간을 보내고, 3층 복도와 4층 총장실 부근에는 기말고사가 코앞이라 시험 준비와 과제를 하는 사람이 많이 눈에 띕니다. 외부에서 보내준 간식을 먹으며 허기를 달래는 축도 있습니다. 사람들이 포진해 있는 층계참과 복도 벽 곳곳에는 학생들이 손수 제작한 소자보와 그림, 현수막 등이 걸려 있습니다.

삼삼오오 모여 있는 학우들
▲ 1층 삼삼오오 모여 있는 학우들
ⓒ 김정현

관련사진보기


정문 출입구 한 곳만을 열어둔 채로 다른 통로는 문을 잠그거나 의자 등으로 진입을 봉쇄한 상태입니다. 출입문 근처에는 이번 점거 농성을 지지하는 이들이 보낸 간식이 쌓이기도 하고, 걸개 그림이나 소자보를 만들려는 학생들이 판을 벌이기도 합니다.

총학생회와 단과대학별 학생회장은 학생대표로서 이번 비상총회와 본부 점거에 책임을 다하기 위해 수시로 운영위원회를 열어 향후 대응 방향에 대해 논의하고 있습니다. 매일 오후 6시에는 촛불문화제가, 오후 9시에는 이번 점거를 지지하는 분들의 특강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지난밤 자정 무렵에는 1층 정문에서 학생회장의 사회로 앞으로의 투쟁방향에 대한 집담회가 열렸습니다. 1층 로비에 모인 100여 명의 학생들은 각자가 가진 의견을 개진하고 서로의 이야기에 귀기울였습니다. 무엇보다 외부의 시선에 대해 우리가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가 가장 중요하게 다뤄졌습니다. 유리하다고는 할 수 없는 외부의 시선 속에서 다른 학생들의 지지를 어떻게 끌어낼 것인가, 본부 측으로 하여금 어떻게 하면 상황의 심각성을 어떻게 인식하도록 할 것인지 열띤 토론이 진행됐습니다.

학생회장 지윤 씨의 사회로 진행되는 총회(1일 밤)
▲ 총회 학생회장 지윤 씨의 사회로 진행되는 총회(1일 밤)
ⓒ 김정현

관련사진보기


학생들의 점거 농성에 이틀 동안 말씀이 없던 서울대 총장님께서는 지난 1일 오후 학생처장을 통해 "학생들의 뜻은 이해하지만 행정관 점거는 불법적 행동"이라며 "2일 정오까지 점거를 철회하면 당일 오후 3시에는 조건 없이 학생대표와의 대화에 응"할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2일 정오 기자회견에서 총학생회는 총장님의 제안을 거부하고 농성을 계속하겠다고 밝혔습니다. 설립준비위원회의 해체 없이 점거 농성을 철회할 수 없으며, 다시 3일 정오까지 답변을 기다리기로 하였습니다. 서울대 평의원회는 3일 오전 8시 평의원회를 긴급소집해 문제의 해법을 모색하겠다고 한 상태입니다.

본부 공간 배치 안내도
▲ 안내도 본부 공간 배치 안내도
ⓒ 김정현

관련사진보기


아직까진 큰 충돌이 없었기 때문에 다들 느긋하게 이번 점거를 '즐기고' 있습니다. 학생의 본분인 공부도 소홀히 하지 않고, 마음 맞는 친구들과 밤을 보내고, 가끔 야식을 먹기도 하고, 자신이 갖고 온 침낭에서 잠을 청하는 모습이 너무나 평화로워 보입니다. 법인화라는 결코 가볍지 않은 문제에 대처하는 우리들의 자세는 역설적으로 무척이나 경쾌합니다.

법인화는 나의 문제

저는 교육학과 학생으로 대학 입학 후, 아니 그 전부터도 교육 이슈에 관심을 가지고 공부를 해 오고 있습니다. 부끄러운 것은 저 역시 이번 비상총회를 통해 본격적인 학생행동이 있기 전까지 교육과 관련된 가장 중요한 이슈 가운데 하나인 국공립대학 법인화 문제에 무관심했으며, 그것을 막을 수 없을 것이라고 체념하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이번 비상총회와 점거 농성은 내 손을 떠난, 혹은 이미 나와는 상관이 없는 것이라고 여겨왔던 법인화 문제가 내가 참여하고 이의를 제기할 수 있는 '나의 문제'로 바뀌는 역설적인 경험을 할 수 있었던 기회였습니다. 결과적으로 저는 법인화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게 되었고, 그것이 학내 구성원으로서의 책임과 의무를 다하는 것이라고 온몸으로 느끼고 있었습니다. 지금 이 순간 본부 4층 복도 한 구석에서 이 글을 쓰고 있는 저는, 점거 농성에 참여하고 있는 것에 대해 일말의 부끄러움이나 후회도 느끼지 않습니다.

법인화 이후의 대학이 어떻게 변화할 것인지 섣불리 예단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이른바 대학공간의 신자유주의화가 지금까지 어떤 방식으로 진행되어 왔는지를 살펴본다면, 가까운 미래를 예측하는 것이 불가능한 일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적어도 우리 대학생들의 생활이 더 나아질 것인지, 그렇지 않을 것인지 정도는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지난 10년간 대학생들의 삶은 한마디로 말해 점점 더 팍팍해졌습니다. 이제 예전처럼 "대학 입학=자유"라는 공식을 믿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입니다. 구조조정이 보편화되고 취업 경쟁이 심해지면서 학생들은 죽기살기로 스펙을 쌓고 있습니다. 대학 역시 이러한 흐름에 편승해서 '학사관리 엄정화'라는 명목으로 학생들의 삶에서 자율의 비중을 축소시켜왔습니다. 졸업 자격에 어학 성적을 명시하고, 거의 모든 과목에 상대 평가제를 도입하고, 복수 전공을 의무화하는 학사 정책들이 시행된 것도 지난 몇 년 사이의 일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변화가 진정 필요한 것인지 저는 의문이 듭니다. 왜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억지로 영어 수업을 들어야 하는지 저는 모르겠습니다. '상대평가라 불가피하게 학점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미안하다'라고 말씀하시는 교수님은 그나마 친절한 축에 끼는 상황에서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복수전공 의무화 적용을 받지 않는 마지막 학번이라 다행이라 해야 할지, 이것도 잘 모르겠습니다. 이러한 것들이 배우고 성장하는 일과 무슨 연관이 있는지 제대로 된 설명을 들은 기억이 없습니다.

총장실에 있는 이명박 대통령과 오연천 총장
▲ 두 분 총장실에 있는 이명박 대통령과 오연천 총장
ⓒ 김정현

관련사진보기


법인화를 앞두고 있기 때문인지 서울대학교에 곳곳에서는 지난 몇 년 동안 각종 공사가 진행되어 왔습니다. 두산 인문관, BTL, 민자 기숙사, 사회대 신양관, 아시아연구소, 학생회관 재건축… 여기 언급된 건물들은 모두 외부 자본에 의해 지어졌고 자본을 댄 기업들은 새로 지은 건물에 입점할 업체들을 선정할 권한을 얻었습니다.

우리가 값싸게 이용할 수 있었던 식당, 이발소, 운동용품점, 컴퓨터수리가게는 모두 문을 닫았고 그 자리에는 1700원짜리 학관 메뉴 서너배를 웃도는 가격의 후식을 판매하는 프랜차이즈 업체들이 들어섰습니다. 누군가는 선택권이 늘어서 좋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다른 누군가의 선택권을 축소시킨 결과라면 그것은 결코 바람직한 변화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는 자신의 가난을 드러낼 수 없는, '보이지 않는' 소수자들에게는 새로운 형태의 차별과 다름없기 때문입니다.

제가 다니고 있는 사범대 역시 새로운 건물의 완공을 눈앞에 두고 있습니다. 학우들의 소중한 공간이었던 '페다고지'를 없앤 자리에 못생긴 우주선 같은 커다란 덩치의 건물이 들어선 것입니다. 날 좋은 날에 팩차기를 하고 축제 때에 모두 둘러 앉아 막걸리를 마시며 노래 부를 수 있었던 우리들의 공간은 제대로 된 통보도 없이 어느 날 갑자기 사라졌습니다. '방'만이 공간은 아닙니다. 거리낌 없이 모여 떠들 수 있는 광장과 거리 또한 소중한 공간입니다.

거의 모든 변화들이 우리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이루어졌습니다. 우리의 목소리를 제대로 낼 기회도 없이, 혹은 그 목소리들은 사실상 무시된 채 모든 일들이 진행되었습니다.

서울대를 비롯한 국공립대학 법인화도 마찬가지입니다. 국공립대학에 대한 국가의 재정 부담 완화와 대학 경쟁력 강화라는 미명 하에 이사회에 권한을 집중시키려는 대학 측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 결과로 법인화가 추진되고 있습니다. 여기에 학생들의 의견 개진은 계속해서 봉쇄당해 왔습니다.

본부 정문 풍경입니다
▲ 정문 본부 정문 풍경입니다
ⓒ 김정현

관련사진보기


그렇기 때문에 지금 우리들의 싸움은 '처음 하는 싸움'이 아닙니다. 지금까지 계속되어 왔지만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던, 학내 구성원인 우리의 목소리가 학교의 변화에 반영되기를 요구하는 '오래된 싸움'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저는 뒤늦게, 이제서야 깨달았습니다. 학교의 일방적인 법인화 추진은, 지난 몇 년간 학생들에게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쳐온 많은 일들이 학생의 의견과는 전혀 무관하게 이루어져 왔던 흐름의 연장선상에 있는 '나의 문제'임을 알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의 지지를 부탁드립니다

비상총회에 이은 본부 점거에 대해 불법이다, 반지성적이다, 무모하다… 이런 말을 던지는 이들에게 말해주고 싶습니다. 당신들이야말로 체제에 아부하는 졸렬하고 치사한 세력이라고 말입니다. 적어도 우리는 부끄럽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하고 싶은 말을 당당히 하고 있으니까요. 근거도 없이 우리를 비난하는 이들은 과연 자신들이 하고 싶은 말을 하는 것인지, 정부의 입장을 지지하기 위한 용비어천가를 부르는 것인지 반문하고 싶군요.

이제 곧 나흘째를 맞이하게 되는 우리들의 행동이 어떤 결과를 만들어낼 것인지, 아직 그 누구도 확실하게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비관보다는 낙관을, 부정보다는 긍정을 통해 계속해서 싸워나가려고 합니다. 지금 여기 본부를 지키고 있는 이들은 실천하는 지성, 살아있는 지성입니다. 우리가 가진 것은 이 몸뚱아리뿐이기에, 그것이 유일한 실력(實力)이기에 기꺼이 그것을 행사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공동체의 문제에 목소리를 내고 그러한 기회가 주어지지 않을 때 저항하고 싸우는 것은 당연한 권리이자 마땅히 감당해야 할 책임이기도 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싸움이 지속되고 승리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분들의 지지와 성원이, 연대와 참여가 필요합니다. 잠깐이라도 짬을 내시어 본부를 들러주시는 것, 음식이나 물품을 보내주시는 것, 격려와 응원의 글을 써주시는 것은 지금 이곳에서 따로 또 같이 싸워나가는 사람들 하나하나를 북돋우는 소중한 힘이 됩니다. 꼭 직접적인 성원의 표시를 보여주지 않으셔도 좋습니다. 다만 주변에 있는 분들께 우리의 소식을 알려주시고, 우리가 하고 있는 행동이 결코 부끄럽지 않은 행동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주시는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서울대 법인화의 문제는 서울대만의 문제가 아니며, 단지 대학을 비롯한 고등교육 분야의 문제인 것만도 아닙니다. 지금 서울대의 학생들이 밤을 새가며 본부를 지키는 것은 불통의 시대에 던지는 한 줄기 쾌청한 메아리를 던지는 것과 같습니다. 이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으로 우리의 목소리를 드러내는 일입니다. 시대가 필요로 한다면 우리는 언제까지나 이 외침을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다시 한 번 여러분의 성원과 지지를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태그:#서울대법인화 , #서울대학교, #법인화, #본부점거, #오연천
댓글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14,0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