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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학생들을 만나는 일이 쉬워지고 있습니다. 주변 동료 교사들을 보면 그 반대인 것 같아서 표정 관리를 해야 할 정도입니다. 사실은 저도 한 동안 헤매다가 한두 달 전쯤부터 안정을 되찾은 것입니다. 그 이유랄까 비결이랄까 하는 것을 곰곰이 생각해보니 다음 세 단어가 머리에 떠오릅니다.

느림. 우정. 유머.  

지난 주 창의적 체험활동 시간에 있었던 일입니다. 참고 삼아 말씀드리자면, 제 수업(영어)시간에는 출석을 부르면 영어 문장으로 대답을 해야 합니다. 이런 식이지요.  

"강유진"
"아이 해브 어 드림."
"김아영"
"아이 러브 유."


하지만 창의적 체험활동은 제가 영어교사로서 학생들을 만나는 시간이 아니어서 영어문장으로 대답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렇다고 "예." 하고 짧게 대답을 하는 것이 싱거운 생각이 들어서 학생들에게 이런 제안을 했습니다.

"영어수업 시간 때처럼 문장을 하나씩 말하면 어떨까? 영어 말고 우리말로."
"어떻게요?"
"우리말로 문장을 만드는 거야. 뭐가 좋을까? 그러지 말고 누가 내 이름을 한 번 불러 봐."


그러자 맨 앞자리에 앉은 영어반장 세미가 손을 번쩍 들었습니다. 

"제가 할게요."
"그래 우리 영어반장이 해봐."
"음. 안준철. 하하하."
"세미는 웃을 때가 참 예쁘다."

"예. 저 좀 예뻐요. 하하하. 근데 대답 안 하세요?"
"했잖아. 세미는 웃을 때가 참 예쁘다고."
"아, 그게 대답이었어요?"
"그럼. 그것도 하나의 문장이잖아."


이렇게 시범까지 보였는데도, 아이들은 문장을 만드는 것이 쉽지 않은 모양인지 하나같이 꿀 먹은 벙어리였습니다. 저는 할 수 없이 그동안 영어로 말하던 것을 우리말로 번역해서 대답하라고 수정하여 다시 주문을 했습니다. 이렇게 친절하게 설명까지 덧붙여서. 
 
"유진아, 너 영어시간에 출석 부를 때 뭐라고 대답해?"
"아이 러브 유요."
"그럼 사랑해요 하면 되겠네. 물론 다른 문장을 만들어서 해도 좋고. 알았지? 자, 이름 부른다. 강유진."
"사랑…"


유진이는 대답을 하다 말고 머뭇거렸습니다. 제가 눈으로 대답을 재촉해도 얼른 뒷말을 잇지 못했습니다. 가만 보니 영어의 어감과 우리말의 어감 차이 때문인 것 같았습니다. 얼굴 표정까지 이상해진 아이를 바라보고 있자니 웃음이 나오기도 하고 귀여운 생각도 들었습니다. 저는 그냥 넘어가주기로 하고 계속 아이들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민두성"
"사랑합니다, 선생님."
"고마워. 나도 두성이를 무지 사랑해."


"박성미"
"나에겐 꿈이 있어요."
"성미 꿈이 꼭 이루어지길 바라."


"최민희"
"사랑해요!"
"리얼리(정말로?) 나도 민희 사랑해!"


민희(가명)의 대답에 "리얼리?" 라고 되물은 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동안 민희는 출석을 부를 때마다 마치 전학을 온 아이처럼 "예." 하고 생뚱맞게 우리말로 대답을 하거나, 뒤늦게야 상황파악을 하고는 마지못해 "아이 해브 어 드림"하고 시큰둥하게 대답을 하곤 했습니다. 영어로라도 사랑이라는 단어가 아이의 입에서 발음된 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그러니 모국어로 발음된 사랑이란 단어에 놀랄 만도 했지요. 

출석을 부를 때마다 일일이 아이들과 눈을 맞추며 짧은 영어를 주고받는 것은 우선 학생들의 이름을 외우려는 목적이 큽니다. 매시간 학생들과 눈을 맞추며 이름으로 출석을 부르다보니 한 달이 채 못 되어 아이들의 이름이 다 외워졌습니다. 머리가 썩 좋지 않은 저로서는 이보다 더 좋은 방법이 없었습니다. 은근히 학생들을 편애하던 못된 버릇도 차츰 없어졌습니다. 아이들이 제각각 개성을 지닌 고유한 생명으로 다가오기 시작한 것도 바로 그 무렵의 일이었습니다.

민희는 개성이 강한 아이입니다. 학교에서 개성이 강한 아이는 매사에 고분고분하지 않는 아이를 뜻하기도 합니다. 민희는 한마디로 길들여지지 않은 야생마 같은 아이입니다. 가끔씩 이탈행동도 하고 감정의 기복도 심한 편인데 다행히도 공부를 포기하지는 않은 것 같았습니다. 가끔 수업시간에 멍하게 앉아 있는 아이에게 다가가서 손에 볼펜을 쥐어주면 귀찮다는 표정을 짓다가도 금세 문제를 풀곤 했습니다. 하루는 중간고사를 며칠 앞두고 아이와 이런 대화가 오고 갔습니다.

"민희야, 이번 중간고사에서 영어 90점 도전해 봐."
"왜요? 왜 저한테만 그러는 건데요?"
"선생님이 너한테 기대를 걸고 있는 것이 잘못이란 말이지?"
"예?"


"한 번 도전해 보라는 거야. 90점을 못 맡으면 널 혼내겠다는 뜻이 아니고."
"근데요. 제가 어떻게 90점을 맞아요?"
"그럴까? 내 생각에는 네가 마음만 먹으면 100점도 맞을 것 같은데."
"헐! 말도 안 돼요!"  


민희는 지난 중간고사에서 83점을 맞았습니다. 그런 고득점(?)을 맞아보기는 태어나서 처음인 듯 그렇게 좋아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 후로 수업태도도 좋아지고 사이도 많이 가까워졌는데 최근에 사소한 일로 사이가 벌어지고 말았습니다. 잘못은 저에게 반, 민희에게 반이 있었는데 일단 제가 먼저 사과를 했습니다. 요즘 제가 아이들을 만나기가 쉬워진 것은 학생들에게 사과하는 것이 쉬워진 것과도 연관이 있습니다.    

제 경우를 미루어 보건대, 사과는 상대에 대한 적개심이 연민의 감정으로 바뀌어져야만 가능합니다. 주변의 선생님들을 보면 그것이 어려운 모양입니다. '신기하게도' 저는 그것이 어렵지가 않습니다. 그렇다고 제 성격이 유순해서 그런 것은 결코 아닙니다. 아이들 말을 빌리자면, 저도 '한 성질' 합니다. 학생들을 대상으로 쪽지상담을 해보면 다혈질이란 단어도 종종 눈에 띕니다. 그래서 신기하고 고마운 것이지요. 

솔직히 저라고 속이 상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제가 먼저 사과는 했지만 절반의 잘못이 정말 저에게 있는 것인지 의구심이 들기도 합니다. 가령, 수업시간에 책상에 엎드려 있는 아이를 깨우다가 말다툼을 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그런 경우 제가 잘못을 했다면 좀 더 부드러운 말로 아이를 타이르지 못한 것일 것입니다. 수업시간에 잠을 자고 있는 아이를 깨우는 것은 교사로서 정당한 일이니까요. 거기까지가 상식이라면, 그 이상을 생각하는 것은 골치 아픈 일입니다. 그런데 전 자꾸만 그 이상을 바라봅니다. 가령, 이런 식으로.

'수업시간에 잠자는 아이들을 깨우는 것이 정당한 일일까? 그럴 수 있다. 깨우지 않으면 더 많은 학생들이 잠을 잘 테니까. 그리고 수업시간에 잠을 자게 되면 그 학생에게도 손해가  가니까. 그럼 수업시간에 잠자는 아이들을 깨우는 것이 정당한 일이라면 수업시간에 잠을 자는 것은 부당한 일일까? 그럴 수 있다? 어떤 근거로? 수업분위기를 망쳐서? 교사의 기분을 잡쳐서? 그것이 아니라면 또 어떤 근거로?'

별 소득이 없을 것 같은 이런 물음을 자꾸 던지다보면 그동안 보이지 않던 것들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합니다. 학생들이 수업에 딱 달라붙도록 교사 중심수업을 학생중심 수업으로 바꾼 것도 그런 물음의 결과였습니다. 다양한 학생들이 존재하는 교실에서 저를 안전하게 지켜주는 것도 그런 역지사지의 상상력입니다. 학생들에 대한 미움과 적개심에서 벗어난 것은 상식 너머의 세계를 탐험하여 얻어 낸 가장 큰 소득입니다.

얼마 전에 재미있는(?) 일이 있었습니다. 진로교육의 일환으로 마련한 직업인과의 대화에  동문 몇 분을 강사로 초빙하였는데, 마침 제 수업(창의적 체험활동)시간이어서 학생들에게 강사를 소개하는 일을 제가 맡게 되었습니다. 강사를 모시고 교실로 들어서자 학생들은 여느 때처럼 소란을 피우고 있었습니다. 책상에 엎드려 있는 아이들도 여럿이 눈에 띄었습니다. 그들을 일일이 깨우고 떠드는 아이들을 말로 타이르는 광경을 지켜보던 강사는 소개를 받기가 무섭게 다음과 같이 일갈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가만 보니까 선생님이 너희들 너무 잘해주시는 것 같은데 내가 학교에 다닐 때는 어림도 없었어. 난 선생님하고는 달라서 너희들 잘못하면 때릴 수도 있으니까 자세 똑바로 해봐."

제가 다시 교실에 들어간 것은 그로부터 30분쯤 지난 뒤였습니다. 그는 제가 오자마자 서둘러 강의를 끝내더니 교실 밖으로 나오자 이렇게 하소연을 했습니다.  

"와. 수업 한 시간 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네요. 선생님들 정말 고생 많으시네요."
"왜요? 애들이 말을 잘 안 듣던 가요? 잘하실 것 같아서 그냥 나왔는데요."
"20분 쯤 지나니까 할 말도 없고 애들도 아예 통제가 안 되던데요. 뭔가 수업에 집중할 수 있도록 학교에서 조치를 해야지 이대로는 안 되겠던데요."


그 말에 저는 웃기만 했습니다. 강사를 보내고 다시 교실에 들어와서는 아이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남은 시간을 즐겁게 보냈습니다. 잠시 후 종이 울리자 아이들과 눈인사를 나누고 교실을 나오는데 자꾸만 웃음이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무언가 명확해지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제가 교육전문가라는 사실이었습니다.

기분이 참 좋았습니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교육공동체 벗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 순천효산고등학교, #행복의 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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ㄹ교사이자 시인으로 제자들의 생일때마다 써준 시들을 모아 첫 시집 '너의 이름을 부르는 것 만으로'를 출간하면서 작품활동 시작. 이후 '다시 졸고 있는 아이들에게' '세상 조촐한 것들이' '별에 쏘이다'를 펴냈고 교육에세이 '넌 아름다워, 누가 뭐라 말하든', '오늘 교단을 밟을 당신에게' '아들과 함께 하는 인생' 등을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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