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
ⓒ 정태권

관련사진보기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우리 나이로 일흔 살이다. 2008년 8월 뇌졸중으로 쓰러진 이후 공개석상에 나타난 그는 늘 초췌한 모습이었다. 그런 그가 7박8일의 중국 방문을 마치고 돌아갔다. 지난해 5월과 8월에 이어 1년 새 세 번째 방중이다. 그것도 열차에서 숙식하면서 대륙을 종단해 6000km나 되는 일정을 강행군했다. 아무리 침실이 딸린 전용열차라고 해도 '풍 맞은 칠순 노인'에게는 무리한 일정이다. 무엇이 이 '풍 맞은 칠순 노인'의 강행군을 재촉했을까?

김정일의 공식 직함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방위원장이지만, 배고픔에 허덕이는 북한의 상당수 인민은 그를 '우리 장군님'이라고 부른다. 더러는 '수령님 쓰시던 축지법, 오늘은 장군님 쓰신다'고 믿고 있다(북한 당국은 1997년 무렵, 항일독립운동 당시 구전된 김일성의 축지법을 김정일이 전수받은 것처럼 우상화 노래를 만들었다).

그는 이번에도 '축지법' 대신 특별열차를 이용했다. 광대한 대륙을 열차로 방문하는 국가수반은 세계에서 유일하게 김정일뿐이다. 그가 이번에 열차를 타고 이동한 거리는 6000km다. 열차는 궤도를 따라 움직인다. 그 예상동선에 따라 방문국의 철통경호와 교통통제가 따라야 한다. 그의 중국 내 동선 또한 방중을 마치고 국경을 넘을 때까지 철저히 비밀에 부쳐진다.

그에 대한 의전도 다른 나라 지도자들한테서는 볼 수 없는 파격이다. 이번에도 다이빙궈 국무위원과 왕자루이 공산당 대외연락부장이 국경에서부터 그를 영접해 전 일정을 동행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이번에도 중국의 권력 핵심인 공산당 정치국 상무위원 9명 중에서 외유 중인 1명을 뺀 8명 모두와 회담하거나 접견했다.

이같은 철통 보안과 파격 의전은 양국의 '특수관계'가 아니면 설명되지 않는 대목이다. 중국 근현대사 전문가인 김명호 성공회대 교수는 이를 '조강지처'에 비유했다.

"'중국에 북한은 본부인이고 한국은 잠깐 사귄 여자'라고 보면 꼭 맞는 것 같다. 중국이 한-중 수교 맺고 한국과 가까이 지낼 때 북한이 서운했겠지만 대놓고 표현한 적이 없고, 중국 역시 북에 미안해하고 그런 거지. 그래도 중국이 조강지처를 버리지는 않을 거다."(<중앙선데이>, 5월 29~30일)

따지고 보면, 그의 부친 김일성 주석은 공식·비공식 방문을 합쳐서 중국을 30회 이상 방문한 것으로 알려졌다. 김정일은 1983년 6월 후야오방 총서기의 초청으로 중국을 처음 비공식 방문했다. 첫 국외 단독방문이기도 했다. 그 전까지는 김일성 주석을 수행해 소련(2회)과 인도네시아를 방문한 것이 전부였다. 이번 방중은 그때부터 치면 여덟 번째고, 김일성 사후에 국방위원장 취임 이후 장쩌민 주석 초청으로 이뤄진 2000년 5월 방중 때부터 치면 일곱 번째다.

이번 방중의 특징은 김일성 주석의 '마지막 방중 행적'을 따라간 '노스탤지어 방문'이라는 점이다. 그가 방중 첫날에 들른 무단장의 '징포후'는 김일성의 항일유격 전승지다. 그 이후는 잠시 지린성 창춘을 거쳐 이틀 밤을 열차에서 숙박하며 2000km를 달려 장쩌민 전 국가주석의 고향인 장쑤성 양저우에 도착했다.

북한의 후계구도 안착과 중국의 동해출해권, 서로 맞바꾸었을까?

양저우는 1991년 10월 김일성 주석이 마지막으로 중국을 방문했을 당시 장쩌민 총서기와 함께 찾은 곳이다. 김 주석의 양저우 일정에는 당시 공산당 판공청 주임이던 원자바오 총리가 내내 수행했다. 김일성은 그로부터 3년 뒤에 사망했다. 양저우 영빈관에는 기념사진이 보관돼 있는 등 곳곳에 그의 흔적이 남아있다. 조선중앙통신 보도에 따르면, 원자바오는 25일 김정일과의 회담에서 "이번 김 위원장의 방문길은 20년 전 김 주석이 다녀간 노정과 같다"며 "당시의 일이 눈앞에 삼삼하다"고 말했다.

김정일은 20년 전에 아버지가 묵었던 영빈관에서 이틀을 보내면서 차기 국가주석으로 유력한 '미래 권력'인 시진핑 국가 부주석과 그의 후견인이자 '상하이방'의 대부인 장쩌민을 만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곤 20년 전처럼 난징을 거쳐 19시간 동안 1200km를 북상해 베이징에서 '현재 권력' 후진타오 주석과 정상회담을 가졌다. 중국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 권력을 두루 만나 전통적 특수관계와 대를 잇는 우의를 과시한 셈이다.

그러나 전통은 종종 도전을 받는다. 예전 방중 때와 달리, 이번에는 악명 높은 중국의 인터넷 검열 시스템이 작동하지 않았다. 중국 당국은 누리꾼들이 포털에서 '김정일'이라는 단어로 얼마든지 검색할 수 있도록 내버려뒀으며, 심지어 누리꾼들이 김정일을 '뚱보'라고 지칭하면서 그의 이동상황을 실시간 생중계하다시피 해도 통제하지 않았다. 중국 정부로서도 국제사회의 따가운 시선과 누리꾼의 비판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북한에 2012년은 김일성 탄생 100주년이 되는 해이자 '강성대국의 대문을 여는 해'이다. 2012년 코앞이지만 북한의 현실은 강성대국은커녕 식량난조차 해결하지 못한 상황이다. 지난해 9월 당대표자회에서 3남 김정은이 당 중앙군사위 부위원장으로 선출되었지만, 후계구도가 안착된 것은 아니다. 그런 점에서 이번 방중은 김정일에게 경제와 후계체제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기 위한 '마지막 강행군'인지 모른다. 20년 전 공산주의 종주국 소비에트연방과 동구가 무너질 당시, 김일성 주석이 장쩌민 총서기를 양저우에서 만났을 때처럼.

1991년 10월 당시 소련 붕괴 직후 김일성이 기댈 곳은 중국뿐이었다. 중국 지도부는 당시 김일성에게 중국식 개혁-개방을 주문했다. 양저우 회동 이후 북한은 그해 12월 남북기본합의서와 한반도비핵화공동선언에 서명하고, 중국식 경제특구 모델을 북한식으로 변형한 '라진-선봉 자유경제무역지대'를 공식 채택했다. 이후 김일성의 갑작스런 사망에다가 자연재해에 따른 식량난까지 겹쳐 '고난의 행군'이 지속되는 바람에 라진-선봉지구 개발은 지지부진했지만.

2011년 5월 김정일의 '대를 이은' 양저우 방문이 주목되는 까닭도 거기에 있다. 중국은 그동안 북한의 경제개발을 연계한 동북3성 개발 프로젝트인 '창지투(창춘-지린-투먼) 계획'을 북한에 역설해왔다. 창지투 계획의 골자는 동해로 가는 길이 막힌 동북3성이 막대한 물류비용을 지불해가면서 랴오닝성 다롄과 단둥항을 이용해야 하는 난관을 북한이 라진항이나 청진항을 개방해서 해결하자는 것이다.

중국은 그동안 이 동해출해권을 헐값에 얻으려 했고, 북한은 그런 거래를 할 수 없다고 버텨왔다. 그런데 북한의 식량난은 더 버틸 수 없을 만큼 심각하다. 세계식량기구(WFP)는 지난 3월 보고서에서 이미 북한의 식량난으로 5월이면 6백만 명이 굶주리게 될 것임을 경고했다. 특단의 대책이 없는 한, 김정일로서는 아버지의 유훈인 '이팝에 고깃국'은커녕, 인민들이 굶주리는 '약성빈국'을 아들에게 물려준들 건사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이번 방중에서 북한의 후계구도 안착과 중국의 동해출해권을 맞바꾸는 거래가 이뤄졌을 가능성이 점쳐지는 배경이다. 근대화에 실패한 중국은 아편전쟁에서 패한 영국에 홍콩을 99년 동안 조차지(租借地)로 내준 쓰라린 경험이 있다. 이명박 정부가 5·.24 대북제재 조처를 고수하며 식량지원을 봉쇄하는 한, 통일이 된들 중국에 50년 조차한 '라진-선봉'을 떠안아야 할지 모른다.


태그:#김정일, #김정은, #장쩌민, #김일성, #양저우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