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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청문회를 상상해보자. '국가란 무엇인가'에 대해 저마다 최고의 모범답안을 제시하는 죽은 철학자들이 모두 한자리에 모이는 가상 청문회를. 그들은 우리 시대의 살아 있는 정치인 유시민 앞에 꼼짝없이 소환당하여 하나하나 그 장점과 단점, 희망과 한계를 분석 당한다. 말하자면 '국가 전문가'들이 모여 벌이는 초대형 서바이벌 오디션인 셈이다. 누가 1등을 차지할까. 누가 꼴찌로 '아웃' 당할까.

'국가 전문가'들이 초대형 서바이벌 오디션을 연다면...

무엇보다도 이미 이 세상을 떠나 영원한 잠을 청하고 있던 죽은 사상가들은, 이 무시무시한 청문회 앞에서 얼마나 침이 마르고 피가 마를까. 하지만 죽은 뒤 수천 년이 지나도 '사상 검증'을 받아야 하는 것이 위대한 철학자의 운명이 아닐까. 자신의 신념이 진정으로 이해받기를 원하는 사상가라면, 오히려 이 급작스러운 '소환'을 기뻐할 것이다. 플라톤에서 베른슈타인에 이르기까지, 짧게는 수십 년, 길게는 수천 년의 시간 차이를 두고 멀리 떨어져 있는 저 수많은 사상가의 이상적 국가를 향한 청사진은 지금 여기, 유시민의 붓끝에서 <국가란 무엇인가>라는 이름으로 부활하고 있다.

유시민의 <국가란 무엇인가>.
 유시민의 <국가란 무엇인가>.
대중에게 사상가의 이미지는 어떤 '키워드'로만 제시된다. 애덤 스미스는 보이지 않는 손, 홉스는 만인의 만인을 위한 투쟁, 비스마르크는 철혈 정치, 마르크스는 프롤레타리아 독재 등등. 그러나 이런 단출한 키워드만으로는 그들이 꿈꾼 국가의 청사진을 이해할 수 없다. 인류의 역사가 지속하는 한, 완전히 공소시효가 만료되는 이데올로기는 없다.

유시민은 그 수많은 사상가의 국가론 중에서 '이미 유행이 끝나버렸지만, 그래도 배워야 할 것들'을, '모두가 비판하지만, 그래도 배워야 할 것들'을 추출해낸다. 오해와 편견의 늪 속에서 건져 올린 빛나는 통찰들은 여전히 우리에게 필요한, 어쩌면 한 번도 제대로 실험되지 않은 보석 같은 정치 철학들이다.

<국가란 무엇인가>를 읽고 있으면, 플라톤과 맹자가, 마르크스와 르낭이, 루소와 소로가, 베버와 베른슈타인이, 마치 동시대의 죽마고우처럼 친밀하게 대화를 나누는 듯한 즐거운 상상에 시달리게 된다. 그러나 이 즐거운 상상을 가로막는 피할 수 없는 장벽, 그리고 이 책이 세상에 나온 진짜 이유, 그것은 바로 국민의 가슴을 갈가리 찢어놓는 우리들의 폭주기관차, '국가' 때문이다.

2008년 봄 새로운 사회현상으로 등장했던 대규모 촛불집회는 우리 사회 내부에 축적되어 있는 자유주의적 열망의 집단적 표출이었다고 생각한다. (……) 그들의 끈질긴 대중행동에 대한 대통령의 응답은 거짓 사과와 물대포였다. 대통령이 국민의 요구를 경청하고 대화할 의사가 없다는 사실을 확인하자, 촛불시민들은 더 이상 거리로 나오지 않았다. 촛불집회는 이제 온라인 동영상으로만 남아 있다. (……) 그들은 이제 다른 방식으로 자신의 의사를 표현한다. 선거에 참여하여 헌법과 법률이 보장하는 정치 참여의 권리를 행사함으로써 불의를 저지르는 정부를 교체하는 것이다. (유시민, <국가란 무엇인가>, 돌베개, 2011, 111쪽)

정의를 내팽개친 국가를 향한 울분을 참다못해 일상을 박차고 거리로 나온 시민들에게 돌아온 것은 철저한 냉대 혹은 가혹한 처벌뿐이었다. 더 이상 국민이 정치인에게 말을 걸 수 있는 창구는 '선거'밖에는 없어 보인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선거는 물론 중요하다. 그러나 선거 '이후'가 더욱 중요하다. 선거의 승리만으로는 약속받을 수 없는, 일상적 민주주의는 어떻게 쟁취할 수 있을까.

유시민이 추구해온 '대한민국 개조론'의 결정판

<후불제 민주주의>와 <국가란 무엇인가>는 굳이 정치인이 아니더라도, 국민의 기본권을 지키려는 모든 '보통 사람들'에게 필요한 일상적 민주주의의 비전을 제시하고 있다. <국가란 무엇인가>는 유시민이 평생 추구해온 '대한민국 개조론'의 결정판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정치적 비전은 <유시민의 경제학 카페>에서 <대한민국 개조론>을 거쳐 <후불제 민주주의>에서 클라이맥스에 도달한 후, 이제 <국가란 무엇인가>에서 보다 완성된 형태의 마스터플랜을 갖추게 되었다.

유시민은 '국가가 마음에 들지 않을 때' 시민에게는 두 가지 선택이 있다고 이야기한다. 첫째, 국가를 떠나, 국가 밖에서 새 삶을 찾는 것. 둘째, 마음에 들지 않는 국가를 점점 마음에 드는 곳으로 바꾸는 것. 그런데 지금 국민의 분노는 이 두 가지 방식만으로는 해결이 되지 않을 정도로 치명적이다. 우리는 점점 자주, 국가 안에 살면서도 국가로부터 추방된 듯한 고통 속에 내던져진다. 평범한 사람들이 국가의 부름을 받을 때는 사랑하는 자식을 군대로 보낼 때, 엄청난 건강보험료를 낼 때, 주민세와 소득세를 낼 때 등뿐이다.

국가가 '국가 사용료 지불'을 요구할 때,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주머니를 탈탈 털며 '국가가 나에게 해준 것이 무엇인가'를 질문하며 절치부심하는 것이다. 우리가 유시민에게 변함없이 희망을 거는 이유 중 하나는 '국가가 마음에 들지 않을 때', 차라리 '국가의 울타리 밖에서' 살고 싶은 사람들의 절망까지 끌어안을 수 있는 정치인이 우리에겐 없기 때문이다. 더 이상 국가에 아무것도 기대할 수 없는, 국가가 저버린, 국가가 추방한 사람들. 국내에 살면서도 자신을 디아스포라라고 느끼는 사람들의 아픔까지도, 그가 꿈꾸는 국가의 청사진에 포함되기를 빌며, 이 책을 읽었다.

이 책의 숨은 주인공은 바로 '국가'라는 이름으로 수없이 은폐되고 희생되었던 '개인'의 숨소리다. 어린 시절부터 철저히 훈육되고 무장된 '애국심'이 아니라, 저마다의 최고의 삶을 향한 목마름이 모여 자유로운 인간들의 공동체를 만드는 세상을 향한 꿈. 내가 가장 하고 싶은 걸 해도 당신에게 아무런 해가 되지 않는 세상, 내가 가장 이루고 싶은 꿈에 다다르는 것이 곧 당신의 꿈을 이루는 일이 되는 세상. 국가의 이름으로 개인을 말살하지 않는 사회에 대한 꿈.

<국가란 무엇인가>를 펼쳐든 독자들은 이 책이 단지 동서고금의 국가론을 집대성한 '이론서'가 아니라는 것을 금세 알아차릴 것이다. 이 책은 유시민이라는 한 정치인의 오랜 꿈의 기록일 뿐 아니라, 그의 꿈을 바라보며 자신의 꿈을 함께 키워가는 사람들의 오랜 목마름의 결실이기도 하다는 것을.

우리는 '국가란 무엇인가'를 알기 위해 '개인이란 무엇인가'를 먼저 질문할 줄 아는 정치가를 원한다. 유시민은 국가와 개인의 관계를 '국가>개인'이라는 폭력적인 도식에 끼워 맞춰 설명하지 않는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말처럼 우리는 '국민'이기 전에 저마다 오롯한 한 '인간'이고 싶기 때문이다.

르낭의 말처럼, 국가라는 허구의 집단에 틀어박히기 위해, 인류라는 거대한 들판에서 호흡하는 일을 포기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인간'이길 포기하지 않고 '국민'이기 위해 어떤 선택을, 어떤 싸움을 시작해야 하는 것일까. <국가란 무엇인가>는 이 질문에 대한 '정치인' 유시민의 대답이자, 동시에 '진보'라는 이름을 포기하지 않은 모든 시민들을 향한 뜨거운 '섞임'의 몸짓이다.

[추신] 처음 이 글을 쓸 때 나는 온전히 '지식 소매상' 유시민의 최근작 <국가란 무엇인가>에 대한 최대한 객관적인 리뷰를 쓰고 싶었다. 객관이란 처음부터 불가능한 것을 알면서도. 시끌벅적한 세상의 갑론을박 속에서, 이 책을 그저 담백하게, 그저 '책으로서' 불러내고 싶었다. 하지만 책장을 넘기면 넘길수록, 책에 스민 저자의 땀과 고뇌를 조금씩 이해할수록, 차가운 객관은 이 책의 고유한 체온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책은 '국가'라는 기차 안에 분명히 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불현듯 그 기차로부터 뛰어내리고 싶은 충동을 느끼는 사람들, 분명히 당당하게 좌석표를 구입했음에도 불구하고 번번이 '입석' 취급을 당하며 자기 자리에 편히 앉을 수조차 없는 사람들에게 은밀하게 속삭인다. 당신들은, 아니 우리들은, 당당히 자신의 입장권을 '차장'에게 보여줘야만 한다고. 우리 눈엔 분명 멀쩡한 차표인데, 이건 '공식적인' 차표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차장과의 기나긴 실랑이에 지쳐 '차라리 내가 포기하자'고 마음먹는다면, 우리는 점점 '입석'으로, '화물칸'으로, 급기야는 위험천만한 기차지붕으로, 마침내 기차 바깥으로 내몰리고 말 것이라고.

그러나 이 싸움은 너무 힘겹다. 객석 곳곳에서 만나는 차장들은 도무지 '모국어'가 통하지 않는 것 같다. 분명 '대한민국'이라는 같은 기관차를 탔는데, 당최 서로 말이 통하지 않는다. 우리의 정당한 항의는 번번이 저쪽의 '거짓 사과'나 '물대포 공격'에 부딪힌다. 불행 중 다행인 것은 우리는 촛불집회를 통해서, 지난 선거를 통해서, '우리 편'이 결코 약하지 않다는 것을 확인했다는 점이다.

문제는 이 애틋한 '우리 편'들은 좀처럼 '연대'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국가란 무엇인가>는 '너희 나라는 밉상이고, 우리나라는 무조건 최고다'라는 식의 애국심이 아니라, '우리 국민이기 이전에 먼저 자유로운 개인이 되자'고, '우리 시민이기 이전에 먼저 정의로운 인간이 되자'는 외침에 동의하는 사람들이 모여 건설하는 새로운 공동체를 향한 첫 발걸음이다. 이 싸움은 예전보다 더욱 힘겨울 것이다. 이 싸움은 예전보다 더욱 혹독할 것이다. 유시민은 이런 힘겨운 싸움을 포기하지 않은 사람들을 '바람을 거슬러 나는 새들'이라고 부른다. 그와 함께라면, 바람을 거슬러 날아가는 일도 외롭지만은 않을 것 같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을 쓴 정여울씨는 문학평론가입니다.



태그:#유시민, #정여울, #정여울, #국가란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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