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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화로 바다
 헌화로 바다
ⓒ 유혜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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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곡항이었다. 헌화로가 시작되는 곳, 심곡항. 길은 푸른 바다를 따라 구불거리면서 길게 이어지고 있었다. 그 길 위에서 한 여자를 만났다. 심곡항 전망대로 가는 길 입구 쉼터였다. 나와 비슷한 차림새의 여자가 쉼터 의자에 걸터앉는 것을 심곡항 입구에서 보았다. 나 역시 그곳에서 쉬어갈 참이었다. 쉼터로 다가가 여자에게 인사를 건넸고, 말을 걸으면서 의자에 배낭을 내려놨다.

여자는 삼척에 산다고 했다. 이날 오전 7시에 출발했단다. 목적지는 강원도 고성. 해안도로를 따라서 걸을 작정이라고 했다. 여자는 늘 삼척에서 고성까지 걷고 싶었다는 설명을 덧붙였다. 키가 크고 후리후리하면서 날씬한 몸매의 여자는 알고 보니 나와 동갑이었다. 등산을 즐겨서 전국의 산 가운데 안 가본 곳이 거의 없고, 도보여행도 짬짬이 나선다고 했다. 제주 올레를 걸었고, 얼마 전에는 원주에서 울트라도보 100km에 도전해 완주했단다.

한데 울트라도보를 하면서 무리를 한 탓인지 고관절이 아파 걱정이라고 여자는 말했다. 아무래도 오늘 안으로 강릉까지 가지 못할 것 같다고 했다. 나는 무리하지 말라, 는 말을 곁들였다. 하루 이틀 걷고 말 것이 아니라면 다리를, 발을, 몸을 아껴야 하니까.

우리는 서로 여행을 다닌 곳에 대한 정보를 풀어내고 들었다. 같은 여자라는 동질성에, 동갑이라는 공통점에다가 혼자 떠나는 여행을 즐기는 것까지 비슷한 취향이니 이야기가 잘 통할 수밖에 없었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이라면 가는 방향이 반대라는 것. 걷는 방향이 같다면 길동무가 되면 좋으련만, 여자는 고성으로 나는 삼척으로 가는 중이었으니 서로 엇갈려 지나가는 인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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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3일부터 2박 3일간 정동진에서 삼척까지 걸었다. 목요일인 12일에 출발할 작정이었으나, 동해안에 비가 온다고 해서 일정을 하루 늦췄다. 예정도 3박 4일이었으나, 발 때문에 하루 일찍 돌아왔다. 발바닥에 물집이 잡히고, 발가락 끝에 통증이 많이 느껴져 무리를 하지 않는 게 낫겠다는 판단을 했던 것이다. 이런 경우는 또 처음이다.

"인연이 있으면 또 만납시다."

길에서 만난 사람은 길에서 헤어지는 법. 나는 여자와 작별의 악수를 나누면서 말했다. 여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서로 이름도, 연락처도 묻지 않았다. 인연이 있으면 다시 만날 것이요, 아니라면 그뿐이니까. 길 위에서 사람 한두 번 만나는 것도 아니니, 그쯤은 나도 알고 여자도 안다.

걷다보면 심심치 않게 사람들을 만난다. 태어나서 처음 보는 사람이지만 걷다가 만났다는 공통점 때문에 친밀감이 느껴져 이야기를 나누고, 가끔은 동행이 되어 같이 걷기도 한다. 그리고 인연이 다하면 헤어져서 각자 갈 길을 간다. 어떤 사람은 기억에 오래 남지만, 어떤 사람은 헤어지는 순간 잊기도 한다.

이 여자는 이번 여행 내내 생각이 났다. 고성까지 간다는데 지금은 어디쯤 가고 있을까? 아프다던 고관절은 괜찮을까? 동갑내기여서 그랬는지, 아니면 나처럼 도보여행을 하고 있기 때문에 그랬는지 잘 모르겠다. 아무튼 이상하게 자꾸 생각이 났다.

그런데 여자도 그랬단다. 지금은 어디쯤 가고 있을까? 잘 걷고 있을까? 이런 생각을 했단다. 어떻게 알았느냐고?

헌화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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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곡항에서 헤어진 여자를 다시 만난 곳은 삼척 시내였다. 나는 예정대로 해안도로를 따라 걸어서 삼척에 도착해 하룻밤을 잤다. 여자는 고관절 때문에 더 걷지 못하고 결국 정동진에서 철수(?)할 수밖에 없었단다.

삼척에서 하룻밤을 잔 나는 삼척역까지 걸어갔다가 다시 삼척 시내로 돌아왔다. 삼척역에서 출발하는 바다열차를 타고 강릉으로 되짚어 갈 생각이었는데, 예약을 하지 않은 탓에 표를 사지 못했던 것. 결국 삼척에서 고속버스를 타고 서울로 돌아갈 작정으로 삼척시내로 돌아온 참이었다. 점심식사를 하고 삼척버스터미널로 가다가 길 위에서 누군가 나를 보고 아는 체를 해 깜짝 놀랐다. 여기에 나를 아는 사람이 없을 텐데, 하면서 보니 심곡항에서 만난 여자였다.

인연, 이란 말이 이럴 때 가슴을 파고 들어온다. 언제 어디서 만나자, 는 구체적인 약속을 해도 이렇게 딱 맞추기가 어려운 법인데, 싶었기 때문이다. 여자와 나는 너무 반가워 손을 마주 잡았다. 여자가 고관절 때문에 삼척으로 돌아오지 않았다면, 내가 삼척역에서 그냥 기차를 탔더라면 우리는 만나지 못했으리라. 아니, 그 시간에 삼척 시내를 지나가지 않았다면 우리는 다시 만나지 못했을 지도 모른다.

헌화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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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는 고관절이 나아지면 청산도로 여행을 갈 예정이라고 말했다. 나는 지난해 4월에 청산도를 걸었더랬다. 그 아름다운 섬에서 만난 인연이 순서 없이 떠오르면서 그들이 그리워졌다. 당리의 홀로 사는 할머니와 사계절 펜션의 동갑내기 쥔 여자. 여행이란 이렇게 인연을 만들고 인연을 이어나가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는 생각을 했다.

삼척 시내 길 위에서 여자와 나는 늦은 통성명을 했다. 그래서 여자의 이름 세 글자를 기억에 오롯이 담아두게 되었다. 우리는 이번에도 악수를 하고 헤어졌다. 하지만 이번에는 다시 연락을 하자는 약속을 했다. 길에서 다시 만나 길에서 다시 헤어졌지만, 여자는 삼척이라는 도시와 함께 내 기억 속에 오래 머무르게 될 것이다.

여자 덕분에 마른 먼지가 풀썩이면서 삭막하기 짝이 없어 보이던 삼척이라는 도시가 갑자기 무지갯빛 도시로 탈바꿈하면서 낯을 익히게 되었다. 중앙로 길과 더불어 강을 따라 이어지던 산책로와 삼척역으로 이어지던 철길까지 새로운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만남이란 그런 것이다. 인연이란 그런 것이다.


태그:#도보여행, #강원도, #심곡항, #삼척, #청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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