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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분은 어느 나라 사람일까요?
 이분은 어느 나라 사람일까요?
ⓒ 남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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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아직도 한자 명패가? 어느 나라 사람인데?'

신임 최문순 강원도지사 인터뷰 기사(엄기영 대통령급 인지도 누른 비결은?)를 읽다가 거기 나온 사진을 보고 문득 떠오른 생각이다.

도지사 책상 위에 놓인 화려한 자개 명패에는 우리 글, 한글은 눈을 씻고 봐도 없다. 도대체 뭐라고 씌어 있는 거야? 누구 읽으라고? 이 사진을 보니 3년 전 일이 떠오른다. 우리나라에도 우리 고유의 언어가 있는지 질문했다는 미국 고등학교 선생님이.

한국도 일본어 쓰지 않니? 네 나라 말이 따로 있니?

그러니까 작은애가 고등학교 10학년이던 2008년의 일이다. 아이는 주 정부가 전액 보조하는 여름 거버너스스쿨(Governor's School)의 '외국어 아카데미'에 가고 싶어했다. 

거버너스스쿨에 선발된 고등학생들은 방학 기간 3주 동안 대학 기숙사에 살면서 스페인어, 불어, 독일어, 라틴어, 중국어, 일본어 가운데 자신이 선택한 외국어를 공부하게 된다. 이 가운데 스페인어, 불어 같은 외국어는 해당 외국어만 써야 하는 전체몰입(Full-Immersion) 교육으로 이루어지고 다른 외국어는 영어도 허용되는 부분몰입(Partial-Immersion) 교육으로 이루어진다고 했다. 

아이는 한국에 있을 때 한 학기 동안 중학교 선택과목으로 한문 대신 일본어를 배웠다. 그래서 조금은 친숙한 일본어로 신청했는데, 일본어 아카데미를 신청한다고 하니 어떤 선생님이 이렇게 물었단다.

"일본어가 네게 외국어야? 한국도 일본어를 쓰지 않니? 네 나라 말이 따로 있니?"

이 질문을 받은 딸아이는 황당했다고 한다. 물론 이런 질문은 그 선생님의 무지에서 나온 무식한 질문이었다.

하지만 그 선생님뿐만이 아니다. 이곳에서 만나는 사람들 중에는 "니 하오마?" 또는 "곤니치와"라고 인사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래서 내가 한국인이라고 하면 한국말이 따로 있느냐고, 역시 무식한 질문을 던진다. 물론 많지는 않지만 말이다. 그러면서 한국 문자가 중국어나 일본어와 비슷하냐고 묻는다. 

한국어 문자는 중국어나 일본어 문자와는 전혀 다르다. 동아시아 언어에 조금만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미국인들 가운데에도 세 나라의 문자를 구별할 줄 안다. 비록 읽을 줄은 몰라도 말이다.

만약 그런 사람이 도지사실에 앉아 있는 최문순 지사의 사진을 보게 되면 "이 사람은 중국인"이라고 답할 가능성이 높다. 왜냐하면 이들이 쉽게 구별하는 한국어는 네모 모양의 틀에 넣을 수 있는 문자인데 명패에 적힌 문자는 결코 이런 문자가 아니니까. 

내가 가르치고 있는 ESL 학생들에게도 묻고 싶다. 사진 속 사람이 어느 나라 사람으로 보이느냐고. 내 학생들은 칠레, 멕시코, 엘살바도르, 니카라과, 러시아, 이라크, 에리트리아에서 왔다. 이들은 분명 최문순 지사의 얼굴만 봐서는 한국인인지 중국인인지, 일본인인지 구별하지 못할 것이다. 우리가 서양 사람 얼굴만으로 금세 국적을 알아낼 수 없듯이.

하지만 사진을 곰곰 살펴보면서 이 사람이 누구인지를 설명해 주는 명패 속 언어를 보고 이렇게 답할지 모른다. "혹시 중국인?" 물론 틀린 답이라고, 중국인이 아닌 한국인이라고 나는 말해줄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또 다시 이렇게 물을지 모른다. "한국도 중국어를 쓰느냐? 한국어는 없느냐?"

<국립국어원>자료실에는 "세종대왕께서는 일반 백성들의 문자 생활을 편하게 하기 위해 직접 한글을 만드셨다"고 나와 있다.
 <국립국어원>자료실에는 "세종대왕께서는 일반 백성들의 문자 생활을 편하게 하기 위해 직접 한글을 만드셨다"고 나와 있다.
ⓒ 국립국어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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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명패 언제까지 쓸 것인가

1931년생인 내 아버지는 생전에 한자를 즐겨 쓰셨다. 세종대왕이 창제한 쉬운 우리글이 버젓이 있는데도 아버지는 한자를 쓰셨다. 왜 좋은 우리글 놔두고 한자를 쓰시냐고 여쭈면 맞춤법에 자신 없는 한글보다 한자가 익숙하고 편해서라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아버지 편지에는 언제나 한자가 많이 섞여 있었다. 다행히 한문교육을 받았던 자식들은 아버지가 보내온 한자 편지를 읽는 데 어려움이 없었다.

하지만 그 편지를 지금 10대, 20대인 손자, 손녀들에게 보여주면 할아버지 편지를 이해할 수 있을까. 특히 한문 교육을 거의 받지 못한 내 아이들은 할아버지 편지를 보면 그만 까막눈 '문맹자'가 될 것이다.

한문교육의 필요성을 말하려는 게 아니다. 개인적으로 나는 한문교육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우리말에 한자어가 많이 섞여 있는 게 사실이고 그렇기 때문에 우리말을 정확히 알기 위해서는, 또 언어의 경제성 측면에서도 한문교육은 필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곳 미국 고등학교에서 라틴어를 공부하는 학생들이 꽤 되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최문순 지사의 한자 명패, 이것은 좀 아니지 않은가. 한글 명패가 어때서? 서울시 의회 의원들도 모두 한글 명패를 쓰고 있다고 하고, 국회의원 명패도 지금은 한글이 대세라고 하는데 왜 가장 최근에 취임한 도지사의 명패가 한자로 되어 있을까.

최문순 지사는 36대 강원도지사에 취임하면서 도지사실을 개방하겠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그곳을 찾은 사람들 가운데 한자를 모르는 국민들이 도지사 책상 위에 놓인 어려운 한자 명패를 보면 얼마나 답답할까. 물론 짐작이야 하겠지만 말이다. 또한 외국인이 도지사실을 방문해 책상 위에 놓인 한자 명패를 보면 무슨 생각을 할까.

서민적인 이미지의 최문순 도지사는 인터뷰 기사에서 직원조회 할 때 군대조직처럼 서 있는 직원들을 보면 불편하다고 했다. 또 권위주의적인 문화를 자율적이고 창의적인 조직으로 바꿔나가겠다고도 했다. 감동 없는 하급정치는 안 하겠다고 하고. 이런 개념 있는 도지사에게 권위적으로 보이는 한자 명패?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세종대왕은 <훈민정음> 서문에서 한자를 어려워하는 국민들을 위해 사람마다 쉽게 익혀서 편안하게 하려고 한글을 창제했다고 했다. 그런데 이 좋은 문자를 놔두고 왜 굳이 한자를 쓰려 하는 것일까. 이렇게 한자 명패를 써야 권위가 서고 점잖고 품위 있게 보인다고 생각한 것일까. "江原道知事 崔文洵"의 한자 명패는 누구 머리에서 나온 시대착오적이고 권위적인 발상일까. 그것이 알고 싶다!


태그:#최문순 명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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