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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접 받아보시면 어떨까요?"
 
(가)살림의료생협(이하 '살림')의 건강 상담이 어떻게 진행되는지를 묻자, 유여원(31) 사무국장이 답했다. '냉큼' 수락했다. 사실 몸이 안 좋던 참이었다. 
 
4월 23일로 예약하고 이메일로 미리 문진표를 받아 작성해 보냈다. 상담 당일, 먼저 혈압을 재고 문진표에 기재되지 않은 생활습관, 기타 질환, 가족병력 등을 묻는 예진을 받았다.
 
상담실에서는 추혜인(33·가정의학과) 의사가 기다리고 있었다.
 
"오늘 저랑 상담하고 싶은 건 어떤 거세요?"
 
추 의사는 몇 시에 자고 일어나는지, 피로와 스트레스는 하루 중 언제 느끼는지, 머리는 어떻게 아프고 언제 심해지는지 등을 상세히 물어보았다. 어깨와 목을 눌러본 그는 "긴장성 두통이에요. 어깨와 목 근육이 굳어서 신경이 압박을 받아 생기는 거예요"라며 직접 마사지를 해 어깨와 목을 풀어주었다.
 
"몸이 경직돼 있으면 사람을 대할 때나 행동도 경직되기 마련이거든요. 몸이 편해야 태도도 유연해져요."
 
추 의사는 이야기가 한 차례 끝나면 기자를 지그시 쳐다보았다. 말을 기다리는 것이었다. 기자는 당장 아픈 곳 외에도 평소 걱정되는 몸의 이상과 궁금한 점을 충분히 물을 수 있었다. 한 명에게 30분을 할애하는 이 상담에는 자신의 아픔을 최대한 빠르게 '어필'하고 나와야 하는 기존 병원에서의 조급함이 없었다.
 
'살림'은 서울 은평 지역을 거점으로 둔 의료생활협동조합(이하 의료생협)이다. 의료생협은 지역주민들이 의료인과 함께 각자의 건강, 의료,생활과 관련한 문제를 공동으로 해결하고자 의료기관을 포함한 건강관련 시설을 설립, 운영하는 주민자치조직이다. 지역주민은 누구나 조합원이 될 수 있고, 조합원이 출자금을 모아 의료기관을 설립하고 소유와 운영을 함께한다. 한국에는 1994년 안성의료생협을 시작으로 원주, 대전, 서울 등지에 총 13개의 의료생협이 운영되고 있다. 일본의 경우 120개의 의료생협에 220만 명 세대가 조합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살림은 2년의 준비기간을 거쳐 지난 3월 지피기(발기인)대회를 진행했다. 현재 조합원은 160여 명이다. 가정의학과 2명, 치과 1명, 한의사 1명이 함께 한다. 서울, 경기권에 거주하거나 직장을 가진 이들은 누구나 조합원이 될 수 있다.
 

여성을 생각하는 병원, 이렇게 탄생했다


'살림'의 또 다른 정체성은 '여성주의 의료생협(준)'이라는 이전 이름에서 알 수 있다. 대개의 약은 '백인 남성'을 기준으로 제조된다. 치료는 남성의 임상실험 결과에 기초한다. 의료정책의 기초가 되는 실태조사 통계엔 온종일 일해도 100만 원밖에 못 받는 다수 여성들이 들어 있지 않다.
 
여성이 대부분 수행하는 간병노동과 가정에서의 돌봄노동은 건강에 기여하면서도 그 가치를 인정받지 못한다. 손목 염좌에 시달리면서도 매일 밥을 해야 하는 중년 여성의 삶은 '손목을 쓰지 말라'고 요구하는 남성 의사에게 이해받지 못한다.
 
여성주의 의료는 이러한 기존 의료를 평등하게 재구성하자고 이야기한다. 그러한 '여성주의 병원'을 고민하다 2004년부터 의료생협에 관심을 갖게 된 추씨와 여성주의 단체 '언니네트워크'에서 활동하며 여성주의 비혼공동체를 고민하던 유씨를 비롯한 활동가들의 만남이 씨앗이 되어 2009년 여성주의 의료생협 준비모임이 시작되었다.
 
"건강을 '관계'라는 개념으로 바라보고 협동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는 점, 소유부터 운영까지 구성원들이 민주적으로 함께하는 점 등이 여성주의랑 정말 잘 맞는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그냥 개인 의사가 소유하는 병원이 아니라 의료생협의 틀로 공동체를 만들자는 생각을 했죠."(유여원)
 
환자도 아닌 사람들이 왜 의료생협에 있냐고?

의료생협은 환자모임이 아니다. 조합원들 대부분은 건강한 이들이다. 의료생협이 추구하는 건강은 치료가 아니라 '내 몸에 대한 권한을 키우는 것'이다. 따라서 교육과 관리시스템을 통해 병을 예방하고 건강한 삶을 유지하고자 한다. 그 원동력이 '관계'라고 유씨는 설명한다.
 
"약이나 식사를 챙겨주는 사람, 운동을 같이 할 수 있는 친구가 있다면 훨씬 수월히 건강을 지킬 수 있어요. 그래서 지역 주민들이 그런 걸 서로 도와가는 관계망을 만드는 게 중요해요. 내 건강만 챙기는 게 아니라 옆 사람과 함께 건강해지자는 거예요. 나만 건강하고 이웃들은 다 아프다면, 건강하다고 말할 수 없죠."
 
이는 좋은 진료와도 연결된다.
 
"의사들이 항생제를 많이 쓰는 이유 중 하나는 환자의 경과를 계속 지켜볼 수 없기 때문에 방어진료를 하는 거거든요. 제아무리 뛰어난 의사라도 조합원, 환자들이 의사를 믿고 계속 와준다는 신뢰가 없으면 좋은 진료를 하기 어려워요. 의료생협 의사들이 항생제를 적게 처방하는 건 그런 신뢰가 있고 경과를 계속 볼 수 있으니 필요한 시점에 약을 쓸 수 있기 때문이에요. 환자 역시 '내가 아는 사람'이라는 신뢰를 갖는 게 치료에 많이 도움이 되죠. 신뢰를 갖고 지속적으로 병원을 찾기에 서로 신뢰가 쌓이고 다른 방식으로 진료를 할 수 있는 거예요."
 
그 과정을 통해 '우리 동네 주치의'가 된 의사는 환자 각각의 상황과 삶을 더욱 자세히 이해하고 세심한 진료에 임할 수 있다.
 
그렇기에 일상적인 관계 맺기가 중요해진다. '살림'은 월 1회 여는 '살림파티' 등 정기 모임과 공부, 등산, 텃밭 가꾸기, 밑반찬 만들기, 춤 등 7개의 소모임을 통해 서로의 관계를 다진다. 이렇게 맺은 관계는 개인과 공동체의 성장으로 이어진다. 일본의 미나미 의료생협 등을 견학하면서 처음엔 세련된 건물, 인간적인 프로그램에 감탄했던 추 의사는 그것을 구축한 힘이 수많은 조합원과 자원봉사자들임을 알고, 의료생협의 본질을 새로이 깨닫게 됐다고 했다. 유씨도 생협을 '민주주의의 학교'라고 했다.
 
"돈 내고 이용하긴 쉽지만 직접 운영에 참여하는 건 사실 귀찮은 일이죠. 하지만 어디서 뜻있는 의사가 들어와서 의술을 베푸는 게 아니에요. 의료생협과 의료인을 만들고 올바르게 키워내는 건 조합원의 몫이에요. 그렇기에 저희도 한 명의 훌륭한 시민이자 조합원으로서 개인이 성장하는 게 중요한 거죠."
 
의료생협이 참여의 경험과 더불어 민주주의, 인권 교육 등을 중시하는 이유다. 내 건강을 통제하려면 삶 전반과 주위 공동체, 사회에도 영향력을 가져야 한다는 취지다.
 

"여성주의 의료생협이면 여자만 이용?"

 

살림이 자리잡은 은평구엔 종합병원이 없다. 의사 1인당 인구수는 1038명으로, 강남구의 10배다. 건강자원이 적다고 할 수 있다. 반면 풍부한 자원도 있다. 공동육아에서 봉사단까지 작고도 다양한 주민들의 풀뿌리 자치조직들이 그것이다. 유씨는 "여성주의가 뭐야? 듣고 보니 우리랑 비슷하네"하면서 스스럼없이 '살림'을 받아들인 지역 풀뿌리들의 열린 태도와 탄탄한 네트워킹에 감화를 받았다고 한다.
 
"여성주의 의료생협이면 여자만 받는 거 아니냐?"던 남성 주민이 금돼지를 팔아 증좌를 한 일도 있었다. 본인 역시 많이 변화했다고.
 
"저도 좀 둥글둥글해졌어요. 원래는 싸우기 대장이었는데.(웃음) 사무국장이 여성주의자라고 의료생협이 여성주의적이 되는 게 아니죠. 의료생협은 지역 주민에 기초하니까요. 그들이 여성주의에 관심을 가지려면 함께해야 하고, 그러려면 이 사람을 믿고 사랑해야 하죠. 지역 활동가가 다 됐죠?(웃음) 물론 그럴 수 있는 제 힘은 여성주의로부터 와요. 범위가 지역으로 넓어졌을 뿐이죠."
 
'살림'은 은평구 내 풀뿌리 조직 네트워크 '은지네(은평지역네트워크)'에도 함께하고 있다. 소속된 다른 모임들도 '살림'의 살림의 발기인이나 운영위원, 조합원 등으로 적극 참여하고 있다고.
 
"여성주의 이론이 현실에 반영된 게 어쩌면 협동조합 운동일지도 몰라요. 서로 보살피고 모두 연결되어 있으니 힘을 합쳐야 한다고 생각하는 게 똑같잖아요. 거기 동감한 여성주의 활동가들이 조합원이 되면서 지역에 관심을 갖게 되고, 지역주민들은 지역활동에 적극적인 집단을 새로 만나게 되고 서로 시너지(상승) 효과를 냈죠. 또 '사람들이 모두 관계 맺고 사는 건강한 공동체'라는 비전을 구체적 이슈로 도출하는 게 여성주의 담론이 할 수 있는 역할이라고 봐요. '동네에서 모두 어울려 살자'는 말이 동네 가정폭력 피해자에게 무엇을 해야 할지로는 연결되지 못하잖아요. 그 연결고리가 되는 게 여성주의란 거죠."

'건강메뉴', '우리 딸 시리즈' 등 다양한 사업 벌여

올해 '살림'은 본격적으로 지역주민을 향한 사업을 벌인다. 3월부터 매월 넷째 주 토요일엔 '주치의 건강 상담'을 받을 수 있다. 5, 6월과 9, 10월엔 불광천을 찾으면 거리 건강 체크 부스에서 간단한 건강측정과 상담을 받을 수 있다.

 

10명 이상의 인원이 요청하면 찾아가는 건강교육 프로그램 '건강메뉴'를 신청해 듣고픈 교육을 받을 수 있다. 5월엔 신청자를 받아서 '건강실천단 1기'를 발족한다. 6주간 지속적인 주치의 상담과 현미채식, 운동과 팀원 간의 협동을 통해 비만, 당뇨 등을 치료하고 건강을 증진시키는 프로그램이다.

 

10대 딸과 엄마가 함께 들을 수 있는 '우리 딸 시리즈'는 여성주의적 지향을 담은 건강교육이다. 첫 강의 '소녀시대가 40~50대에 걱정되는 질병은?'은 여성들이 가장 관심 갖는 주제인 다이어트를 자신의 몸에 대한 자존감과 건강을 키우는 방식으로 제시한다. 조합원의 욕구에 기초하면서 여성주의 시각으로 재해석할 수 있는 교육들을 개발하고 전파하는 노력의 하나다.

 

유씨는 동네가 약자를 끌어안고 함께 건강하게 사는 공동체로 발전하기를,'살림'이 옆집 할머니와 일상을 나누고 여성주의를 얘기하는 사랑방이 되기를 꿈꾼다. 그 때쯤엔 '살림'의 병원도 늘어나고, 일본처럼 그룹홈을 세웠을 수도 있다. 꿈으로의 발판은 발기인 300명과 출자금 3000만 원. 정식 의료생협으로 발족하기 위한 필요조건이다. '1인 1구좌'를 출자하면 그 발판을 함께 다질 수 있다.

* (가)살림의료생협 위치: 서울시 은평구 역촌동 62-53 (재) 살림이 5층
(02)-6014-9949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노동세상 5월호에도 실렸습니다.


태그:#의료생협, #살림의료생협, #대안의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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