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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늦게 읽은 고 박완서 작가의 첫사랑. 재미있고, 솔직하고, 묘한 기분이 들게 한다. 그리고 그 시절을 그립게 한다. 고 박완서 작가에게도 첫사랑 같은 것이 있었다니. 그것도 꼭꼭 숨겨두었다가 일흔 넘어서야 비로소 글로 써서 세상에 내 놓다니. 참으로 '새침하기' 이를 데 없다(웃음). 정말 잊기에도 아깝고 쓰기에는 더더욱 아까웠던 것일까.

 

오래 묵힌 만큼. 반 백 년을 봉인했다 푼만큼. 소설 <그 남자네 집>(현대문학)은 시간을 초월해 그 시절의 풋풋함이 그대로 묻어난다. 선생은 생전에 이 소설이 자신의 삶과 가장 가깝다고 하였었다. 해서 읽는 내내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디까지가 허구일까 점치는 재미가 쏠쏠했다.

 

배경은 1950년대 전후의 폐허 서울. 어머니의 외가 쪽 친척이었던 '그 남자 네'가 작중 화자가 사는 돈암동 안감내, 홍예문이 있는 어느 너른 집으로 이사 오면서 그들의 이야기는 시작된다. 학년으로는 동기였으나 그 남자는 자신이 1년 일찍 학교 들어간 것을 감안하여 화자에게 대뜸 '누나'라 부르는 바람에 남녀사이의 어색함은 쉬이 풀렸다.

 

누나 동생이었기에 집안 어른들도 어쩌면 그들 자신도 서로에 대한 속마음을 숨기고 편안한  만남을 가질 수 있었다. 남들처럼 피난도 못 가고 학교도 휴교이고. 하루아침에 생과부가 된 두 여인과 어린 조카를 먹여 살려야 하는 실질적 가장으로 미군부대에 출근하며, 황막한 시대를 견뎌내던 화자에게 그 남자의 출현은 시의 적절했다.

 

그들은 연인들이 할 수 있는 온갖 사소함을 즐기며 돌아다녔다. 다만 하나, 누나 동생이었기에 이성적 접근은 각자 내면에 묻어둔 채 붙어 다녔다. 그러한 선택은, 화자가 은행원이라는 안정된 직업을 가진 '전민호'와 결혼할 때, 그 남자에게 이별의 통고를 보다 쉽게 할 수 있는 여지를 주었다.  

 

그 남자는. '누나'가 결혼을 한다는데 무슨 말을 할 수 있으리. 화자는, 안정된 결혼까지는 좋았으나 책임감 있고 성실하나 무심심한 효자 남편과 홀시어머니와 함께 사는 신혼생활이 견딜 수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유일한 생활의 탈출구였던 동대문 시장에서 장을 보다가 그 남자의 누나를 만났고 누나는 자기 동생을 좀 만나 마음잡게 해 달라는 부탁을 하였다. 이제는 뭐 새댁이니 또 누가 말릴 소냐. 하여 화자는 친척 동생 정서 안정과 더불어 시장도 보고 시집살이 갑갑증도 풀 겸 시시로 동대문 시장 구석구석을 그 남자와 누볐다.

 

급기야는 당일치기가 될지 더 이상이 될지 모를 장거리 여행도 계획하는데 하필 그 꽃 같은 날에, 나중에야 안 일일지만, 그 남자는 병이 나고 말았다. 그 남자가 끝끝내 약속 장소에 안(못)나오는 바람에 화자는 그제야 정신이 들었다. 그 후 때마침 임신도 하고 줄줄이 애새끼들을 '까면서' 현실에 적응해 갔다. 그게 다? 그것이 다 이면 50년 묵힐 필요가 없으렷다. 그 남자에 대한 얘기는 물론, 계속 이어진다. 더 있다. 눈물 없이 읽을 수 없다.

 

전후의 폐허에서 맨주먹으로 일어선 우리네 할머니들의 이야기

 

아무튼 이 책은 첫사랑 그 남자를 추억하는 책이다. 그러면서 동시에 전후의 폐허를 맨주먹으로 헤쳐나온 우리 할머니들의 과거이기도 하다. 첫사랑만 풀어내도 누가 뭐랄 사람 없건마는, 작가는 첫사랑을 말함과 동시에 첫사랑 남자와 화자가 살았던 시대의 이모저모를 상세히 묘사함으로써 주책없이 사랑 보따리를 너무 푼 것 아닌가 수위조절을 하는 듯도 하다.

 

덕분에 지금의 여든 혹은 아흔의 여인들이 남편과 아들을 전쟁에 빼앗기고만 상황 속에서도, 맨땅에 헤딩하며 온몸으로 살아낸 흔적을 생생히 느낄 수 있다. 하여, 이 책을 읽고 있노라면 지난 반세기 서민들 생활상의 이모저모가 한편의 장구한 다큐멘터리를 보는 느낌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그리고 미군에게 몸을 팔 수 밖에 없었던 춘희를 통해서, 베트남전에 돈벌이를 갔다 온 후 삶이 기구해진 친정 조카 광수를 통해서 또 다른 전쟁의 후유증을 증언하기도 한다. 연거푸 장애아를 낳고, 정신을 똑바로 차려도 모자랄 판에 원인을 찾는답시고 방황으로 일관하는 광수의 삶은 처음에는 한심해 보였으나 나중에는 그만의 일리가 있었다. 그러나 작중 화자는 어영부영 외면했는데 그 또한 우리들의 무관심을 상기시켜 주는 것은 아닐는지.  

 

춘희의 경우, '민간인 복장으로 시골로 식품 구하러 가다가 미군 비행기의 기총소사를 맞고 즉사한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다 늙어서야 학문하는 그녀의 조카에게 처음으로 털어 놓는다. 마땅히 가해자들에 그 죄를 물어야 함에도 피해자가 평생을 함구한 것이다.

 

아버지의 부재 속에서 동생들 줄줄이 딸린 집안의 장녀였던 춘희는 동생들과 식구들 먹여 살리기 위하여 미군들에게 몸을 팔았다. 그러면서 회고하기를 나 자신만을 위해서라면 그런 짓을 못했을 것이라고. 아무렴, 그 시대는 그렇게 꽃같은 소녀들에게 그런 선택을 하게도 만들었다.

 

'섹스는 원 없이 해봤어도 남자하고 한 번도 사랑을 해본 적이 없다'고 다 늙은 춘희는 장거리 국제전화로 화자에게 넋두리를 한다. 연인의 묘지를 매일 찾는 잘생긴 미국남자를 훔쳐보며 저런 남자와 연애한번 해봤으면 원이 없겠다고 말하면서도 '더럽게' 늙은 자기 꼴이 흉해 눈길 한번 마주 칠 수 없어한다.

 

고 박완서 작가가 그토록 새침과, 세련 구덩이에 빠진 센스 쟁이 우후훗! 이었다는 것은 생각 못한 보너스였다. 이 책은 원래 단편으로 먼저 발표한 것을 장편으로 늘인 것인데 그 부풀린 솜씨가 가히 탄복할 만하다. 소설집 <친절한 복희씨>에 실려 있는 동명의 단편도 물론 새침하고 깔끔하다.


그 남자네 집

박완서 지음, 현대문학(2008)


태그:#박완서, #그 남자네 집, #첫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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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간이라는 말이 좋습니다. 이 순간 그 순간 어느 순간 혹은 매 순간 순간들.... 문득 떠올릴 때마다 그리움이 묻어나는, 그런 순간을 살고 싶습니다. # 저서 <당신이라는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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