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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혜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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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23일부터 24일까지 1박 2일 일정으로 주문진부터 정동진까지 걸었다. 바다를 따라 걸을 작정이었는데, 강릉항부터 염전항까지는 바다를 따라 걸을 수 있는 길이 없어 내륙 안쪽으로 빠졌다가 하시동에서 다시 바닷길로 접어들었다. 날씨가 풀려서일까, 봄기운이 세상을 뒤흔들어서일까, 바다를 찾은 사람들이 평소보다 많았다. 사람들 옷차림이 가벼운 것을 보니 바다에도 봄이 왔구나, 싶었다. 이렇게 날씨 좋은 봄날, 집안에만 틀어박혀 있는 건, 계절에 대한 예의가 아니지.

나 역시도 비가 그치기를 기다려 배낭을 꾸린 뒤 집을 나선 참이 아니던가.

강남고속버스터미널에서 강릉행 고속버스를 탔고, 강릉에서 주문진 행 버스로 갈아탔다(동서울터미널에서는 주문진행 버스가 있다). 그리고 낮 12시가 채 되기 전에 주문진에 도착했다. 생선구이로 점심식사를 한 뒤, 주문진 해변으로 갔다. 그리고 그곳부터 걷기 시작했다. 빨간색 등대와 하얀색 등대가 멀리서 유난히 두드러지는 것은 하늘이 맑고 푸르렀기 때문일 것이다.

갈매기떼
 갈매기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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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실히 날씨 때문인 것 같다, 갈매기들이 수다스럽게 떠들어댄 것은. 주문진에서부터 갈매기들이 무리지어 날았다. 한두 마리가 아니라 수십 마리가 떼 지어 하늘을 날면서 떠들어대는데 어찌나 시끄럽던지, 귀를 막고 싶을 지경이었다. 한데 이날, 어디를 가든 바닷가에는 갈매기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얘들도 봄이 오는 게 좋은가 보다. 그러니 모여서 수다를 떠느라고 오리새끼들처럼 꽥꽥거리는 것이겠지.

바다를 따라 걷는 길, 제비꽃이 피었고, 민들레가 피었고, 자목련이 진다. 남쪽 지방에 머물던 봄이 본격적으로 바다를 따라 북상하고 있었던 것이다. 덕분에 묵직한 등산화를 신었음에도 내딛는 걸음이 평소보다 가벼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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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문진에서 정동진까지 바다를 따라 걷는 길옆에는 소나무가 울창한 숲이 많다. 그래서 소나무 숲길 사이를 걷기도 했다. 그 길은 걷다보면 가끔 '바우길' 표지판이나 바우길 리본과 마주친다. 길의 일부가 바우길 구간에 속하기 때문이다. 가끔은 바우길 표시를 따라 걷기도 했다.

이번에는 강릉 관광지도에 유일하게 등장하는 카페 <보헤미안>에 들를 작정이었는데 해안을 따라 걷다보니 그냥 지나치고 말았다. 커피 명장 박이추씨가 쥔장인 <보헤미안>은 바닷가에서 벗어난 곳에 자리를 잡고 있어 그곳으로 가려면 다른 길로 접어들었어야 하는데, 바다를 바라보면서 걷다가 그만 까맣게 잊고 말았던 것이다. 지나고 나니 생각났다. 그것도 바닷가를 따라 줄지어 들어선 카페들을 보고서야. 그렇다고 지금까지 걸어온 길을 되짚어 가고 싶지 않았다. 다시 돌아가서 길을 찾으려면 최소한 30분 이상은 걸어야 한다. 할 수 없지. 꼭 <보헤미안>에 들러 쥔장이 직접 내려주는 커피를 마시려고 했는데, 인연이 아닌가 보다. 인연은 물처럼 흘러야 아름답게 남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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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문진 항에서 강릉항까지 이어지는 해변에는 카페가 일일이 다 셀 수 없을 만큼 많다. 특색 있는 건물 모양인 카페도 있고, 작고 허름해 뵈는 카페도 있고, 아늑하면서 분위기를 낼 수 있는 카페도 있다. 언제 이렇게 많은 카페가 들어섰을까, 궁금할 지경이다. 이러니 강릉에서 커피 축제를 하기 시작한 것일 게다. 2010년 10월에 강릉 일대에서 두 번째 커피 축제가 열렸다.

카페가 이렇게 많은데 단 한 곳도 들르지 않고 그냥 가는 건 예의(?)가 아닐 것 같아 사천진 해변에서 한 카페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쉘리스 커피(Shelly's Coffee) 카페는 2층 건물인데,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니 은은한 커피향이 감돌고 있었다. 1층 창가에는 둥근 탁자가 2개뿐이었다. 그래서 이 집을 찾은 손님들은 대부분 나무 계단을 올라 2층으로 간다. 나는 1층에 자리를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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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의자에 배낭을 내려놓고, 카메라를 탁자에 내려놓고, 장갑마저 벗었다. 좁은 창으로 바다가 보인다. 맑은 하늘 아래 바다는 푸른빛이었다. 가까이서 보는 바다와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보는 바다는 확실히 느낌이 다르다. 특히 유리창을 사이에 두고 보는 바다는 조금 더 신비스러워 보인다. 그 바다 위를 갈매기들이 무리지어 날고 있었다.

종업원이 메뉴판을 가져다주어서 열심히 들여다 보았다. 커피 종류, 참으로 많다. 메뉴판을 정독한 뒤 결정한 커피는, '오늘의 커피'. '오늘의 커피'가 코스타리카 란다. 그럼, 그걸로….

커피에 가볍게 곁들일 쿠키도 주문했다. 유기농에 핸드메이드란다. 오렌지 맛이 진하게 감도는 쿠키였다. 커피는 기대 이상이었다. 1층은 카운터 겸 커피를 만드는 주방이 있어서 커피를 마시면서 쥔장이 커피를 내리는 모습을 슬쩍슬쩍 곁눈질하다가 나중에는 아예 대놓고 구경했다. 커피를 갈아서 정성스럽게 내리는 모습을 보는 재미가 아주 쏠쏠했다. 아주 괜찮은 구경거리였다. 커피 한 잔을 만들어 내는 것이 쉽고도 간단한 것 같은데, 꼭 그렇지만도 않았다.

이 집, 손님들의 발길이 제법 잦았다. 출입문은 쉬지 않고 열렸고, 손님들은 나무계단을 올라갔고, 내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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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키를 곁들여 커피를 다 마시고 난 뒤, 창가를 바라보면서 앉아 있으려니 종업원이 다가와 묻는다. 커피를 더 마시겠느냐고. 리필을 해주겠다는 거다. 향기로운 커피를 한 잔 더 마실 수 있다는데 마다할 내가 아니지.

리필 해주는 커피도 처음 주문했을 때처럼 커피를 갈아서 핸드 드립으로 만들어서 빈 잔에 채워준다. 덕분에 맛있는 커피를 두 잔 마셨다. 이 집, 생긴 지 3년쯤 되었단다.

커피를 마신 뒤, 다시 길을 나섰다. 겨우내 짙은 잿빛이었던 하늘이 말갛게 개인 풍경은 눈길을 잡아끌기 좋았다. 이따금 바닷가 모래밭을 걸었고, 이따금 모래밭을 빠져나와 해안도로를 걸었다. 그리고 길옆을 따라 이어진 소나무 숲으로 들어가 솔향기를 맡으면서 걷기도 했다. 길은 언제나 그렇듯이 끝없이 이어진 것처럼 보였고, 내가 걸어야 할 길을 보고 있노라면 가슴이 뛰었다. 길은, 그렇게 나를 부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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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이라서 그런가, 경포해변에는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경포해변에는 외지사람들이 너무 많이 와서 강릉사람들은 이곳에 거의 가지 않는다고 한다. 강릉사람들은 회를 먹으려면 안목해변으로 간다던가. 강릉사람이 한 말이다.

그 안목해변에 도착한 것은 오후 6시가 훌쩍 넘은 시간이었다. 고작 6시간 정도만 길 위에 있었을 뿐인데 발에서 후끈거리면서 열이 난다. 오랫만에 새로 꺼내 신은 신발 때문인가 보다. 오늘은 이곳에서 하룻밤을 자야 할 것 같다. 숙소를 찾아들기 전에 저녁식사부터 해야겠다, 고 작정하고 식당을 물색했다.

해변에 가장 많은 식당은 당연히 횟집이다. 여길 보아도 횟집이요, 저길 보아도 횟집이다. 날이 어두워지기 시작하자 가게마다 간판의 불을 화려하게 밝힌다. 가볍고 간단하게 한 끼를 해결할 수 있는 식당은 보이지 않았다. 하긴 바닷가를 찾는 관광객들이라면 가장 먼저 생선회를 떠올릴 것이며, 횟집을 찾아가겠지. 길 위에 서서 적당한 식당을 가늠하다가 크지도 작지도 않은 규모의 횟집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손님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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횟집 쥔장은 혼자 먹을 수 있는 음식이라면 회덮밥이나 물회가 좋을 것이라고 했다. 나는 회덮밥을 주문했다. 큼직하게 썬 생선회가 듬뿍 들어간 회덮밥이었다. 값이 조금 비싼 게 흠이지만, 맛은 좋았다. 생선회가 씹히는 맛이 괜찮았다.

회덮밥을 먹고 있자니 이태 전에 남해 미조항에서 먹었던 회덮밥이 떠올랐다. 민박을 겸한 횟집이었다. 그 집에서 가장 싼 음식이 회덮밥이었다. 혼자 먹을 수 있는 유일한 메뉴이기도 했다. 싼 음식을 먹으려면 백반 집이 있으니 그곳으로 가라고 종업원이 말했지만(숙박비를 깎아 달라고 해서 그랬던 거 같다) 나는 그 집에서 회덮밥을 주문했다. 그리고 깜짝 놀랐다. 1만 원짜리 회덮밥에 딸려 나온 음식이 너무 푸짐했던 것이다.

큼직한 파전 한 장이 나오더니 멸치 튀김이 뒤따라 나왔다. 마침 싱싱한 멸치가 들어와서 튀겼다면서 쥔장이 특별히 내놓았던 것이다. 그것만 먹어도 배가 부를 판인데 회덮밥에 제대로 끓인 생선매운탕까지 곁들여졌다. 거의 냉면 대접만한 뚝배기에서 자글자글 끓는 매운탕을 보고는 1만 원이 결코 비싼 값이 아니라는 생각을 했더랬다. 5월에는 미조항에 멸치잡이 배가 흥청거리면서 들어올 텐데, 다시 가고 싶다.

한데, 지금 먹고 있는 회덮밥은 그보다 값이 비싼데도 회덮밥 그릇 달랑 하나다. 몇 가지 반찬만 딸려 나왔다. 확실히 남도지방의 인심이 넉넉하다. 여행을 다니다보면 그런 생각이 저절로 든다. 물론 그 사이에 물가가 오르기도 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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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목해변의 비싼 물가는 모텔에서 다시 한 번 확인했다. 방값을 듣고 허거덕, 놀랐다. 지금까지 여행하면서 잔 모텔 중에서 가장 비쌌다. 다른 곳을 찾아가야 하나, 하는데 쥔장이 말한다.

"여긴 어딜 가나 똑같아요. 주말이잖아요."

그 말에 발도 아프고 해서 그냥 묵기로 했다. 밤에 남편과 통화를 하면서 방값이 너무 비싸다, 고 툴툴거렸더니 남편이 웃는다. 집 나간(?) 마누라가 여행지에서 전화로 모텔 방값이 비싸다고 불평을 하니 웃기기도 하겠지. 그래도 이 방, 바다가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전망이 좋은 방이었다. 발코니 창문을 열고 바깥을 내다보니 어둠이 내려앉기 시작하는 바다에서 끊임없이 밀려드는 파도소리가 너무나 잘 들렸다. 그 소리가 너무 듣기 좋아 자정이 넘은 시간까지 문을 열어두었더랬다.


태그:#도보여행, #강원도, #주문진, #사천진, #안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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