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비혼 운동을 통해 비혼이라는 정체성을 만나게 됐다"는 언니네트워크 활동가 더지
 "비혼 운동을 통해 비혼이라는 정체성을 만나게 됐다"는 언니네트워크 활동가 더지
ⓒ 송민성

관련사진보기


'비혼', 말 그대로 결혼하지 않은 삶의 상태를 일컫는다. 어떤 사람들은 이럴 때 '미혼'이라는 단어를 쓰기도 한다. 같은 뜻이다. 다르다면 ㅁ과 ㅂ의 차이, 기껏 해봐야 두 획 정도. 쏘 심플. 그러나 이 단어들이 기반하고 있는 현실이 심플하지 않은 게 문제다.

'미혼'이라는 단어는 아직 결혼하지 않은 상태라는 뜻으로 '우린 모두 결혼제국으로 떠나야 한다'는 당위를 전제로 한다. 미혼의 현실은 이렇다. 특정 나이를 결혼 적령기라 일컫고 그 시기까지 결혼하지 않은 여자들은 '노처녀'라는 낙인이 찍힌다. B사감의 노처녀 히스테리와 같은, 각종 음해와 비웃음도 부담 없이 안겨진다.

결혼하지 않으면 무언가 결함있는 것으로 치부되고 '완전한 성인'으로 쳐주지도 않는다. 여자 나이는 24일에 제일 잘 팔리고 30일 지나면 폐기처분하는 크리스마스 케이크 같다는 둥 무슨 일이 있어도 서른 되기 전에는 가야 한다는 둥 슬픈 헛소리가 진실처럼 오간다.

그리하여 똑똑하고 멋진 여자들이 '너무 부족하지도 과하지도 않은 적당한 짝'이 되기 위해 약한 척, 모르는 척 해대기도 한다. 이미 그 자체로 충분히 아름다운 여자들이 결혼 시장에서의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성형과 다이어트를 하는 데 제 인생을 쏟는 경우도 있다.

적령기를 넘기지 않기 위해 크게 나쁘지 않은 사람과 화급히 손가락을 걸어버리는 이도 있는데 바로 지금 여기에서 비혼의 삶에 대해 이야기해야 하는 이유는 너무도 명백하다. 결혼이라는 견고한 벽이 내가 가지고 있는 수많은 선택지 중 하나일 뿐임을 인식하는 것, 그리하여 다른 삶을 상상하고 만들어보는 게 어떻게 하면 결혼할 수 있을지 골몰하는 것보다 나를 더 행복하게 하는 일일 수 있다.

여성주의 모임 '언니네트워크'의 활동가 더지(별칭, 30)님을 마주한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그 자신도 비혼 여성으로 비혼 운동을 하고 있는 서른 살 그이는 비혼의 삶을 둘러싼 다양한 모색과 실험을 활발히 시도하고 있다.

"나는 모태 비혼... '결혼'이 인생의 계획이었던 적 없어"

차별금지법 제정 집회에 참석한 더지 활동가
 차별금지법 제정 집회에 참석한 더지 활동가
ⓒ 더지

관련사진보기

- 언제부터 비혼으로 살아야겠다고 생각했는지.
"사실 나는 모태 비혼이다. 날 때부터 비혼으로 태어난 것 같다(웃음). 어렸을 때부터 결혼하고 싶다는 생각을 안 했다. 내 짝은 어디에 있을까 같은 생각도 해본 적 없다. 대학 시절 오래 사귄 애인이 있었지만 결혼이 내 인생의 계획이 된 적은 없었다. 비혼의 삶을 선택했다기보다 비혼 운동을 통해 비혼이라는 '정체성'을 만나게 되었다는 것이 더 적절한 표현일 듯하다.

대학 시절까지 나의 키워드는 가족으로부터의 독립이었다. 그 바탕에는 나만의 주체성을 갖고 싶다는 욕구가 깔려 있었을 테고, 그것이 나이가 들면서는 비혼이라는 삶의 형태로 설명되는 것이다. 요즘은 그런 순진한 질문은 줄었지만 비혼이라고 하면 연애나 섹스도 안 하는 걸로 오해하는 분들도 적지 않았다. 분명히 말하지만 나는 연애를 굉장히 좋아한다(웃음). 사실 조금만 더 생각해보면 결혼이야말로 연애와 섹스 라이프를 포기하는 건데(웃음), 물론 그런 이유로 비혼을 선택한 것은 아니다."

- 비혼으로 산다는 것과 비혼 운동에 뛰어드는 것은 또 다른 이야기일 수 있다. 어떤 마음에서 비혼 운동을 본격적으로 하게 되었는지 궁금하다.
"대학에서 여성모임 같은 걸 하면서 페미니스트로 자랐다. 대학 때 인턴을 했던 회사에서 남자 직원들이 나한테 '학교 다닐 때 만났던 이상한 페미들' 어쩌고 하는 얘기를 많이 하더라. 나한테 페미(니스트) 냄새 나나?(웃음) 그들에게 페미니즘 운동이 그렇게 밖에 인식되지 못하는 게 무지 억울했다. 그래서 여성학 대학원으로 가야겠다고 준비하던 중에 언니네트워크에서 활동하기 시작했고, 2회 비혼여성축제 기획단에서 활동을 시작한 것이 지금에 이르렀다.

비혼여성축제는 비혼식을 하고 비혼 선언을 하는 등의 의례를 만들면서 비혼에 대해 다시 보게 만드는 역할을 했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거창하게 얘기하지만 사실 시작은 좀 단순했다. 비혼들과 어울려 살며 우리만의 하위문화를 어떻게 만들고 좀 더 재미있게 살까, 이 정도의 고민이었다. 그러다 가족구성권 연구모임 등에 참여하면서 점차 고민의 폭이 넓어지기 시작했다. 요즘은 비혼이 모든 사회 문제와 연결되어 있다는 점과 비혼 운동을 누구와 함께 해나갈 수 있을 것인가를 주로 고민하고 있다."

- '스무살에 대학을 가고 졸업하면 대기업에 취직을 하고 몇 년 후에는 결혼하고 그 다음에 아이 낳고…' 같은 지루한 생의 시나리오가 강박처럼 작용하고 있는 세상에서 사실 비혼의 삶은 인정이나 이해를 얻기가 쉽지 않다. 특히 가족들에게는 더더욱. 적당히 눙치고 넘어갈 수도 없고(웃음).
"가족들과의 소통은, 참 어렵다. 지난해(2010년)에 언니가 결혼을 했는데 그때 속으로 얼마나 안심을 했는지 모른다. 그래 언니가 결혼을 했으니까 나에게 오는 압박이 줄어들겠지 뭐 이런 심산으로(웃음). 그런데 웬 걸, 엄마는 그저 숙제 2개 중 하나를 해치운 것뿐이었다. 하나의 숙제가 여전히 남은 상태인 것이다. 엄마한테 그 숙제 안 해도 된다고 아무리 말해도 생각 자체를 바꾸기는 쉽지 않은 것 같더라."

- 결혼하라는 잔소리가 이어진다거나?
"아직은 어리다고 생각하셔서인지 본격적인 압박은 없다. 최근에는 경제적으로 풍요롭지 못하다는 점도 하나의 요인일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한다. 가난한 집의 비혼 딸은 정말 답답한 거지. 그래선지 엄마가 결혼자금을 벌어놔야 한다는 말씀을 입버릇처럼 하신다. 워낙 돈이 많이 드는 일이니까. 나도 결혼자금 모으는 일에 함께 하길 바라시기도 하고. 엄마들 사이에서도 자식이 결혼하지 않았으면 또래 집단에서 소외되고 그런 게 있다더라. 언니라도 결혼해서 친구들과 이야기할 거리가 생겼으니 다행이라고 해야겠지(웃음)."

"비혼이나 만혼은 이미 '만연한' 사회 현상"

- 그럴 때 현명하게 대응하는 방법이 있는지.
"이런 인터뷰를 많이 하는 거다, 빼도 박도 못하게(웃음). 언니네트워크에서 활동하면서 여기저기 인터뷰를 하고 기고를 하기도 했는데 엄마가 은근 그런 걸 좋아하시더라. 최근에 인터넷을 배우기 시작하시면서 언니네트워크 홈페이지에도 들어오신다. 점차 나의 정체에 대해 알아가시는 거지. 엄마도 생각이 많으실 텐데 아직은 모르는 척하고 있다.

비혼이 단순히 엄마와 나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인 흐름이고 중요한 변화라는 사실을 천천히 받아들이시길 바라고 있다. 사실 주변만 봐도 금방 알 수 있지 않나 내 친구들만 해도 결혼 안 한 사람들이 거의 절반 정도고 엄마 친구들 자식들을 봐도 비슷하다. 비혼이나 만혼은 이미 '만연한' 사회 현상이다."

- 비혼에 대한 큰 편견 중 하나가 '가난하게 살다 외롭게 죽는다'는 것이다. 남편도 자식도 없으면 내가 늙고 병들었을 때 누가 돌봐주겠냐고 진심으로 걱정하는 사람도 있더라.
"남편·자식 있다고 꼭 돌봐주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웃음). 사실 노후 대비는 비혼뿐 아니라 모두에게 중요한 과제다. 특히나 비혼들에게는 혈연가족의 권리만 인정하는 현행 법체제는 상당히 위험하다. 나만 해도 원 가족과 떨어져 살고 있고 당장 아프면 가족보다 친구와 애인이 먼저 달려와줄 텐데 이들은 나에 대한 어떤 권리도 인정받지 못한다. 정작 나와 생활을 함께하고 있는 공동체는 배제되는 것이다.

비혼 여성에게는 연인, 공동체 등의 다양한 관계망이 있을 수 있는데 단순히 결혼하지 않았다, 혈연 관계가 아니라는 이유만으로 그 관계의 진정성을 끊임없이 의심받는다. 결혼 또한 관계 맺는 방식의 하나에 불과할 뿐이고 수많은 결혼이 지속성을 가지지 못하는데도 이런 편견은 굉장히 확고하다. 이러한 관계망을 인정받을 수 있도록 하는 노력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꼭 파트너십이 아니더라도 다양한 형태가 있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생활공동체를 인정한다거나 나보다 어리면 양자로 입양할 수 있는 법의 틈새를 노려 서로서로 입양한다거나 하는(웃음). 실제로도 그러한 움직임들은 점차 활발해지고 있다. 제주, 전주 등지에 비혼 공동체가 있고, 마포레인보우주민연대처럼 지역 공동체에 기반한 주민들의 모임이나 살림의료생협처럼 특화된 공동체도 생겨나고 있다."

- 흥미로운 것은 또 다른 한 켠에서는 비혼이 "돈 있고 배운 여자들의 이기적인 취향"이라고 여기기도 한다는 점이다.
"골드미스쯤으로 생각하는 거지. 난 골드미스가 전혀 아닌데. 이른바 알파걸들이 '나 혼자서도 잘 살 거야'하는 것만 비혼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이유로 스스로를 비혼이라 명명하기가 두렵기도 하고 뭔가 적절치 않아 보이기도 한다. 그러다 보니 비혼에 대해 의심의 눈초리를 던지는 사람들도 있고. 고학력 페미니스트들의 말장난 아니냐고 하는 사람도 있더라. 그냥 라이프 스타일 정도로 가볍게 여기는 사람들도 적지 않고.

내가 하고 있고 관심 있는 비혼 운동은 단순한 라이프 스타일이나 취향의 문제로서가 아니라 지금 이 시대의 정치, 경제, 사회 구조가 만들어낸 사회 현상이라는 전제를 공유하면서 비혼이 보편적으로 통용되는 언어가 될 수 있길 바란다는 점에서 좀 다른 것 같다."

"비혼, 보다 많은 사람들이 다양하게 참여하는 삶의 방식"

"엄마가 비혼이 사회적인 흐름이고 중요한 변화라는 사실을 천천히 받아들이시길 바란다."
 "엄마가 비혼이 사회적인 흐름이고 중요한 변화라는 사실을 천천히 받아들이시길 바란다."
ⓒ 송민성

관련사진보기

- 골드미스 따위의 오해와 별개로 비혼의 삶에서 경제적인 부분은 매우 중요하지 않은가.
"그렇다. 사실 그런 점을 고려하자면 난 이 인터뷰를 하면 안 된다(머리를 싸매며). NGO에서 일하고 있고 대학원 등록금 갚느라 허덕이고 있고, 한마디로 비극적인데(웃음). 그런데 이것 역시 나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이 시대 청년들이 모두 공유하고 있는 문제라고 생각한다. 열심히 일하면서 적은 돈이지만 월급을 꼬박꼬박 받고 있는데도 대출금 상환하기도 벅차다. 더욱 가난해지는 악순환이 계속된다. 비단 비혼에게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이처럼 양극화되는 경제 구조가 비혼의 삶을 더 열악하게 만든다는 사실이다.

지금 비혼의 나이 어린 여성이 우리 사회에서 기대할 수 있는 복지 제도가 무엇이 있는가? 그야말로 아무 것도 없다. 연소자일수록, 여성일수록 노동에 대한 경제적 보상은 적다. 전세자금 대출도 결혼을 하지 않으면 35세 이전에는 받을 수조차 없다. 그러다 보니 적은 돈을 버는 사람이 다달이 큰 금액의 현금을 주거 비용으로 쓸 수밖에 없다.

유독 여성들을 위한 대출 광고가 많아지고 있는 것도 동일선상에 있다고 본다. 여성들을 위한 대출이 활발하다는 것은 그만큼 젊은 여성들이 경제적으로 열악하고, 제도적으로 구제나 보조 받을 수 있는 수단이 아무것도 없다는 현실의 반증이다. 돈을 끌어 모으기가 힘들다는 것이다. 이런 비혼 여성들을 위한 최소한의 복지망들이 꼭 필요하다.

여성주의 펀드를 만들자는 의견도 있고, 다양한 방식의 경제 공동체를 만들어보자는 의견도 있다. 뭐든 다 해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실제로 외국에서는 청년들이 사회 생활에 필요한 기본 자금을 부모 세대에서 적금 형태로 모아두었다가 제공하는 사례들이 있다고 한다. 지금 우리 청년들에게도 그 같은 형태의 경제적 지원이 너무나 절실하다. 집값, 밥값 고민하는 시간에 안정적으로 자기의 성장과 세상의 변화에 대해 고민하고 투자할 수 있다면 이 세상이 얼마나 달라질까?"

- 할 일이 너무 많아서 심심할 틈이 없겠다(웃음). 최근에는 비혼여성축제에 이어 열린 강좌 '비혼 제너레이션을 말하다'를 기획, 진행 중인 것으로 알고 있다.
"비혼 강좌는 예상보다 훨씬 호응이 높아 놀라고 있다. 지난 8일 <오빠는 필요없다>의 저자 전희경님의 강의로 시작해 매주 목요일 4회에 걸쳐 진행하고 있는데 수강생들의 반응이 뜨거워서 매우 뿌듯했다. 그만큼 비혼에 대한 고민이 보다 구체적이고 생생해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번 비혼 강좌는 '비혼 PT 나이트' 프로젝트의 일환이다. 비혼 PT 나이트란 기존의 결혼·가족 제도를 벗어나 다른 형태의 가족과 비혼을 지향하는 주체들이 시도하고 있는 구체적이고 가시적인 삶의 모델들을 PT 발표를 통해 공유하는 프리젠테이션 대회다. 이를 위해 4월에 전문가 강의를 진행한 것이고 6월에는 예비 스피커들을 모아 사전 프로그램인 파자마 워크숍을 개최할 예정이다. 이를 바탕으로 7월 PT 나이트를 개최하는 장기 거대 프로젝트다."

- 마지막으로 비혼 여성으로서 그리는 꿈이 있다면?
"나는 비혼이 고립되거나 열악하기보다는 보다 많은 사람들이 다양하게 내 삶에 참여하는 삶의 방식이라고 생각한다. 이미 비혼과 만혼은 사회에 만연한 일반적인 현상이다. 결혼하지 않는, 하려 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다는 것은 이미 우리의 승리를 가리키고 있다(웃음). 비혼을 둘러싼 다양한 상상들이 만들어지는 데 함께하는 사람이면 좋겠다."


태그:#언니네트워크, #비혼, #언니네, #여성운동, #결혼
댓글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1,0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