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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23일은 유네스코가 정한 '세계 책의 날'이다. 정확하게는 '세계 책과 저작권의 날'. 매년 그래왔듯이 올해도 출판사나 서점, 도서관들이 책을 더 많이 읽자는 행사나 캠페인을 벌인다. 이와 비슷한 사례로 우유를 많이 마시자는 캠페인도 있었고, 쌀 소비를 늘리기 위해 아침을 먹고 다니자는 TV 공익광고를 본 적도 있다.

하지만 책이라고 해서 다 좋은 책이고, 또 그 책들을 다 읽어야 한다는 법은 없다. 그럼 '좋은 책'이란 무엇일까? 이 질문에는 좀 더 다양한 기준이 필요할 것 같다. 왜냐하면 책을 둘러싼 독자, 유통업체, 출판사 그리고 책을 만드는 출판노동자들에게 '좋은 책'이란 각기 다른 의미를 갖기 때문이다.

우리가 독자로서 친구나 동생에게 "이 책 좋아, 한번 읽어봐"하고 권할 때는 책의 내용이 충실하고 재미있다는 뜻일 거다. 하지만 서점에서 '좋은 책'이란 일단 판매고가 높은 책 아닐까. 그리고 대부분의 평범한 출판사에서 '좋은 책'이란, 앞의 두 가지 조건을 다 갖추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출판노동자들에게 '좋은 책'이란 좀 복잡한 의미가 있다. 바로 책을 만드는 과정에 바람직한 노동조건이 갖추어져야 비로소 "좋은 책"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아동 노동을 착취해서 만든 축구공이나 농민들이 먹는 주곡을 밀어내고 심은 커피가 '좋은 상품'이 될 수 없는 것처럼, 책도 하나의 상품이기 때문에 그 생산 과정의 윤리성을 따져봐야 한다. '좋은 책'의 기준이 노동조건의 영역까지 포함하도록 확장된다면, 우리 독자들은 더욱 재미있고 유익한 책들을 만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책이라는 매체의 생산과정에는 얼마나 바람직한 노동환경이 갖춰져 있을까?

영화 <질투는 나의 힘>의 한 장면. 박해일은 출판사 편집자, 배종옥은 사진작가 역을 연기했다.
 영화 <질투는 나의 힘>의 한 장면. 박해일은 출판사 편집자, 배종옥은 사진작가 역을 연기했다.
ⓒ 청년필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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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장근로, 고용불안, 외주화... 출판노동자는 힘들다 

단순하게 말해서, 책은 출판사에 근무하거나 프리랜서(외주)로 일하는 출판노동자들이 만든다(물론 그 밖에 수많은 과정에 종사하는 노동자들이 있지만, 지면과 경험의 한계 때문에 다 옮기지 못함을 양해 부탁드린다). 책을 만드는 각각의 단계에는 대개 마감이 정해져 있다. 만드는 과정에서 많은 변수가 있을 수밖에 없는 일에 마감을 정해두면, 그 변수들이 생길 때마다 노동자들은 일을 더 해서 마감을 맞추는 수밖에 없다.

그러다 보니 야근에 주말근무까지 하게 되는 일이 빈번하다. 그러고도 일을 다 못하면 교정지를 집에 싸들고 들어와 잠들기 전까지 들여다볼 때도 있다. 퇴근시간, 파주출판단지를 오가는 버스를 탄 사람 중에 노란 봉투를 들고 있는 사람은 십중팔구 일거리를 싸들고 집에 들어가는 출판 편집자라고 보면 된다.

그렇다면 이런 시간 외 노동에 대한 보상은 어떨까? 현재 근로기준법에 정해진 대로 시간 외 수당을 주는 것으로 알려진 출판사는 한두 곳밖에 없다. 이 기사가 나가고 나서 "우리도 시간 외 수당 줍니다"하고 나서는 출판사가 있어서 정정보도를 낼 수 있으면 좋겠다.

저임금에 격무라 해도 책 만드는 일은 그 재미와 보람이 남다르기 때문에 여전히 수많은 출판노동자들이 자신의 직업에 열정을 바치고 있다. 하지만 출판노동자들의 일자리는 그리 안정적이지 못하다. 요즘 불안하지 않은 일자리가 어디 있겠냐마는 출판사는 근로기준법의 적용을 받지 않는 5인 미만의 영세 사업장이 많다.

노동자가 딱 5명인 어느 출판사의 사장님은 구두로 직원을 해고했다가, 근로기준법상 해고 제한 조항에 저촉된다는 항의를 받았다. 그러자 슬그머니 다른 직원 한 명에게 거짓으로 사표를 쓰라고 해놓고는 4인 사업장이 되었으니 괜찮지 않냐고 했다.

규모가 큰 출판사라고 해서 사정이 별반 다르지는 않다. 아직도 사장님 말 한마디로 노동자가 짐을 싸는 회사가 있고, '시용'이라는 제도를 악용해 시험 삼아 채용했다가 맘에 들지 않으면 6개월 후에 적당히 구실을 붙여 쫓아내는 편법을 쓰는 곳도 있다.

출판사와 개인사업자 자격으로 계약을 맺고 일하는 외주출판노동자들의 상황은 출판노동자 중 가장 어렵다. 이들은 출판계의 비정규직이다. 어느 큰 자동차 회사에서 오른쪽 문은 정규직이 달고, 왼쪽 문은 비정규직이 단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책도 마찬가지다.

출판사에 있는 편집자나 집에서 일하는 외주 편집자나 책상 위치만 다를 뿐 하는 일은 똑같을 수 있다. 특히 출판사에 고용돼서 일을 하다가 '독립(?)'한 뒤, 역시나 그 출판사의 일을 맡아서 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자신이 다니던 회사에서 일을 받아 예전에 받던 월급만큼 벌려면, 정말이지 아주 어렵다. 왜냐하면 작업비가 턱없이 낮기 때문이다.

1997년 IMF 때 출판사를 그만두고 외주 편집자로 살아온 어느 출판노동자는 그때나 지금이나 작업비가 거의 오르지 않았다고 했다. 무려 15년 동안 매년 물가가 오르는 만큼 수입이 줄어든 셈이다. 이러한 외주출판노동자들의 열악한 노동조건을 타개하기 위해 현재 '외주노동자 실태조사'가 진행되고 있다. 그야말로 출판계의 가장 그늘진 곳을 비추는 첫걸음이다.

4월 9일 출판노동자봄소풍에 참가한 출판노동자협의회 회원들과 언론노조 출판 분회 조합원들.
 4월 9일 출판노동자봄소풍에 참가한 출판노동자협의회 회원들과 언론노조 출판 분회 조합원들.
ⓒ 언론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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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노동이 좋은 책을 만든다!"

무척 어려운 여건이지만 출판노동자들 스스로도 상황을 개선시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지난해부터 출판노동자의 삶을 바꿔보기 위해서 전국언론노동조합(이하 언론노조) 산하의 출판사 분회들과 출판노동자 단체인 출판노동자협의회(이하 출판노협)가 만나오고 있다.

현재 언론노조 산하에 있는 출판사 노동조합은 단 여섯 곳. 창비, 돌베개, 보리, 나라말, 작은책, 고려대출판부다. 그리고 지난 2009년 결성된 출판노협은 매월 정기모임을 비롯한 각종 소모임 활동을 위주로 출판노동자들이 모일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가고 있다.

작년 가을부터 언론노조 산하 출판사 노동조합과 출판노협은 매달 한 차례 모여 공동의 실천을 모색하고 있다. 앞으로는 출판노동을 주제로 한 토론회와 강연회도 열고 출판노동자들에게 꼭 필요한 노동권 상식을 정리한 소책자를 만들 계획이다.

지난 9일에는 이들이 서울 인왕산으로 출판노동자봄소풍을 갔다. 지난 15일 경찰이 등산하려고 올라오는 한진중공업 해고노동자들을 가로막고 내려가도록 강요했다는 바로 그 길이다. 인왕산 오솔길에 있는 나무에는 막 새순이 돋고 있었다. 그리고 백사실 계곡에는 겨우내 얼었던 얼음이 녹아 졸졸 시냇물이 흘렀다. '좋은 책'이라는 말 뒤에 가려진 출판노동자들의 노동에도 이런 봄날이 어서 오기를.

소풍을 끝낸 출판노동자들은 단체사진을 찍으며 이렇게 구호를 외쳤다.

"행복한 노동이 좋은 책을 만든다!"

덧붙이는 글 | 강변구 기자는 출판노동자협의회(cafe.naver.com/booknodong) 대표입니다.



태그:#출판노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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