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지난 3.11 서울지역 대학생들이 반값 등록금 공약 이행하라는 집회를 열고있다
▲ 반값 등록금 공약 이행하라 지난 3.11 서울지역 대학생들이 반값 등록금 공약 이행하라는 집회를 열고있다
ⓒ 등록금 인상대학 공동행동

관련사진보기


가난한 농부의 딸로 태어났으면서 대학을 가겠다는 것은 꽤 이기적으로 여겨졌다. 혹시 서울대라면 그래도 시골에서 꽤 영광스러운 일이니 부모님은 등골이 휘더라도 어떻게든 학비를 대겠는데, 내가 들어간 대학은 세칭 명문대라고 하기엔 애매하지만 나름 좋은 대학으로 평가를 받는 곳이었다.

당시 내 성적은 서울대라면 간호학과 정도는 지원할 수 있는 점수였는데 선생님의 권고를 마다하고 굳이 사립대를 간 것을 종종 후회한 적이 있다. 그 후회의 한 이유는 국립대보다 두배 정도로 비싼 등록금이었다.

당시 우리 마을에서 서울로 유학을 간 경우는 내가 처음이었다. 언니들은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데서 그쳤고 나는 7남매가 있는 집안의 넷째딸이었다. 아버지는 '그런대로 명문'인 대학에 딸을 보내는 것은 원했으나 내가 대학을 가면 밑에 동생들도 줄줄이 대학을 보내달라고 할 터이니 무척 고민이 크셨다. 결국 아버지의 허락 조건은 등록금은 어떻게든 마련할 테니 생활비는 알아서 하라는 것이었다.  

대학생활 내내 과외가 끊길까 마음 졸였다

20년 동안 살던 갑갑한 제주도를 벗어난다는 것이 얼마나 좋았던가. 대학생이 될 수 없다면 섬에서 영영 나오지 못할까 두려웠었다. 처음 하숙집을 구하고 이불을 사러 동대문을 가고 싸구려 책상을 하숙방에 들여놓으며 나는 무척 행복했다.

다른 대학들과 달리 2월 중순에 일찍 입학식을 치르느라 춥고 썰렁한 캠퍼스를 지나면서도 나는 마음이 뿌듯했다. 그 춥고 을씨년스러운 겨울의 끝자락이 내 대학생활의 분위기가 될 줄은 모르고 말이다.

내가 대학에 입학을 한 것은 1991년도였다. 두 명이 나눠 쓰는 하숙방은 한달에 20만 원에서 25만 원 사이였다. 교통비나 식비, 책값 등을 감안하면 한달에 적어도 40만 원 정도는 필요했다. 과외를 일주일에 두 번 정도 하면 30만 원 정도 벌 수 있었다.

생활비는 무조건 내가 다 벌어야 하니까 항상 과외 두 개 정도는 꼭 필요했다. 학생이 있다고만 하면 신촌에 있던 대학에서 멀리 강동구, 송파구, 강남구까지 여기저기 다 돌아다녔다. 가르치는 기술이 부족했던지 여드름이 난 남학생이 수업 내내 졸기만 하는 모습을 볼 땐 어찌나 또 마음을 졸였던가. 과외가 끊기거나 하면 큰일이니 말이다.

방학에는 식당이나 카페 알바 일을 하며 조금 더 생활비를 모아봤지만 그렇게 돈을 버는 건 참 어림없었다. 일은 고되고 시급은 터무니없이 적었다. 게다가 알바를 하다보면 몸이 고되고 시간이 많이 들다보니 정작 공부가 소홀해지는 것도 문제였다. 결국 과외 자리를 잃지 않고 꾸준히 하는 것만이 절실했다.

곰팡내 나는 자취방, 그래도 월세는 내야 했다

그러다 어느 가을에 결국 과외가 하나도 없는 사태가 생기고 말았다. 내가 가르치던 학생의 부모가 이혼하는 바람에 그나마 하나 있던 과외도 끊긴 것이다. 하숙비라도 줄이려고 역시 가난한 다른 친구와 자취방을 하나 얻어 살아봤지만 그래도 최소한이 돈은 필요했다. 퀴퀴한 곰팡내나는 낡은 자취방 한칸이어도 월세는 꼬박꼬박 내야 했으니 말이다.

과외 일거리가 없는 그 나날이 막막하기 이를 데 없었다. 시골의 아버지에겐 이미 한 차례 전화를 드려서 딱 한 달만 생활비를 보내달라고 부탁 드렸다. 더 부탁할 염치도 없게 되었다. 딱 한 달치 생활비를 보내준 아버지의 목소리는 이미 성난 상태였다.

가을학기가 시작된 지 어느 정도 지난 터라, 휴학을 할 수도 없었다. 한학기 등록금이 고스란히 날아갈 것이니 말이다. 별별 궁리를 하고 벼룩시장 같은 생활정보지를 뒤져도 수가 나오지 않는 절박한 날들이었다. 그러던 어느날, 집으로 돌아오는 전철에서 어디 산에라도 다녀오는지 얼큰하게 한 잔 마신 모양의 아저씨가 부산 사투리로 나에게 말을 걸었다.

"아가씨는 어디 가능교?"

이대역에 내린다고 말하자 아저씨는 자기랑 차를 한잔 마시자고 하였다. 잠시 망설이던 나는 퍼뜩 떠오르는 생각이 있어 그를 따라서 커피숍으로 갔다.

집이 어디냐, 어느 학교에 다니냐. 어쩌구 저쩌구. 커피를 한 잔 앞에 놓고 아저씨는 참 물어보는 것도 많았다. 부산에서 아파트를 짓는 사업을 한다면서 본인 얘기도 하고 또 사무실이 어디쯤인지 묻지도 않은 것까지 말했다.

모르는 아저씨에게 33만 원씩 두번을 송금받다

"저기, 아저씨 저에게 100만 원만 좀 빌려주세요."

대뜸 내가 던진 말에 아저씨는 술이 확 깨는 표정이었다.

"100만 원? 뭐할라꼬?"

나는 생활비가 필요한데 과외를 구하게 되면 갚겠노라고 당장 두어 달 지낼 생활비가 필요하다고 말씀드렸다. 술김이었을까, 당돌한 여학생에 대한 호의였을까. 다음날 그가 준 사무실 전화번호로 전화했을 때 그의 사무실 여직원이 나의 계좌를 묻더니 33만 원인가를 입금해왔다. 100만 원을 한꺼번에 줄 수는 없고 세번에 나눠서 빌려준다는 것이었으니까.

그렇게 나는 두 번을 송금받고, 그 즈음에 과외를 구할 수 있어서 더 이상 송금받지 않아도되었고 그 아저씨는 갚으라고 하지 않았다. 나는 대학을 졸업해서 직장을 다니면 갚아야지 했는데, 대학을 졸업할 즈음에는 그 아저씨와 연락이 끊겼다.

마흔을 넘기고 아이 엄마가 된 지금도 그 부산 아저씨가 종종 떠오른다. 그 아저씨는 취중에 한 약속임에도 아무런 대가 없이, 나에게 두 번이나 송금을 해주었다. 절박한 청춘의 날에 문득 나타난 키다리 아저씨라고 할까. 아직 아저씨에게 빚을 갚지 못한 나는, 기부를 많이 하려고 애쓰는 편이다. 내가 대가 없이 받았으므로 나도 대가 없이 남들에게 주려고 노력한다. 지금 시민단체에서 일을 하는 것도 살면서 남들에게서 받은 호의를 돌려주고 싶은 마음 때문이다.

요즘 대학생들의 등록금 분투기를 읽으며 나의 20대가 떠올라서 이 글을 쓴다. 옥탑방과 반지하방을 전전하며 두부와 캔 참치 같은 걸로 김치찌개를 겨우 끓여먹던 20대의 청춘…. 등록금은 이미 천만 원 시대를 넘어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 비싸고 하숙방도 월셋방도 비싸고, 편의점 같은 데 아니면 값싸게 끼니를 때울 곳이 없는 지금의 청춘들을 어찌할 것인가. 하루하루 전쟁처럼 살아가야 하는 그들에게 나는 연대의 손을 내밀고 싶다. 청춘들이 마음 편히 공부할 권리를 찾길 바란다.


태그:#등록금
댓글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3,0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읽고 쓰고, 산책하는 삶을 삽니다. 2011년부터 북클럽 문학의 숲을 운영하고 있으며, 강과 사람, 자연과 문화를 연결하는 사회적협동조합 한강의 공동대표이자 이사장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한강'에서 환대의 공동체를 만들어나가고 싶습니다.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