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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치항 등대
 물치항 등대
ⓒ 유혜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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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산해수욕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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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이 깊어야 빛이 잘 보이는 법. 방안의 불을 껐더니 창밖의 풍경이 선명하게 눈에 들어온다. 바깥을 내다보니 어둠에 물든 해수욕장 모래밭이 비스듬히 보인다. 모래밭 너머가 바다이리라. 이곳은 낙산해수욕장의 한 모텔. 모텔 쥔은 처음 들어갔던 방보다 전망이 나쁘다고 했지만, 그리 큰 차이가 나는 것 같지 않다.

방안에는 서늘한 한기가 감돌고 있다. 하지만 이불이 깔려 있는 방바닥은 따끈해서 엉덩이를 오래 붙이고 앉을 수 없을 정도였다. 침대 방인데도 침대 옆 바닥에 이불을 깔아놓았다. 그래야 방바닥이 따뜻해지기 때문이리라.

모텔 카운터에서 열쇠를 받아 들고 2층에 있는 방으로 들어가 배낭을 내려놓고 욕실로 들어가 수도꼭지를 틀었더니, 찬물이 나온다. 한참을 틀었는데도 더운물은 나오지 않는다. 부여에서 있던 일이 재현되는 건 아닐까, 하는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지난해 가을, 부여로 1박2일 취재여행을 간 적이 있다. 그날 밤, 부여읍내의 한 모텔에 들어갔는가 더운 물이 나오지 않아 결국 모텔비를 환불받아 나온 적이 있다. 모텔에 들어간 지 한 시간쯤 지났는데도 더운 물은 나올 기미가 없었고, 나는 배낭을 꾸려 그 모텔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설마 오늘도 그런 사태가 벌어지는 건 아니겠지?

안내실로 전화를 했더니, 모텔 쥔이 받는다. 더운 물은 수도를 오래 틀어두면 나올 것이란다. 얼마나 틀어놔야 하느냐고 물었더니, 십 분쯤이면 될 거라고 했다. 욕실로 들어가 수도를 틀었다. 찬물이 쏟아진다. 그냥 내버려두고 다시 방으로 돌아와 TV를 켰다. 으, 이번에는 TV가 말썽이다. 화면이 지직거리면서 제대로 나오지 않는다. 그 화면을 보고 있자니 눈이 아프다. 다시 전화를 건다. 쥔아줌마, 올라와서 확인을 하시겠단다.

결국 방을 바꿨다. 쥔아줌마가 TV의 상태가 왜 그런지 잘 모르겠다고 하면서 방을 바꾸겠느냐고 물었던 것. 틀어두었던 수도꼭지를 잠그고 다른 방으로 이동.

옮긴 방은 처음 들어갔던 방보다 컸다. 안쪽에 주방시설이 되어 있는 방이었는데, 여름에 이곳에서 취사가 가능하다고 했다. 물치항에서 낙산해수욕장까지 걸어오는 동안 콘도텔이라는 이름이 붙은 숙박시설을 많이 봤는데 이렇게 취사시설이 갖춰진 곳이었나 보다.

취사시설이 있는 곳은 난방이 되지 않아 커튼으로 가렸놓았다. 그곳을 감돌고 있는 한기가 방안으로 밀려드는 걸 막기 위해서였다. 이 방에서도 더운물은 금방 나오지 않아 수도꼭지를 오래 틀어두어야 했다. 그 이유는 모텔에 손님이 없기 때문이라고 했다.

모텔 쥔은 말했다. 2월과 3월이 관광비수기인데다가 1월에는 눈이 너무 많이 내려 관광객들이 거의 오지 않는다고. 손님이 없으니 모텔 전체가 썰렁할 수밖에 없고, 더운 물도 심야전기를 이용해서 금방 나오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미안하다는 말을 덧붙였다.

더운물이 금방 나오지 않으니 물을 오래 틀어두어야 하는데, 덕분에 물 낭비가 만만치 않다고도 했다. 수도요금이 예전보다 더 많이 나온다는 말도 했다. 우리나라가 물 부족국가가 된다는데 말이지요, 하면서.

낙산해수욕장 가는 길
 낙산해수욕장 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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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전사에서 물치항까지 걸은 다음 그곳에서 하룻밤을 잘 생각이었다. 한데 예정이 바뀌어 낙산해수욕장까지 오게 되었다. 늘 그렇듯이 여행을 떠나면 처음 계획과 달라지는 경우가  많이 생긴다. 이번 여행이 유독 그랬다.

진전사에서 내려와 다시 산불감시초소로 왔더니 산불감시원 아저씨가 커피를 타주고, 초코파이까지 간식으로 내주신다. 걷느라 배고팠을 거라면서. 늦은 점심을 먹어서 배가 빵빵하지만 성의를 무시할 수 없어서 먹고 마시면서 산불감시원 아저씨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화채봉으로 가는 길에 두 가구가 사는데 지난겨울에 눈이 너무 많이 내려 모두 그곳에서 피난을 나와야 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 쪽으로 가는 길은 눈이 허리춤까지 찼는데, 아마 지금도 눈이 그대로 일 거라고도 했다. 지금은 입산금지 기간이라 산에는 들어갈 수 없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산불감시원 아저씨와 이야기를 나눌 때만 해도 입산금지가 나와 전혀 상관이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나중에 구룡령 옛길을 걸으러 갔다가 그게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집이 속초라는 감시원 아저씨는 퇴근길에 나를 태워다주겠다면서 어디까지 가느냐고 물었다. 내 목적지는 물치항. 그곳까지 거리는 6km 남짓. 한 시간 반쯤 걸으면 도착하지 않을까?

"괜찮아요. 안 태워주셔도 돼요. 여기까지도 걸어왔는데, 걸어갈 수 있어요."

미안해서 사양하는 걸로 오해하신 이 아저씨, 괜찮단다. 여기까지 힘들게 걸어왔으니, 이제는 차를 타고 가야 한단다. 걸을 만큼 충분히 걸었다는 것이다. 계속 사양할 수 없어서 그냥 차를 얻어 타고 물치항까지 갈 수밖에.

물치항
 물치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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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치항에 도착한 시간은 오후 다섯 시 반. 오후 세 시가 넘어서 늦은 점심을 먹은 데다 아저씨가 준 초코파이까지 먹었더니 으, 포만감이 가시지 않는다. 이대로 숙소를 찾아 들어가면 안 될 것 같다. 소화를 시키려면 더 걸어야지.

그래서 결국 낙산해수욕장까지 1시간을 더 걸었다. 대형 트럭들과 버스들이 씽씽 힘차게 달리는 동해대로 7번 국도를 따라 달리는 차량을 마주보면서 걸었다. 대형트럭이 달려오는 것이 보이면 갓길로 바싹 달라붙었다. 트럭이나 버스는 어찌나 쌩쌩 달리는지 지나갈 때마다 내 몸이 흔들렸다. 으, 무서워라. 하지만 다른 길이 없으니 그 길을 걸어야 했다. 

6시가 넘자 주변이 조금씩 어두워지기 시작한다. 달리는 차들이 눈을 반짝이는 것처럼 헤드라이트를 밝힌다. 눈이 부시다. 정암해수욕장을 지나고 설악해수욕장까지 지나니, 낙산사 입구가 보인다. 그곳을 지나 도착한 곳이 바로 낙산해수욕장.

철 이른 해수욕장은 한산했다. 문을 연 식당이며 숙박업소들은 네온빛을 밝히고 있었지만, 지나다니는 사람들은 아주 드물었다. 날은 아주 저물어 버렸다. 해수욕장에서 바닷가 쪽으로 걸음을 옮기면서 오늘밤은 어디서 자야 하나, 궁리를 한다. 이 모텔이 좋을까, 저 모텔이 좋을까, 하다가 바닷가 가까운 모텔로 걸음을 옮겼다. 기왕이면 창문을 열면 바다가 보이는 방에서 하룻밤을 자자, 하면서.

수도꼭지에서 더운물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예상보다 시간이 덜 걸려서 다행이다. 물을 더 많이 낭비한 뒤에 더운물이 나오는 건 별로 반갑지 않으니까. 씻고 나니 피로감이 몰려온다. 의자에 앉아 창밖을 바라보려니 폭죽이 터지는 소리가 들리면서 밤하늘을 향해 치솟아 올라가는 불빛이 보인다. 폭죽 터지는 소리는 조금 더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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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밤 묵은 모텔은 수준이 별 세 개쯤? 물론 내 기준이다. 지은 지 조금 오래된 건물은 낡은 티가 많이 났다. 욕실은 난방이 안 되는지 썰렁해서 씻고 나오니 으스스한 한기가 와락 느껴진다. 발 매트에는 한국관광공사가 선정한 굿스테이, 라는 글이 새겨져 있었다. 하지만 굿스테이 수준의 아주 좋은 모텔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아, 그 글귀가 생뚱맞아 보였다.

건물이 낡은 거야 세월이 흐르면 어쩔 수 없는 것이니 그걸 탓할 수는 없겠지. 그렇다고 아주 불편한 것도 아니니 하룻밤 묵어가기에는 그럭저럭 괜찮은 곳이라고 할 수 있다. 모텔 쥔이 상당히 친절해서 마음에 들었다.

이날 밤, 나 말고 다른 손님이 더 들어오는 기척을 느끼지 못했다. 그럼, 그 큰 모텔에 나 혼자만 잤다고?

철 이른 해수욕장은 쓸쓸하다. 화려하게 빛나는 네온사인마저 쓸쓸한 기운을 팍팍 품어낸다. 그렇지만 해수욕을 할 게 아니라면 제철이 아닐 때 가볼만 하다. 사람이 드물어 한적한 기운을 한껏 즐길 수 있기 때문이다.

폭죽 잔해
 폭죽 잔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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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튼을 열어젖히고 침대에 누웠다. 어둠에 잠긴 바다가 보인다. 다시 들려오는 폭죽 터지는 소리. 나처럼 철 이른 바다를 찾아온 사람들이 터뜨리는 폭죽이었다. 다음 날 아침, 모래밭을 걸으면서 그 잔해를 볼 수 있었다. 누군지 모르지만 폭죽을 잔뜩 터뜨린 뒤 그대로 남겨두고 가 버린 것이다.

제발 폭죽 터뜨리고 난 뒤에 모래밭에 그대로 버려두지 마시라. 흉물스럽다.


태그:#도보여행, #강원도, #양양, #물치항, #낙산해수욕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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