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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과 함께 1박2일로 강원도 속초 근방을 다녀오기로 했다. 21일 동서울버스터미널에서 한계령을 경유하는 속초행 버스를 탔다. 속초로 가는 가장 빠른 노선은 미시령터널을 통과 하는 거지만, 한계령 쪽을 택한 것은 눈 구경도 하고 속초 못 미쳐 있는 물치항에서 숙박을 하고 싶어서였다. 차창 밖으로 스치는 산은 쌓인 눈으로 해끗해끗해 보였다. 하지만 해가 드는 들판의 눈들은 거의 녹아 있다. 얼마 전에 내린 폭설로 강원도 일대가 몸살을 앓은 흔적들이 지워져 가고 있었다. 구불거리는 한계령의 고갯길을 버스가 천천히 오른다. 빙판 져서 미끄러우면 어쩌나 했던 염려는 기우에 그쳤다.
봄맞이 햇살 앞에서는 '눈폭탄'이라고 했을 만치 많이 내렸던 눈들도 흐물흐물 시나브로 해체되고 있었다. 아직 나무들 밑동에 쌓여 남아 있는 눈들도 푸석푸석 성글어 보였다. 무장해제 당한 병사들의 모양새 같다. 눈은 제 모습을 녹여 나무들의 거름이 되고 있었다. 앙상한 나무들은 그 물기를 빨아들이고 조만간 탱글탱글한 싹들을 틔울 것이다. 구불구불한 한계령의 고갯길을 넘자니 그곳의 웅장한 바위산도 장엄하고, 그 길을 내기 위해 자연과 싸웠을 사람들의 애씀도 위대해 보였다.

아담하고 조용한 물치항의 저녁무렵.
 아담하고 조용한 물치항의 저녁무렵.
ⓒ 박금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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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는 한계령을 넘어 오색, 양양, 낙산을 거쳐 물치항에 도착했다. 물치항은 한적하고 조용했다. 어스름 저녁 안개가 바다를 회색으로 물들이고 있다. 가까운 거리에 물치항 보다 커서 번화가 같은 대포항도 보인다. 겨울 비수기에다 주말이 아닌 평일이다 보니 물치항 근처의 민박집들은 거의 영업을 하지 않고 있었다. 조그만 포장을 치고 건어물을 팔고 있는 아주머니한테 물으니 지금은 비수기라 모텔이나 펜션에도 방들이 남아돌고 값도 싸단다. 그러니 민박 찾지 말고 "따땃한 방"이 준비되어 있는 모텔에 들라고 한다. 숙소를 잡고 방에서 내려다본 단층의 지붕들에는 쌓인 눈이 많지 않다. 따뜻한 햇살은 어른 허리께를 넘나들 정도로 내렸다는 눈까지도 빠른 속도로 녹여 내고 있었다. 

새벽안개에 둘러싸여 있는 물치항.
 새벽안개에 둘러싸여 있는 물치항.
ⓒ 박금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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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치항에도 2층으로 되어 있는 회 센터 건물이 있다. 안으로 들어가 보니 횟집들이 일렬로 촘촘히 들어차 있다. 각각의 횟집에 딸려 있는 홀은 아담하게 작지만 깔끔했다. 회를 주문하고 홀에 앉으니 바다와 바다로 뻗어 있는 방파제와 그 끝에 놓여 있는 빨간 색의 등대도 보인다. 푸른색을 잃고 검게 변해가고 있는 밤바다는 파도도 잠든 듯 조용했다.

일출은 아침 7시쯤에 뜬다고 했다. 숙소에서도 해 뜨는 광경을 볼 수 있었지만, 바닷바람을 맞으며 붉게 변하는 하늘을 만나고 싶었다. 해가 뜰 시간이 되어 밖으로 나왔다. 새벽 거리에는 짙은 안개가 두텁게 내려앉고 있었다. 뜨문뜨문 서 있는 가로등의 불빛은 안개에 가려 희미했다. 이러다 일출을 못 보는 것이 아닐까 내심 걱정이 되었다. 벌써 항구에는 어민들이 삼삼오오 모여 모닥불을 피우고 있었다. 안개 때문에 바다는 온통 잿빛이었고 수평선도 무너져 버렸다. 바다 위를 낮게 날고 있는 갈매기도 회색이다. 방파제 끝에 세워져 있는 빨강과 하양의 등대조차도 안개의 실루엣 속에 감춰져 색이 드러나지 않는다.

동명항.
 동명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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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파제를 걷는 사람은 우리뿐이다. 시간이 흘러 가로등의 불빛은 이미 꺼졌고, 날은 밝은 듯하다. 그런데도 오리무중의 수평선 끝에서 해가 조만간 튀어나올 것 같아 방파제를 떠나기가 아쉬웠다. 뒤돌아서면 달걀노른자 같은 해가 순간 쑥 올라와 있을 것만 같다. 항구에서 모닥불을 피우고 있던 어부들은 알았을 거다. 태양도 이런 안개는 밀어내지 못한다는 것을. 날씨가 맑다고 해서 날이면 날마다 일출을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란 것을. 발발 떨며 방파제에 서 있는 한 쌍의 남녀를 보고 웃었을 것 같다. 안개에 파절이가 되어 숙소로 돌아와 텔레비전을 틀고 기상청 뉴스를 들었다. 한반도 지도에 강릉과 속초 부근이 안개그림으로 나타나 있다. '가는 날이 장날'이었군 싶었다.

다음 행선지는 속초항 옆에 있는 동명항이다. 아침은 그곳에서 '곰치국'을 사먹기로 했다. 동명항 가는 시내버스는 대포항과 속초항을 거쳐서 갔다. 버스로 약 30분 거리다. 속초에서는 곰치국을 '물곰탕' 혹은 '물곰국'이라고도 했다. 동명항 해안 길 골목에 위치해 있는 곰치국 식당 중에 아침식사가 되는 곳으로 갔다. 곰치(혹은 물곰)는 동해안에서 사계절 어획이 가능한 생선이라고 한다. 몸통은 꼭 곰처럼 퉁실퉁실하게 생겼다. 냉동을 시키지 않고 생물로 요리를 한단다. 요즘은 어획량이 들쭉날쭉해 음식가격도 그때그때 달리 받는다면서, 곰치국 일인분에 대략 일만 원에서 일만 오천 원 선이라고 한다. 우리는 일만 오천 원에 먹었다. 

곰치국(물곰국, 물곰탕이라고도 한다)
 곰치국(물곰국, 물곰탕이라고도 한다)
ⓒ 박금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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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기에는 탱글거려도 입에 넣으면 씹을 사이도 없이 목구멍으로 스르르 넘어갔다.
 보기에는 탱글거려도 입에 넣으면 씹을 사이도 없이 목구멍으로 스르르 넘어갔다.
ⓒ 박금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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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곰탕은(속초의 음식점들은 메뉴판에 주로 이렇게 적어 놓았다) 꼭 동태 매운탕처럼 나왔다. 그런데 맛이 달랐다. 국물은 진하지 않았고 맑은 장국처럼 시원했다. 탕 속에 들어있는 고기를 국자로 떠보니 아직 덜 익은 생선처럼 물컹해 보인다. 계속 불 위에 놓고 끓이고 있자니 홀 서빙 하던 아주머니가 이미 주방에서 익혀 나온 것이니까 먹어도 된다고 한다. 생선살을 씹었다. 살캉살캉 씹히는 샤벳의 촉감이다. 말캉하게 씹히는가 싶더니 흐물흐물 목구멍으로 넘어간다. 바다를 떠다니는 해파리도 뜨거운 물에 들어가면 꼬들꼬들해 지는데 뭉턱한 생선살이 뜨거운 국물에서도 물렁물렁하다니 신기했다. 음식 이름에 아주 걸맞은 형태였다. 맛도 있고, 양도 푸짐했다. 물치항 방파제에서 일출을 보려고 떨었던 아쉬운 속을 뜨끈하게 데워줬다.

동명항의 해맞이 정자와 영금정.(왼쪽과 가운데 정자)맨 오른 쪽에 속초등대가 놓여 있다.
 동명항의 해맞이 정자와 영금정.(왼쪽과 가운데 정자)맨 오른 쪽에 속초등대가 놓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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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명항. 항구에 가끔씩 배가 들어오면 사람이 몰리고 경매가 시작되었다. 횟집 아주머니들은 손가락을 이리저리 흔들며 가격을 매기느라 바쁘고, 여행객은 사진 찍느라 바쁘고.
 동명항. 항구에 가끔씩 배가 들어오면 사람이 몰리고 경매가 시작되었다. 횟집 아주머니들은 손가락을 이리저리 흔들며 가격을 매기느라 바쁘고, 여행객은 사진 찍느라 바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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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명항은 속초항과 가깝고, 속초등대와 해맞이 하는 영금정이란 정자가 있어 사람들이 많이 찾고 있었다. 방파제도 매우 길어서 산책삼아 걷는 사람들도 많았다. 쉬엄쉬엄 걸으니 왕복 한 시간쯤 걸렸다. 아직 걷혀지지 않은 안개 때문에 동명항 하늘 중천에 떠 있는 해가 멀겋게 보였다. 바람과 파도가 없는 바다는 조용했다. 가끔 항구로 들어오는 조그만 배들 때문에 물살이 갈라졌지만, 금방 고요해 졌다. 바다 위를 나는 갈매기들이 시야에 들어왔다 나갔다 했다. 이번 여행의 목적은 일출을 보고, 곰치국을 먹어 보자는 것이었다. 비록 일출 보는 것은 안개에 빼앗겼지만, 궁금한 맛으로 남아 있던 곰치국을 먹었다는 것에 의미를 두고 여행을 마무리 했다.

동명항의 방파제. 정오가 되도록 걷히지 않는 안개 때문에 항구는 여전히 회색이다. 저 멀리 속초등대, 영금정, 해맞이 정자가 보인다.
 동명항의 방파제. 정오가 되도록 걷히지 않는 안개 때문에 항구는 여전히 회색이다. 저 멀리 속초등대, 영금정, 해맞이 정자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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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명항에서 택시로 기본요금만 주면 올 수 있는 곳에 동명동 시외버스터미널이 있다. 속초고속버스터미널까지 가지 않더라도 그곳에서 동서울터미널로 오는 버스를 탈 수 있다. 버스 노선도 미시령터널 쪽을 택했다. 속초 시내를 벗어난 버스가 30여분 달려 미시령터널 가까이에 오니 설악산 울산바위의 우뚝 솟은 모습이 눈 안으로 가득히 들어차 왔다. 미시령터널을 경유하는 버스는 너무 빨리 강원도를 벗어나 서울로 들어왔다. 2시간 30분 거리라고 하는데, 그 보다도 조금 빠른 시간에 동서울터미널에 도착을 했다. 미시령 터널을 통과한 버스는 여행에서 생긴 나른한 피로를 다스릴 사이도 없게 우리를 삶의 공간으로 이동해 놓았다.


태그:#곰치국, #물치항, #동명항, #속초, #강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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