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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일, 안개가 자욱한 아침에 집을 나섰다. 무언가 그 또렷한 실체를 설명할 수 없는 설렘, 사람들에 대한 본능적인 그리움이 간밤에 마셨던 지독한 음주의 피곤을 저만치 뒤로 물러나게 했다.

 

모처럼 꿀맛 같은 주말의 단잠을 누리는 식구들을 깨우고 싶지 않아 아무런 기척 없이 은밀하게 일어났다. 그리고 노련한 새벽손님처럼 익숙하게 옷가지를 온 몸에 걸쳐 입었다. 며칠 전부터 냉장고 깊숙이 꼬불쳐 둔 막걸리 두 통을 배낭에 넣으며 나는 혼자서 싱겁게 웃고 말았다,

 

사람들을 길에서 만났다. 맑은 웃음기 어린 그들의 표정에 반가움과 싱그러움이 살짝 드러나 보였다. 손을 맞잡으며 악수를 했고, 서로의 가슴으로 포옹을 하며 오로지 사람만이 가진 그 솔직하고 원초적인 감정을 주저함 없이 교환했다.

 

길을 걷기 시작했다. 언젠가부터 누군가 어떤 사람들이 이미 걸었을 작은 숲길, 산길, 소롯길이 부끄러운 민낯을 가리듯 낙엽 속에 얼굴을 묻고 있었다. 우수가 지났건만, 아직 지난  겨울이 흩뿌리고 간 눈물의 자욱이 곳곳에 잔설과 얼음으로 남아 추억 속으로 소멸해 가고 있었다.

 

발밑에 수북하게 깔린 참나무 이파리와 솔잎이 만들어 준 부드러운 촉감은 경망한 사람의 걸음걸이도 사뿐사뿐 우아하게 바꾸어 주는 깍듯한 예우였다. 숲 속에 난 작은 길을 걷는 무아의 걸음은 가벼웠고 사람들과 호흡하는 소박한 소통은 그렇게 편할 수가 없었다.  

 

걷다보며 마주치는 길 위의 작은 돌멩이 하나, 벌레 먹은 마른 이파리와 마른 풀들은 그저 그 자리에 있기만 해도 좋아보였다. 그저 그 자리에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사람과 자연의 조우, 인연, 무의식적인 감정의 상호작용이 일어나는 것은 우주만물 속의 매우 자연스런 조화가 아닐까?

 

비탈진 산등성을 힘겹게 오르고서야 평탄한 대지의 고마움을 느낄 수 있을 것이고, 응달진 북향의 험로를 등줄기 싸늘하게 걸어봐야 양춘의 거룩함을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애타게 목이 말라봐야 한 모금 생수가 지닌 위대한 가치를 그 제서야 깨달을 수 있을 테니 인간은 여전히 모자라고 부족하다. 모두가 그런 건 아니지만, 간혹 머리가 똑똑한 인간들은 오히려 심장의 정혈이 혼탁하다. 이기가 있고, 욕심이 있고, 겸양이 없기 때문이다.

 

나는 길에서 묻고 배우며 생각한다. 다름을 이해하는 지혜를, 대상을 향한 존중이 가진 조화로움을, 사람과 만물의 필연적 상호연관의 원리가 고리로 순환하고 있는 지극히 단순한 변증법적 심오함을... 길에서 걸음을 통해 자신도 모르게 스스로를 조금씩 채워갈 수 있으니 길은 배움터요, 스승에 다름 아니다.

 

호젓한 장령산의 숲길을 걸었고, 구불구불 솔향기 그윽한 대자동 산길을 걸었다. 겨울의 끝자락 봄의 문턱에 다다른 화창한 날에 길을 걸으며 체험하게 되는 알 수 없는 희열이 솟구쳤다.

 

 

태종의 서3남 온령군, 서4남 근령군, 태종의 4남 성령대군, 성종의 9남 이성군, 소현세자의 아들 경안군과 손자 임창군 등...조선의 왕자들이 대거 잠들어계신 이른바 대자동 '왕자의 계곡'을 스치며 걸었다. 마주하고 있는 대자산과 장령산의 가운데로는 대자천이 흐르고 있다. 대자천 주변으로는 넓지는 않지만 논이 있고, 또 그 주변으로는 약간의 비닐하우스와 농장들이 보인다. 대자산과 장령산의 양지 바른 골짜기에 조선왕조 왕족의 후손들이 지근거리에 군데군데 모여 쉬고 있으니 그야말로 '왕자들의 계곡'인 셈이다.

 

조선의 10대 임금이었다가 중종반정으로 폐위된 '연산군의 금표비'도 대자동 골짜기 마을의 길가 옆에 옹색하게 서 있다. 임금의 사냥터 입구에 '백성들의 출입을 금한다'고 새겨 세워놓았던 금표비는 백성들을 졸지에 삶의 터전에서 떠나게 하는 포악한 횡포의 산물이었다. 임금의 사냥터는 곧 백성들의 죽음터가 되었으니 폭군의 말로가 비극적일 수밖에 없을 것을 능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길을 걸으며 역사에 대한 추론과 상상을 즐기는 것 또한 빼놓을 수 없는 매력이다. 그것은 오래전 역사와 현재의 내가 나누는 역사적 교감이다. 조금씩 걸음을 옮길 때마다 눈앞에 나타나는 무덤과 사당과 비석들을 무심코 바라보며 나는 오늘도 상념에 젓는다.    

 

썩은 고목의 줄기에 달라붙어 쪼아대는 오색딱따구리의 리듬감 있는 먹이활동은 눈과 귀를 즐겁게 한다. 회갈색 몸에 파랑색 광택의 독특한 날개덮깃을 가진 산 까치 '어치' 한 쌍의 데이트 비행도 구경거리다. 풀 섶에서 순식간에 날아오르는 노랑턱멧새 떼의 발칙한 날개짓도 재미나다. 산길을 걸으며 그 속에서 만나는 귀엽고 예쁜 새들과 조우하는 일은 예기치 못한 풋풋한 행운이다. 

 

고요한 산길, 숲길을 걷는 여정에서 노회하고 유식한 사람들의 장황한 설교와 고리타분한 교만은 무익하다. 그저 걷고, 이야기하며 서로의 마음을 잔잔한 목소리와 눈빛으로 나누고, 목이 마르고 컬컬할 때면 시원한 막걸리 한 잔을 목구멍에 부어 씻어내면 될 일이다. 그것이면 행복이고, 그것이면 만족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길을 걸었던 것 같다.

 

바람이 지나간 숲 속 오솔길을 따라 걸어 하산하며 나는 오늘도 길을 가슴에 담는다. 오늘 아침 시작하여 이어져온 좋은 사람들과의 궤적을 오롯이 추억 속에 담는다. 내게 인내를 가르쳐준 가파른 비탈을 생각한다. 얼어붙어 미끄러운 눈길에서 서로의 손을 잡아주었던 따뜻한 사람의 정과 정중한 배려의 느낌을 곱씹는다.

 

나는 길을 걸으며 소망한다. 내게 부족한 것을...

덧붙이는 글 | <고양올레>걷기모임에서 지난 2월 20일 고양시 필리핀 참전비~장령산~대자동 온령군 묘역~연산군 금표비~근령군 묘역~장령산~신미산 능선길 약 14km를 걷고 쓴 글입니다.


태그:#고양올레, #고양 누리길, #고양올레 걷기, #장령산, #연산군 금표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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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시에 걷기 좋은 길을 개척하기 위한 모임으로 다음 카페 <고양올레>를 운영하는 카페지기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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