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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의 기세는 봄보다 월등하게 강하지만, 결코 이기지는 못한다.

눈이 녹아 비로 내린다는 '우수'. 지붕에 풀을 얹은 스트로베일 건물과 흙길, 차양조차 치지 못해 눈부신 봄볕을 고스란히 받아내는 안마당에서 치른 민들레학교 2회 졸업식이 지난 19일 있었다. 그곳에는 요즘 졸업식마다 단골로 등장하는 한철 꽃장사도, 위압적인 경찰차도 눈에 띄지 않았다. 조촐하고 평화로운 공동체의 잔치이자, 두 번째 알곡을 빚어낸 감동과 자축의 흥겨움만 있을 뿐이었다.

그나마 1년 5개월 만에 자퇴를 하고 일반고등학교에 진학한 아들을 데리고 간 어미로서, 6명의 적은 인원이 지켜낸 3년 세월에 만감이 교차했다. 고맙게도 중도 포기 혹은 탈락한 아이들을 위해 학교에서는 수료증과 자료집까지 준비해 수료생 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말썽 일으키고, 지도편달이 안 되는 아이들을 일방적으로 전학 조치하는 공교육의 현실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다. 민들레학교는 원래 그런 학교였다.

대부분의 일처리가 치밀하게 계획된 것이 아니라 주먹구구에 가까웠고, 머리보다는 몸으로 해결하는 방식이었다. 진행은 늘 더디고, 구멍이 여기저기 드러나고, 선생님이나 아이들 대부분이 게으르고 무관심해 보였다. 자식 던져놓고 혹시나 어려움이 있을까 전전긍긍하며 서울에서 산청까지 천리 길도 마다않고 쫓아다녔던 세월동안 느긋한 천성이 조급하고 불같은 성격으로 바뀔 지경이었다. 도시에서 나고 자란 도시인의 아들, 딸들이 모여 가난하고 불편하며 정직한 노동의 가치를 실천하며 살겠다는 농촌운동가 선생님들의 가르침을 받아야 하는 현실이었으니 오죽 사건과 사고가 많았겠는가!

아이들은 부모가 올 때마다 배고파 죽겠다, 힘들어 죽겠다, 심심해 죽겠다… 모두 죽는다는 하소연만 늘어놨다. 따뜻한 아파트에서 온갖 산해진미를 마음대로 사먹는 부모들에게 거친 현미밥과 채소가 주를 이루는 유기농밥상으로 '연명(?)'하는 자식들이 짠해서 차라리 안보는 것이 낫다는 부모도 있을 정도였다. 반 강제로 회유와 협박을 하여 집어넣은 신생 대안학교여서 생전 처음 해보는 노작에 며칠씩 앓아누웠다는 아이의 연락을 받으면 죄책감과 후회와 갈등이 밀물처럼 달려들어 밤을 새곤 했다.

왕따와 획일화된 교육시스템에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어떤 어려움이라도 참아낼 수 있다고 다짐하던 아이와 부모였지만 시행착오의 불안과 공포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거기에 먹고 자는 문제까지 하나도 여의치 않은 척박한 환경에 짓눌리다 보니 교육의 가치와 이상은 이미 화려한 수식이 되어버렸고, 그저 버티고 살아남는 것이 최대현안이 되어버렸다. 입시위주 교육현실이 한국 공교육의 정글이라면 미지의 대안교육현장 또한 그에 못지 않는 가공할 정글로 여겨졌다. 자율도 갖추지 못한 아이에게 자유는 그저 무겁고, 막막하고, 불편한 짐일 뿐이었다. 가정학습 하러 집에 갈 날만 꼽고 있는 아이의 일기장을 보면 옳은 것과 옳다고 믿는 것의 자기최면에 빠진 것이 아닌가 하는 당혹감이 엄습하곤 했다.

갖추어진 환경 속에서 부모의 치밀한 기획 아래 성장 단계를 밟아가는 요즘의 아이들은 스스로 손과 발을 쓰고, 머리로 고민을 거듭해 무언가를 이루어내는 경험을 할 수 없다. 그것은 가장 사랑하는 내 아이를 죽이는 일이 아닌가, 그 깨달음을 실천하려는 것이 잘못이었던가? 자식 사랑이란 이상과 현실의 괴리를 뼈저리게 느끼며 애가 닳아 있을 때 아스팔트에 던져진 민들레 홀씨가 꽃을 피우듯 성장하는 아이도 생겨나고, 상처투성이의 가슴을 안고 떠나는 아이들도 생겨났다. 떠나는 자들이 남긴 잔상과 아픔은 남은 자들에게 더 크게, 오래 남았다. 떠난 그들이 패자가 아니라 남은 우리들이 버림받은 것 같은 소외감과 열패감이 며칠 혹은 일주일 이상씩 작은 산골 마을에 퍼져있기도 했다.

결핍과 고통을 온 몸으로 받아들이는 자발적 가난과 손노동의 철학으로 세상을 살아내겠다는 교장선생님의 생각이 배타적인 기독교신앙과 함께 또 하나의 이데올로기로 순진한 아이들과 세상살이에 지친 부모들을 옭아매는 것이 아닌가 자꾸 의심하게 되었다. 10일간 3백킬로미터를 행군하는 국토순례와 가난한 동남아시아 국가만 골라서 다녀오는 해외이동학습, 고교진학을 위한 구체적인 대안제시가 거의 없는 커리큘럼 등 상식을 뒤엎고, 고정관념을 전복시키는 그곳의 삶이 아이보다는 부모에게 더 큰 숙제를 남겼다.

한 살 어린 동기들과 1년 5개월을 살아낸 아들은 일반 고등학교에 진학하겠다는 뜻을 여러 번 내비쳤고, 나는 아들의 의견을 존중해 자퇴서를 냈다. 해외이동학습을 몇 개월 남기지 않고 내린 결정이어서 선생님과 학부모, 아이들 모두에게 충격과 배신감을 크게 던진 일이었다. 말만 앞세우고 설치다가 제풀에 지쳐 꼬리를 감추고 도망치는 영락없는 낙오자의 모습을 하고 다시 천박한 세상으로 돌아오면서 뜻대로 되지 않는 자식농사의 서러움이 복받쳤다. 매듭도 짓지 못할 일을 경솔하게 저질러 공연히 자식만 공중에 띄워놓은 꼴을 겪고 보니 세상살이가 막막하고 무섭기만 했다.

투자가 아닌 투기꾼처럼 사교육 시장을 쫓아다니는 우리 시대의 부모들, 그들이 썩은 물에 몸을 담근 채 미련을 떠는 심정을 알 것만 같았다. 끝까지 책임지고 길을 제시하지 못할 바에야 다수가 가는 길을 말없이 따르려는 무기력한 안주. 매연 가득한 시멘트 건물 안에서 함께 있어야 불안을 떨칠 수 있다. 그곳을 벗어나면 맑고 상쾌한 공기를 마음껏 마실 수 있지만 무차별적이고 무정한 자연과 자유를 감당할 자신이 없는 것이다. 길들여진 자들의 자유는 아주 작은 자유여도 족한 것이니까. 모험과 선택이 필요 없는 보호막만 있다면 말이다.

졸업식에서 김인수 교장선생님은 늘 그렇듯 털신을 신고, 누비옷을 입은 평소의 모습으로 담담한 축사를 했다.

"우리는 가난한 자, 노숙자, 병들어 죽어가는 자들의 얼굴을 직면하고 싶어 하지 않으며, 불편해 하고, 피하고 싶어 합니다. 그들에게서 나는 역겨운 냄새와 통하지 않는 대화, 우호적이지 못한 태도에 화가 나기도 합니다. 우리는 그저 적당한 구제로 우리의 양심을 무마하고, 적당한 거리로 우리의 품위를 유지하고, 적당한 분노로 그들의 슬픔에 동참합니다. 그러나 그러함으로는 그들과 친구가 될 수 없습니다. 민들레학교의 설립목적은 가난한 자들의 친구가 되자는 것입니다. 친구는 두 세계가 만나 뜨거움을 공유하고 그 불꽃 속에서 서로의 미래를 보는 것입니다. 저는 가난한 자들이 인류를 구원하고 미래를 지킬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졸업하는 6명의 아이들은 서로에게 졸업을 축하하는 상을 만들어 나누어 주었다. 지나친 센스로 가끔 친구들을 곤란하게 했던 승철이에게 '센스상'을, 단 한 명의 여학생이면서 끝까지 털털한 성격으로 지내온 한울이에게 '인내상'을, 여학생들의 일에 앞장서서 도움을 주었던 착실한 재영이에 '성실상'을, 친구들 사이에서 유난히 오지랖을 넓혔던 동건이에게 '우정상'을,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쉴 새 없는 입담으로 즐거움과 낭패를 주었던 진솔이에게 '퀵마우스'상을, 동물에 대한 사랑을 몸으로 실천한 민호에게 '가축사랑상'을 제정해 나누어주며 한바탕 웃음꽃을 피웠다. 이들 6명 중 세 명은 작년에 생긴 민들레고등학교(비인가)에 그대로 진학하기로 했고, 나머지 세 명은 자신의 적성에 맞는 고등학교에 각각 진학했다. 중도 탈락한 네 명의 아이들도 모두 일반학교에 진학하여 무리 없는 일상을 소화해내고 있다. 총체적 난국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던 온갖 문제와 갈등을 겪으며 지냈던 아이들이 힘들었던 만큼 성큼 자라 있었던 것이다.

견고한 틀과 알찬 구획으로 치밀하게 설계된 집을 보면 마음이 놓이고 믿음이 간다. 그렇지만 반듯하지도 않고 마감도 엉성한 흙집을 보면 곧 무너지기라도 하면 어쩌나 하는 불안함과 깔끔하지 않은 모양새 때문에 인상이 찌푸려지기도 한다. 민들레학교는 이제 막 두 번째 졸업생을 낸 비뚤비뚤하고 엉성한 흙집이다. 그나마 1기는 집도 없이 입학해서 손으로 볏짚과 흙을 나르며 학교를 손수 짓고 살았다. 자로 잰 듯 반듯한 아파트와 신호체계와 표지판이 완벽하게 정리되어 있는 강남대로를 지나며 살아온 이들에게 울퉁불퉁한 황토흙집과 진흙에 신발이 푹푹 빠지는 논두렁길은 불편하기 짝이 없다. 그렇더라도 그곳에서 몇 년을 뒹굴며 지내면 그곳이 사람 사는데 불편함이 없는 곳으로 바뀌고 만다.

사람의 일이나, 사랑도 처음 시작은 뜻하지 않게 시작하지만 그것을 유지하고 지켜나가기는 얼마나 힘이 들고 어려운가. 사람을 사람 그 자체로 받아들이고, 자연을 자연 그 자체로 받아들이기는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라 끝없는 관계와 경험 속에서 익혀나가는 작업이다. 스스로 힘을 갖고 살아나가기 위해 열심히 배우고 익히는 교육, 자신이 갖고 있는 힘을 약한 이들에게 나누되 그것을 권력으로 휘두르지 말 것을 가르치는 교육, 인연을 소중히 여겨 돌아선 자, 떠난 자, 비난하는 자까지 다시 내게 올 수 있도록 마음을 열 수 있도록 가르치는 교육이 이 땅 곳곳에서 홀씨처럼 자라나기를 간절히 바란다.

아무것도 아니었던 자신이 지금 이 자리에 이렇게 당당히 서 있는 것만으로도 스스로 대견하고 고맙다며 목이 메었던 민호의 말이 가슴에 박혀 있다. 세상을, 나를 구할 수 있는 자는 자신뿐이라는 것을 작고, 여리고, 슬픔 가득했던 그 아이는 깨달았던 것이다. 슬픔, 절망, 분노, 그리움, 외로움도 모두 겪은 뒤 비로소 타인의 마음을 헤아리고 보듬을 수 있는 사람으로 성장시키는 것은 고액과외와 해외유학으로는 불가능한 일이다. 오직 기다려주는 것, 믿어주는 것, 희망을 놓치지 않게 도와주는 것으로 가능한 일이다.


태그:#졸업, #사람다운 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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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이모작을 솔향 가득한 강릉에서 펼치고 있는 자유기고가이자 프리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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