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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년대, 80년대 중국어를 공부한 사람이라면 당시 우리나라에 거의 유일한 중국어회화교재였던 송재록교수의 '빨간책'을 기억할 것이다.

90년에 대학에 진학했더니 회화교재로 역시 빨간책을 쓰고 있었다. 고등학교 때 '주음부호(注音符號)'라는 대만식 발음표기법을 배워서 교재에 있던 로마자 발음표기법인 한어병음(漢語拼音)을 일일이 주음부호로 바꾸어 공부를 했던 기억이 있다.

1992년 수교 전에는 대만식 중국어발음표기법인 주음부호가 널리 쓰였지만 수료 이후 한어병음방안이 활용되고 있다.
▲ 한어병음과 주음부호 1992년 수교 전에는 대만식 중국어발음표기법인 주음부호가 널리 쓰였지만 수료 이후 한어병음방안이 활용되고 있다.
ⓒ 김대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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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대학교 3학년이 되던 1992년 8월 24일, 한중수교가 체결되면서 시중에 출판되는 모든 중국어교재에 주음부호가 사라지고 한어병음 표기만 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다시 힘겹게 한어병음을 익혀야 했으니 그때 내가 시대의 변화를 잘못 읽고 있었던 모양이다.

최근 주음부로를 사용하던 대만에서도 중국어의 세계화를 위해 도로표지판에 주음부호 대신 외국인에게 익숙한 로마자 표기법인 한어병음을 쓰고 있다고 하니 어쩌면 머지않아 우리나라도 중국과의 보다 원활한 소통을 위해 번체자를 버리고 중국에서 사용하는 간체자를 써야 한다는 주장이 나올지도 모르겠다.

1958년 2월 11일, 제1기 전국인민대표대회 5차 회의에서 문자개혁위원회 우위장(吳玉章)이 제안한 한어병음방안이 공식적으로 채택, 비준되었다. 한어병음방안은 'V'를 제외한 26개의 알파벳으로 발음을 표기하여 누구나 발음을 쉽게 배울 수 있다는 장점이 있어 중국어의 세계화뿐만 아니라 영어자판을 활용한 중국어의 디지털화에 크게 기여하였다.

과학기술이 발달하면서 펜인식, 음성인식, 부수나 숫자 등을 활용한 다양한 입력법이 개발되었으나 컴퓨터나 휴대전화가 막 보급될 때가지만 해도 로마자를 이용한 중국어 입력이 거의 유일한 방법인 것을 감안하면 한어병음방안이 중국어의 디지털화에 얼마나 큰 기여를 했는지 분명해진다.

최근에는 한 단어의 앞 자음만 입력하면 활용도가 높은 어휘순으로 나타나는 입력법이 보편화 되면서 중국인들이 휴대전화로 문자를 보내는 속도가 갈수록 빨라지고 있다. 상하이교통대학생들이 계발한 "aeviou입력법"은 최근 중국의 젊은 누리꾼들에게 대단히 인가가 높은데 중국어에서 단독으로는 비교적 활용도가 적은 자모인 a, e, v, i, o, u 자판을 기능키로 활용하여 1분에 70자 입력도 가능하다고 한다.

한어병음도 부작용이 없는 것은 아니다. 알파벳으로 표기하다 보니 영어 발음과 혼동이 생기기도 하며 중국 젊은 누리꾼들이 사용하는 인터넷용어나 은어 중에는 한어병음의 앞 자음을 활용한 것들이 많다. 'HD(厚德)'는 '후덕하다', 'BT(變態)'는 '변태', 'BC(白痴)'는 '백치' 등을 나타낸다.

중국정부는 최근 도를 넘어선 영어식 표기의 범람을 막기 위해 건물에 표기하던 A-3, 2-B 등의 알파벳 사용을 금지했다. 심지어는 언론매체에 EU, GDP, WTO 등의 영문표기를 아예 할 수 없도록 조처해 세계화시대 시대착오적인 국수주의라고 비판을 받기도 했다.

20세기 초 서양 열강의 침탈에 반식민지 상태에 놓였던 중국은 근대화의 일환으로 문자개혁을 의욕적으로 추진했다. 높은 문맹률을 낮추고 중국어의 보급을 위해 한어병음과 간체자를 채용하며 어떻게든 서양을 따라 가야 한다는 절박함이 있었다. 심지어는 중국의 대문호 루쉰(魯迅)도 "한자를 버리지 않으면 중국이 망한다(漢字不滅, 中国必亡)"며 한자의 라틴문화를 지지했을 정도다.

그러나 21세기의 중국은 분명 달라졌다. 중화민족주의의 부활을 경계해야 할 정도로 자신들의 문화에 대한 자부심이 커졌다. 알파벳의 활용으로 중국어의 보급과 한자의 디지털화는 적극적으로 추진해 가겠지만 중국인의 사유체제에 서구식 언어가 자리 잡는 것은 좌시하지 않겠다는 중국정부의 의지가 읽혀지는 대목이다.


태그:#한어병음, #주음부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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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베이징에서 3년, 산둥성 린이(臨沂)에서 1년 살면서 보고 들은 것들을 학생들에게 들려줍니다. 거대한 중국바닷가를 향해 끊임없이 낚시대를 드리우며 심연의 중국어와 중국문화를 건져올리려 노력합니다. 저서로 <중국에는 왜 갔어>, <무늬가 있는 중국어>가 있고, 최근에는 책을 읽고 밑줄 긋는 일에 빠져 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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