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책표지 사진입니다.
▲ 책표지 책표지 사진입니다.
ⓒ 민음사

관련사진보기

러셀 컥은 엘리엇을 평함에 있어 버질, 단테, 드라이든, 그리고 존슨이 각기 다른 시대를 지배하였던 것과 같이 지난 반세기는 수줍은 거인 엘리엇의 시대였다고 말한다. 그만큼 지난 20세기는 엘리엇이라는 이름을 접어두고는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그의 명성만큼이나 유명한 것이 그의 대표작 <황무지>이다. 이 시가 처음 출간되었을 당시 이 시는 논란의 중심에 있었다. 혹자들은 새로운 형식의 뛰어난 시가 세상에 나왔다고 찬탄한 반면에 또 다른 사람들은 이 시는 엉터리이며 모순되고 심지어 시라고도 할 수 없다고 말했다.

어찌되었건 그의 시 <황무지>는 20세기의 시라는 평가를 들었고 그것은 그의 시가 가지고 있는 모더니티적인 형식과 시가 담고 있는 드라마틱한 내용에서 비롯되는 것이었다. 그의 시는 많은 시인들에게 영감을 주었고 많은 학자들에게는 연구의 주제가 되어주었다. 모더니티의 강풍이 한번 지나고 간 뒤에도 여전히 그의 시를 포스트모더니즘의 이름으로 둔갑하여 다시 논의되고 있으니 말이다.

사실 문학을 전공하지 않은 범인(凡人)들에게 엘리엇은 어렵기만하다. 신화 인물이 차례로 등장하고 호흡이 길고 거기에 은유와 암시까지 숨어있으니 1연만 읽고도 이것이 시인지 아닌지 당최 알기가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엘리엇의 시 <황무지>는 시의 형식에서 오는 독창성이나 엘리엇의 시가 문학적으로 지니는 가치를 전혀 모르는 혹은 관심도 없는 범인(凡人)에게도 충분히 시사하는 바가 크다. 왜냐하면 엘리엇의 시는 결국 현대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시인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엘리엇이 보는 현대는 그리 아름답지 않다. 아니 아름답지 않다는 말조차 과분한 공간이다. 그가 보는 현대는 절망적이며 현대인들은 추악하기 그지없다. 그들은 눈앞의 것밖에 보지 못하며 탐욕에 차있고 본능적이며 나약한 존재들이다. 그래서 마치 그들은 죽은 땅에서 살아가는 사자(死者)들 같은 존재이다.

살아있으나 살아있는 사람이 아닌 것이다. <황무지>란 결국 이러한 사자(死者)아닌 사자(死者)들이 사는 황폐한 공간인 것이다. 물론 황무지는 개간의 가능성이 존재한다는 점에서 낙관적이기도 하다. 엘리엇이 말하는 바는 바로 거기에 있다. 현대사회는 이처럼 절망적이고 현대인은 나약하고 쾌락적이기만 하나 구원의 가능성은 있다는 것이다. 마치 황무지가 개간을 통해서 비옥한 토지가 되는 것처럼 엘리엇은 시에서 낙관의 가능성을 비추고 있다. 그것이 바로 구원이고 이 구원은 그의 시에서 종교로 환원된다.

죽음이 두려워 점술에 의지하지 말고 쾌락적 삶을 살지 말고 삶을 충만하게 해줄 종교에 의지하며 종교로부터 구원을 얻으라는 것이다. 마치 16세기 바니타스 정물화와 같은 방식의 서술이라는 생각마저 든다. 인생의 허망함과 허무함을 깨우치기 위해 종교의 구원을 얻으라는 메시지를 남겼던 그림이나 현대인들의 무지함과 타락함을 깨우치기 위해 종교에서 답을 찾은 엘리엇이나 전하고자 하는 바는 동일하다. 답은 종교에 있다는 것이다.

20세기 최고의 지성이자 최고의 시인이라고 하는 엘리엇이 나름의 답을 내려주었건만 사실 한 세기가 지난 지금도 여전히 현대인들은 반사자(半死者)의 삶을 살고 있고 현대는 지극히 황무지스럽다. 그것도 개간의 여지조차 보이지 않는 황무지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욱 절망적인 것은 엘리엇의 처방전이 통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권성훈 시인은 그의 시집 <푸른 바다 가재의 전화를 받다>에서 신은 그대로 인데 종교만 진화를 거듭하여 신이 되었다라고 노래한 바 있다. 신은 사라지고 종교만 남은 세상 그리고 그 종교가 권력이 되고 기득권이 되어 더 많은 황무지를 만들어 놓고 보란듯이 높은 건물과 첨탑만을 세운 채 있으니 말이다. 어디 그뿐일까? 때때로 믿음이란 이름으로 타인에게 폭력을 행사하기도 하니 황무지에 사는 불쌍한 현대인들의 구원이 되어주기는 커녕 황무지에 내몰리는 신세로 만들기 일쑤이다.

그러니 묻지 않을 수가 없다. 엘리엇 선생, 우리는 무엇에 의해 이제 구원받고 무엇으로 답을 삼아야 하는 건가요? 믿음이 사라지고 첨탑만 남은 황무지에서 사자아닌 사자들이 쾌락에 그저 하루하루 생존에 목매달고 살아가는 것은 구원마저 사치가 되어버린 세상에 살기 때문이다.

덧붙이는 글 | 수정후 블로그에 중복게재됩니다.



황무지

T. S. 엘리엇 지음, 황동규 옮김, 민음사(2017)


태그:#황무지, #엘리엇, #서평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세상에 대한 소소한 이야기들을 담고 싶습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