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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겨울의 특징이었던 삼한사온의 날씨는 이제 사라지고 삼한사한의 겨울날이 연일 계속되고 있다. 영하 10도 이하의 한파주의보가 익숙해질 즈음 오랜만에 날씨가 풀린다는 기상청 뉴스에 귀가 쫑긋해진다. 한데 날씨가 풀린다더니 낮에도 영하 4도의 날씨다. 허탈한 심정으로 화면을 보는데 강릉 날씨가 '-'표시가 없는 영상의 기온이다. 겨울에 서울, 경기 지역보다 영동 지역이 더 따뜻하다는걸 몰랐던 건 겨울바다가 있어서 더 춥지 않을까 하는 오해에서 비롯된 것 같다.

한파로 심신을 움츠리게 하는 도시 서울을 떠나 영상의 날씨라는 강릉의 동해 바닷가를 자전거 타고 실컷 달리고 싶어졌다. 한 여름날 피서를 위해 동해바다를 찾듯 이번엔 피한을 위해서. 더구나 서울의 자판기와는 차원이 다르다는 강릉 앞바다 안목해변의 자판기 커피맛도 궁금했던 차다. 동서울 버스터미널의 아침 6시 반 첫차에 애마 자전거를 실어넣고 강릉을 향해 출발했다.   

안목해변은 그 이름처럼 소박하고 편안한 바닷가로 가지고 온 고민과 우울함이 다 사라질 것 같다.
 안목해변은 그 이름처럼 소박하고 편안한 바닷가로 가지고 온 고민과 우울함이 다 사라질 것 같다.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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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절하고 편안한 곳, 강릉

3시간여 만에 강릉 버스터미널에 도착, 수수한 터미널 대합실에 앉으면 생각나는 자판기 커피가 간절했으나 안목해변의 커피를 떠올리며 꾹 참는다. 터미널 밖으로 나오니 택시들이 일렬로 줄지어 서있다. 택시 기사님에게 안목해변 가는 길을 물어본 건 길을 몰라서가 아니라 괜히 강릉주민과 말붙이고 싶어서였다. 자전거를 탄 내 모습이 택시 손님이 아닌게 분명한데도 기사님은 자세하고 길게 설명해 주신다.

게다가 정말 오랜만에 들어보는 강릉 아니 강원도 특유의 사투리가 반가워 어떻게 가라는 길 설명은 잘 들리지도 않는다. 군대 시절 친하게 지냈던 강원도 출신의 동기가 떠올랐고 제대 후 연락이 끊긴 그 녀석의 순박하고도 재미있었던 어투가 그리워졌다. 여행자를 푸근하고 정겹게 맞아주는 강릉이 벌써부터 정이 간다.        

안목해변 앞 어느 커피숍 의자에 앉아 바다를 보며 마시던 커피맛이 아직도 생생하게 떠오른다.
 안목해변 앞 어느 커피숍 의자에 앉아 바다를 보며 마시던 커피맛이 아직도 생생하게 떠오른다.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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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박한 기차역인 강릉역에 들르기도 하면서 도시 강릉을 가로질러 동해바다를 향해 자전거 페달을 열심히 밟는다. 이름도 편안한 느낌의 안목해변에 도착하니 정말 다양한 커피숍들과 내가 찾던 커피 자판기가 나타난다. 커피의 갈증을 참아서였는지 자판기 커피의 맛이 더욱 진하고 깊게 느껴진다. 아직 문을 열지 않은 커피숍 의자에 앉아 눈 앞의 푸르른 바다를 보며 마시던 이 커피를 한동안 잊지 못할 것 같다.

눈이 시리도록 짙푸른 바닷가를 거닐다 보니, 벤치에 홀로 앉아 하염없이 바다를 쳐다보고 있는 어느 여인의 뒷모습이 눈에 띈다. 그 모습이 참 아름다워 사진속에 담기 전 미리 양해를 구하려는데, 수줍게 웃으며 승락한 여인의 정체는 인근에 산다는 앳된 얼굴의 고등학생이다. 고민스럽거나 생각할 것이 있을 때 이런 바닷가에 언제든 찾아올 수 있는 강릉 주민들이 부럽다.    

해풍을 막아주는 고마운 소나무를 살리고자 하는 강릉사람들이 좋아졌다.
 해풍을 막아주는 고마운 소나무를 살리고자 하는 강릉사람들이 좋아졌다.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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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르른 파도소리를 들으며 달리다

강릉은 참 위치도 좋은 곳이다. 해안가를 따라 밑으로는 정동진이 있고 위로는 주문진이 기다리고 있으니 나같은 자전거 여행자에겐 어디로 갈까 행복한 고민까지 하게 한다. 오늘은 겨울 경포호수와 시끌벅적한 동네 주문진항을 보러 북쪽으로 달려가기로 한다. 내내 푸른 바다에서 나오는 속시원한 파도소리를 음악삼아 들으며 가는 길이다.

겨울의 찬바람은 내가 사는 서울이나 이곳이나 춥기는 마찬가지인데 강릉 앞바다의 찬바람에는 도시엔 없는 상쾌함이 들어 있다. 귀에 꽂혀 있는 이어폰을 빼버리니 바다에서 들려오는 파도소리와 내 자전거의 체인소리가 어울려 멋진 멜로디로 들려온다. 여기에 영상의 겨울 햇살이 얼굴에 따사로이 비추니 어디 멀리 이국의 바닷가에 온 것만 같다.   

좀 더 여유롭게 바다와 파도와 주변의 풍경을 감상하면서 달리고 싶어 차도가 아닌 사람이 별로 없는 인도위를 천천히 달린다. 그런데 인도위로 사람이 아닌 소나무들이 서있다. 해풍을 막아주는 바닷가의 송림을 그대로 놔두고 인도를 만든 사람들은 누구일까. 강릉이  점점 더 좋아진다.
 
경포해변옆의 너른 경포호수도 이채로운 곳으로 한바퀴 돌아보며 겨울정취를 만끽할만한 곳이다.
 경포해변옆의 너른 경포호수도 이채로운 곳으로 한바퀴 돌아보며 겨울정취를 만끽할만한 곳이다.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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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한 경포해변과 바닷가 옆 호수인 경포호에 다다랐다. 바닷가 모래 위 나무 산책로를 걸어 긴 경포해변을 지나니 커다란 얼음호수 경포호가 나타난다. 산책로와 함께 자전거길도 있어서 한바퀴 달려 보았다. 꽁꽁 얼은 호수 위를 미끄럼타며 걷는 사람들도 있고 산책로의 사람들과 호숫가의 오리들, 나룻터에 얼어붙은 나룻배가 어울려 겨울 정취가 좋다. 경포해변와 경포호수는 매우 넓은 곳인데 말이 따각따각 발소리를 내며 가는 이채로운 마차들도 있고 자전거 대여점들이 있어서 이용하면 좋겠다.

배가 고파져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바닷가에 있는 매점이 눈에 띄어 들어갔다. 도시락을 사먹었는데 양이 작다고 투덜거리며 빵을 또 샀더니 매점 직원이 미안해 하며 종이컵에 커피 한봉지를 넣어 건네준다. 도시락 양이 작은 걸 미안해 하는 아가씨의 착한 마음이 전해져 내 마음까지 훈훈하다. 이 매점은 화장실에서 창밖으로 보이는 바다도 어쩜 그리 예술적인지 소변기 앞에서 두손을 모은 채 한참을 서있었다.

아름다운 바닷가를 초소와 철창에 빼앗기니 무척 아쉽고 억울하다.
 아름다운 바닷가를 초소와 철창에 빼앗기니 무척 아쉽고 억울하다.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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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겨운 언덕동네 주문진

겨울바다를 찾은 사람들이 많은 경포해변을 지나니 그 이름도 정다운 사근진, 순근, 순포해변이 차례대로 반겨준다. 표지판도 아주 작은 이곳은 해변이라기 보다는 포근한 느낌이 드는 작은 바닷가 마을이다. 그런데 이 작은 해변들 사이사이로 군부대의 초소와 철창이 들어서 있다. 아름다운 바닷가를 막아놓은 분단의 표식이 흉물스럽고 주변 풍경과 참 안어울린다. 철창에 빼앗긴 바닷가를 보상해 주기라도 하듯 키크고 울창한 소나무 숲길이 바닷가를 따라 길게 이어진 사이로 달려간다.
 
주문진 언덕동네에 오르면 동해 바닷가 주민들의 삶이 오롯이 느껴진다.
 주문진 언덕동네에 오르면 동해 바닷가 주민들의 삶이 오롯이 느껴진다.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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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와 함께 팔자에도 없는 구제역 소독을 다 받고 영진항을 지나니 드디어 주문진항 표지판이 보인다. 유명한 관광지답게 항구와 주변의 수산시장은 사람들과 상인들로 떠들썩하다. 요즘이 제철이라는 배에 난 빨판이 인상적인 도치와 자꾸만 대야를 탈출하려는 큰 문어들을 구경하면서 주문진항 언덕 위의 등대를 보러 오르막길을 올랐다. 작고 하얀 주문진 등대에 앉아 주변을 둘러보니 바닷가의 언덕동네가 눈에 들어온다.  

언덕동네의 집들 사이로 난 골목길을 따라 구불구불 걸어보았다. 내가 사는 도시의 언덕동네는 때론 처연해 보이기도 하는데, 이곳에는 푸른 바다와 활기 넘치는 항구가 있어서인지 다르게 느껴진다. 이 동네엔 미용실도 아니고 이발소도 아닌 이용소들이 다 있다. 아예 대놓고 '달동네 이용소'라고 써놓은 간판의 가게가 재밌어 여닫이 문을 살짝 열고 핼맷 쓴 얼굴을 빼꼼히 넣어보니 초로의 아저씨가 들어오라고 손짓을 하신다.   

청명한 바다와 호수, 정겨운 항구와 언덕동네 게다가 마음이 따스한 사람들까지 사는 강릉은 단지 좋은 여행지 말고라도 그곳에서 살고 싶은 나만의 목록에 꼭 넣고 싶은 곳이다. 

주문진은 미용실과 이용소가 공존하는 동네다.
 주문진은 미용실과 이용소가 공존하는 동네다.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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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버스터미널에 내려 안목해변 - 바닷가를 따라 주문진까지 달려갔다.
 강릉버스터미널에 내려 안목해변 - 바닷가를 따라 주문진까지 달려갔다.
ⓒ NH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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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1월 22일에 다녀왔습니다. 서울로 돌아올때는 주문진항 부근에 있는 버스터미널을 이용하였습니다.



태그:#자전거여행, #강릉, #안목항, #주문진항, #겨울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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