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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슬을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 온 조선조 헌종, 철종 연간에 양양현감을 지낸 야옹 정기필 선생. 그러나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참으로 암담한 일이 벌어졌다. 양양현감 등을 지냈지만 청렴하기로 소문이 났던 선생에게는 단 한 칸의 집조차 마련할 수 있는 자금이 수중에 없었다는 것이다.

 

거처할 집조차 마련할 수 없는 선생의 딱한 사정을 들은 안의현감은 그 소식을 듣고, 선생을 찾아갔다. 그리고 돈을 마련해 주어 선생이 묵을 집을 마련해 주었다. 그 집이 바로 거창군 위천면 강천리에 소재한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232호인 반구헌이다. 반구란 스스로 자신을 뒤돌아보고, 반성한다는 뜻을 갖고 있다고 한다.

 

 

선생의 청렴을 닮은 집 반구헌

 

현재 반구헌은 사랑채와 대문채만 남아 있다. 사랑채는 정면 5칸, 측변 2칸의 팔작지붕의 민도리집이다. 이 사랑채를 돌아보고 있노라면 야옹 정기필 선생의 마음이 그대로 들어나 보인다. 우선은 사대부가의 상징처럼 넓게 두 칸 이상으로 마련하는 대청이 단 한 칸뿐이다. 대청이 좁고 방을 세 개나 둔 것을 보면, 선생이 많은 사람들과 교류하기를 즐겼던 것을 알 수 있다.

 

즉 사람들이 찾아오면 기거를 할 수 있는 방이 필요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청렴한 그의 성품 만큼이 이 사랑채는 여러 곳에서 색다르다. 우선은 사랑채를 바라보고 좌측의 방 앞에는 툇마루를 높이고 난간을 둘러 개방된 정자방을 만들었다. 이 방에 앉아 앞에 놓인 작은 연못을 보면서 사람들과 교류를 한 것은 아닐까?

 

사랑채에 남아있는 상량문에 따르면 이 반구헌은 1870년경에 지어진 것으로 보인다. 누마루 방은 그 밑으로 깊은 부엌을 두어 열기가 빠져 나가는 것을 막고 있다. 그리고 뒤편으로 돌아가면 방 2개를 동시에 난방을 할 수 있도록, 뒤편 중앙에 아궁이를 설치하고 사랑채 앞으로 굴뚝을 내었다. 아마 연료를 줄이기 위한 방법이었을 것이다.

 

대문채 담벼락에 붙은 굴뚝

 

안채와 중문채, 헛간체 등은 보이지 않는 반구헌. 아마도 선생의 청빈한 생활로 볼 때, 처음부터 사대부가의 집처럼 잡다한 건물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대문채를 돌아보면 모두 5칸으로 마련을 했다. 중앙에는 출입문인 솟을대문으로 올리고, 양편으로는 두 칸씩 나누어 좌측은 광과 방을, 우측으로는 두 칸 모두를 방으로 꾸몄다.

 

이렇게 대문채에 세 개의 방을 두었다는 것은, 대문채의 활용을 극대화시켰다는 것을 뜻한다. 결국이 대문채를 중문채, 광채 등을 복합적으로 사용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집 한 칸조차 마련할 수 없었던 선생이기에, 대문채와 사랑채를 갖고 사대부가의 위엄을 지켜낼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대문채의 외벽은 이중으로 방화벽을 쌓았으며, 그 벽에 높지 않은 굴뚝이 붙어있다. 방화벽의 높이를 넘지 않는 굴뚝의 모습에서 선생의 겸손을 배운다. 야옹 정기필 선생의 반구헌은 동계 정온 선생의 집과 담을 사이로 붙어있다. 동계의 4세손인 정희량이 이인좌의 난에 연루가 되어, 자손들이 뿔뿔이 흩어졌다. 그 뒤 정기필 선생이 이곳에 자리를 잡으면서, 다시 후손들이 모였다는 것이다. 현재 이곳에 거주하는 동계의 후손들은 대개 정기필 선생의 자손이라고 한다.

 

자신의 삶을 뒤돌아본다는 반구헌. 선생은 이 정자방 마루에 앉아 무엇을 되돌아 보았을까? 나도 그 툇마루에 올라 지난 날을 되돌아 본다. 세상을 살아 온 지난 날을 반성하면서.


태그:#반구헌, #거창, #문화재자료, #정기필, #청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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