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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앞선 글에서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정의의 기준에 관한 혼란에 대해 이야기 했습니다. 공정사회정책의 사실상의 침묵, 국회 예산안의 폭력적 통과가 정의라는 김무성 한나라당 원내대표의 발언, 한식세계화가 영유아들의 건강보다 중요하다는 정부의 정책결정과 같이 일반인의 상식으론 잘 이해되지 않는 주장이 정의라고 난립하는 이런 상황에서 "도대체 정의란 무엇인가?"라고 물을 수밖에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이런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 "정의가 무엇인지"에 대해 계보학이란 이름 아래 비판적으로 탐구해 보겠다고 했습니다. 계보학이란 말에 너무 낯설어하지 말고, 단지 우리가 기존에 당연하다고 여기는 정의관을 비판적으로 살펴본다는 정도로 이해해 주었으면 합니다.

그럼 이제 이 탐구를 아주 유명한 소크라테스와 트라시마쿠의 논쟁에서 시작해보겠습니다. 이 논쟁은 다음과 같은 주요한 질문을 제기합니다.

"정의는 강자들이 만드는가?"
"법은 강자들이 정의란 이름으로 만들어 놓은 자기 이익을 위한 수단인가?"
"만약 그렇다면, 법을 지키는 일은 정의로운가?"

소크라테스와 트라시마쿠스

몇몇 여러분에게는 익숙할 수 있는 소크라테스(Socrates)와 트라시마쿠스(Thrasymachus)의 정의 논쟁은 플라톤의 <국가> 제1권부터 바로 등장합니다. 이 논쟁에서 중요한 또 한 명의 철학자는 글라우콘(Glaucon)입니다. 그렇다면, 우선 이 정의 논쟁에 뛰어든 인물부터 살펴볼까요?

유명하다 못해 이웃집 아저씨를 부르는 소리처럼 들리는 소크라테스는 고대 아테네에서 부유한 젊은 친구들에게 인기가 드높았던 가난한 철학자였습니다. 젊은 친구들 사이에 인기가 좋았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기존의 질서나 전통을 거부하는 무엇인가가 소크라테스에게 있었다는 것을 살짝 떠올릴 수가 있지요(플라톤도 글라우콘도 이 부유한 젊은 친구들 사이에 섞이어 있었답니다).

트라시마쿠스 역시 소크라테스처럼 소피스트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철학이 진리를 찾는 일이란 생각을 확고히 가지고 있다면 소피스트의 철학이란 말은 사실상 좀 모순되게 들릴 수도 있습니다. 소피스트들은 뭐가 진정한 진리인지 그다지 상관하지 않았기 때문이죠. 이들의 관심사는 언변술, 소위 말해 논쟁을 이기는 법이었답니다.

제가 소크라테스도 소피스트였다고 말하는 것은 소크라테스가 사용한 철학의 방법, 바로 문답법 때문이랍니다. 문답법 역시 일종의 언변술로 볼 수 있는데, 다만 차이점은 철학적 진리가 무엇인지를 찾기 위해 쓰였다는 점이지요. 트라시마쿠스는 그리스 말로 "마구 우기는 사람", "격렬하게 논쟁을 벌이는 사람"을 뜻한다고 하는군요.

결국 격렬하게 자신의 주장을 우겨대는 인물이란 뜻이지요. 제가 이 논쟁과 관련해 중요하다고 보는 또 다른 사람은 글라우콘인데요, 놀랍게도 플라톤의 형이라고 하네요. 전 이 사실을 처음 알게 되었을 때 뭐라고 해야할까... "플라톤도 형이 있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답니다. 글라우콘에 대해선 나중에 좀 더 자세히 소개할게요. 

아, 이들 간의 정의 논쟁에 들어가기 전에 알려드릴 내용 하나는, 박종현 선생님의 우리말 번역본에는 '정의'가 '올바름'으로 번역되어 있다는 겁니다. 이 점 유의하세요. 그럼 이제 본격적으로 이들 간의 정의 논쟁을 살펴볼까요.

트라시마쿠스, 강자의 이익이 정의라며 소크라테스를 비웃다

소크라테스가 하루는 아테네 근처의 항구에서 벌어진 축제 구경을 갔답니다. 그 구경을 다하고 시내로 돌아가는 길에 폴레마르코스라는 사람을 만나 이 친구의 집에 가게 되었다는 군요. 그리고 그곳에서 폴레마르코스의 아버지인 케팔로스옹과 이야기 끝에 뭐가 정의인지를 두고 서로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답니다.

재산이 있어야 사람이 올바르게 처신할 수 있다느니, 각자에게 갚을 것을 제대로 갚는 것이 정의라느니라는 케팔로스 옹의 이런 저런 주장을 두고 소크라테스가 답을 하고 있었답니다. 그때 소크라테스의 문답법을 지켜보며 답답해하던 트라시마쿠스가 벌떡 일어나, 소크라테스에게 빙글빙글 돌려대지 말고 똑바로 정의가 뭔지 말해달라고 화를 냅니다. 그러자 겁에 질린 척 하던 소크라테스는 특유의 능청스러운 기질을 발휘해, "난 진짜 답을 모르니 트라시마쿠스 자네부터 말해보시게"라고 말합니다. 문답법의 전형적인 수법이지요. "난 모르니까 너부터 말해봐."

가엾은 물고기마냥 걸려든 트라시마쿠스는 자신의 대답에 돈까지 요구해 대며 이렇게 말합니다. "저는 강자의 이익이 정의라고 생각합니다." 이름대로 말하자면, 마구 우겨대는 듯 보이는 이 주장. 그런데 요즘 우리 사회를 보면 아주 공감이 제대로 가는 주장을 펼칩니다. 그렇다면, 왜 강자의 이익이 정의라고 트라시마쿠스는 말했을까요? 거기에는 참으로 합당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럼 트라시마쿠스의 주장을 들어볼까요?

"적어도 법률을 제정하는 데 있어 각 정권은 자기 이익을 목적으로 합니다... 일단 법 제정을 마친 다음에는 이 법, 다시 말해 정권 자기들에게 이익을 되는 것을 통치를 받는 사람들에게 정의로운 것인 듯 공표하고서는 이를 위반하는 자들을 정당하지 못한 일을 한 자들로 취급하고 처벌하는 것이죠. 그러니까 보세요. 모든 나라에서 정권의 이익이 정의이고, 아주 명백하게 이 정권이 힘을 행사하기에 정의는 더 강한 자의 이익으로 귀결하는 겁니다...말하자면, 정의란 실은 더 강한 자 및 통치자의 이익이되 복종하며 섬겨야 하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자신에게 해로운 것이지요." 

이런 트라시마쿠스의 주장에는 확실히 요점이 있습니다. 어느 사회를 보더라도 법을 만드는 이들은 엘리트들입니다. 트라시마쿠스의 주장은 이런 엘리트들이 법을 만드는 이상 법은 언제나 엘리트들에게 유리하게 되어있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엘리트들은 세상에 말합니다. "법이 정의다." 바로 자기의 이익을 법과 정의로 포장하는 일종의 이데올로기의 조작이지요. 트라시마쿠스의 요점은 강자들이 자신에게 유리하도록 정한 법을 약자들이 따르게 되면, 결국 강자들의 이익에 봉사하는 셈이 된다는 것입니다. 결국 정의란 강자들의 이익이라는 뜻이지요.

이후 트라시마쿠스는 진정한 전문가는 편견 없는 공정한 이들이란 소크라테스의 언변에 말려, 읽는 사람에 따라서는 좀 황당하고 허무하리만치 쉽사리 자신의 주장이 잘못된 것이라 인정하는 지경에 이르게 됩니다. 이 복잡한 과정을 좀 간략하게 그려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강자의 이익이 정의다"라는 말을 들은 소크라테스는  트라시마쿠스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집니다.

소크라테스 : "강자들도 실수를 하는가?"
트라시마쿠스 : "그들도 사람인 이상 실수를 하겠지요?"
소크라테스 : "그럼 강자들이 애초에는 자기 이익이라고 생각했던 게 오히려 나중에는 정반대로 드러나는 걸 법률로 만들 수도 있겠네?"
트라시마쿠스 : "어... 그렇지요!"
소크라테스 : "그럼 강자들에게 이익이 아닌 게 법률로 정해질 수 있고 그게 법률인 이상 이행하는 게 맞지?"
트라시마쿠스 : "엉? 무슨 소리신지... 진정한 전문가라면 실수를 하지 않는 겁니다. 지식이 달리는 사람이나 실수를 하지요."
소크라테스 : "그럼 전문가들은 제대로 된 지식을 가지고 있는 이들이겠네? 그런 제대로 된 지식을 가진 이들은 자기 이익에 편중된 법을 만들지 않겠지?"
트라시마쿠스 : "……."

트라시마쿠스는 중간에 소크라테스에게 궤변을 늘어놓는다고 따지지만, 결국 어이없이 소크라테스의 주장을 받아들이고 맙니다. 

법은 강자의 이익을 재생산하는가?

하지만 정말 트라시마쿠스의 주장이 잘못된 것일까요? '트라시마쿠스의 주장이 현실적이다'는 변명만으로 트라시마쿠스의 편을 드는 것은 좀 빈약한 주장이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소크라테스식으로 생각해보는 것은 어떨까요? 

소크라테스의 대화편에 명확히 드러나지 않지만, 우리가 "어떤 상황이라도 법을 지키는 것이 정의로운가 아니면 법을 어기는 것이 정의로운가"를 소크라테스에게 묻는다면, 소크라테스는 법을 지키는 것이 정의롭다고 말할 것입니다. 물론 소크라테스가 도시의 신을 배격하고 젊은이들을 잘못된 길로 이끌고 있다는 죄목으로 재판을 받는 과정을 그린 <변명>에서 소크라테스는 성찰하는 삶을 그만두라는 도시의 명령을 따를 수 없다며 거부합니다.

하지만 감옥에 갇힌 자신을 빼돌리기 위해 찾아온 크리토와의 대화를 그린 <크리토>에서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도시를 설득하지 않고 도망갈 수는 없다는 명목으로 도시의 법을 받아들입니다. 만약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도시의 사람들이 잘못된 일을 저지를 때 이를 설득하지 않고 도시를 떠난다면, 이는 도덕적으로 옳지 못하고 나아가 부정의한 일이기에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이지요. 한때 시민저항운동이 불꽃을 일으켰던 60년대 미국에서는 이런 소크라테스의 행동이 정당한 저항권 행사의 예로 이해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소크라테스의 저항권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는 행동이 법 자체를 거부한 것은 아닙니다. 소크라테스가 거부한 것은 법 혹은 법을 지키는 일 그 자체가 아니라, 철학하는 삶을 그만두라는 도시의 구체적인 명령이었습니다. 소크라테스가 법 자체를 거부하지 않았다는 것은 소크라테스의 도덕철학을 보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소크라테스의 도덕철학은 우리가 기존에 생각하는 도덕과는 조금 다릅니다. 우리는 선한 일을 많이 하는 것이 도덕이라고 믿지만 소크라테스의 도덕철학은 선한 일을 더 많이 행하는 것이 아니라 악한 일을 덜 행하는 것이 핵심입니다. 도덕의 핵심적 질문이 "어떤 게 더 선한가"라기보다는 "어떤 일이 덜 악한 일인가"가 되는 것이지요.

법을 지키지 않아 생기는 무정부 상태보다 부당하더라도 법을 지키는 쪽이 해를 덜 만들어낸다는 상식에 근거해 생각해볼 때 소크라테스의 선택은 당연히 법을 지키는 쪽에 있을 것입니다. 게다가 부정의를 부정의로 맞서는 것은 더 정의롭지 못하다는 소크라테스이니 당연히 법을 지키는 쪽을 택할 것입니다. 만약 강자들이 자신에게 이익이 되도록 정한 것이 법이다는 트라시마쿠스의 말이 사실이라면, 소크라테스의 정의관을 그대로 행한다면 결국 트라시마쿠스의 말대로 강자들의 이익이 계속 재생산되는 쪽에 암묵적으로 동의하고 기여하는 셈이 되고 맙니다.

이런 현상을 구체적 예를 들어 살펴보도록 하지요. 얼마 전 정부는 행정고시를 사실상 폐지하는 개혁안을 내어놓은 적이 있습니다. 행정관료 충원에 민간 전문가를 50% 이상 채용하겠다는 것이었지요. 겉으로 보면 딱딱한 기존 제도를 유연한 것으로 만드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이런 제도가 쉽게 엘리트들의 이익이 재생산되는 것으로 쉽게 전환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사건이 행정고시가 아닌 외교부 직원 채용에서 있었지요. 바로 유명환 전 외교부 장관의 딸 특채 사건입니다. 외교부 특별 채용에 현직 장관 딸이 지원했고, 딸의 합격을 위해 지원 자격을 수정하고 특정 인사 담당자가 거의 만점에 가까운 점수를 줘서 선발한 사건이었지요.

보수신문인 <조선일보>는 이 사건을 정리하며 10월2일 자에 다음과 같은 기사를 실었습니다.

"외교부가 특채 과정에서 유명환 전 장관 딸을 포함해 전직 외교관, 고위직 자녀 등 10명에게 특혜를 준 것으로 확인됐다. 유 전 장관 딸 외에 그동안 제기됐던 특혜 채용 의혹 대부분이 사실로 확인된 것이다. 행정안전부는 1일 "특채된 외교관 자녀 8명을 포함해 의혹이 제기된 17명에 대한 감사를 한 결과 10명의 특채 과정에 문제가 있었다"고 밝혔다. 유 전 장관의 딸은 올해뿐 아니라 유 전 장관이 차관이던 2006년에도 계약직에 응시하면서 텝스(영어시험) 점수를 2주 늦게 제출했지만 인사 실무자는 이를 그대로 받아준 것으로 조사됐다. 외교부는 또 같은 해 5급 특채를 진행하면서 전직 대사의 딸인 홍모씨가 탈락하자 5급 특채 합격자들을 6급으로 발령내고 다시 홍씨를 5급 공무원으로 선발하기도 했다."

이 보도를 보면 유명환 외교부 장관 딸 특채보다 조금 더 어이없는 대목이 보입니다. 여러분도 보이지요? 전직 대사 딸 홍모씨의 사례입니다. 홍씨를 위해 이미 선발된 5급 합격자를 6급으로 발령내고 홍씨를 선발했다는 것입니다. 이미 선발된 5급 합격자가 전직대사 딸을 위해 6급직으로 내려가게 된 이 경우는 공직에의 공정한 접근기회라는 정의의 원칙과 연결된 문제가 되겠지요.

이 사건을 따라 밝혀진 또 하나의 문제는 바로 외교부의 2부 선발제도입니다. 외교부는 언어 능력과 현지지식이 중요한 탓에 이에 능통한 인재를 외교관으로 선발하는 2부 제도라는 것을 두고 있습니다. 그런데 공식적으로 제시된 자료에 따르면 이 2부 제도의 합격자의 40% 이상이 외교관 자녀들이라고 합니다. 결국 외교관이란 직업이 부모와 자식이 물려받는 공직이 되버린 거지요.

이처럼, 유명환 전 외부교 장관 딸의 특채, 전직 대사 딸의 특채 및 특채를 위한 공직 접근 기회차별, 외교부 2부 선발에 외교관 자녀들의 집중선발과 같은 이런 상황을 결과적으로 해석해 본다면, 강자들이 자신들에게 이익이 되도록 법을 만든다는 트라시마쿠스의 주장이 설득력을 얻게 됩니다.

더 나아가 이 문제는 어떤 특정한 공직자의 딸이나 아들로 태어났다는 개인적, 사회적 우연성이 정당한 공직접근기회의 이유가 될 수 있느냐는 문제를 담고 있습니다. 실제 개인적이고 사회적이 우연성인 공정한 분배기준이냐는 문제와 얽힌 가장 큰 이슈가 바로 재산권입니다. 이런 재산권은 정당한 "취득"자가 부모라면 그 부모가 정당한 "이전"의 권리를 행사할 수 있기 때문에 자신에게 재산을 주고 싶은 이에게 물려줄 수 있는 권리가 성립합니다. 그러나 대체적으로 선진국의 경우 재산상속세에 대한 세금이 높은 이유는 물려받는 이의 입장에서 보아선 상속 자체가 사회적 우연성 속에 결정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쉽게 말해 부모의 취득과 이전의 권리를 인정하되, 물려받는 자식의 사회적 우연성에 가중치를 부과한 셈이 되는 것이지요.

그러나 부모가 소유한 재산과는 달리 공직에 대한 접근 기회는 부모의 소유가 아닙니다. 누구나 명확하게 알고 있듯 재산은 사유물이지만 공직은 공적 자산입니다.  만약 이런 접근 기회를 이미 특정 공직을 차지한 부모가 자기 자식에게 일방적으로 유리하도록 만든다면, 이들 부모는 공직을 자신의 사적 소유물로 여기는 셈이 됩니다.

공직 자체가 사적 소유물이 아니라는 점에서, 부모가 자신에게 공직 접근 기회를 더 유리하게 열어주는 것은 <정의론>에서 롤스가 말하듯 정의의 원칙을 위반하는 것이 됩니다. 이런 정의의 원칙이 더 자주 위반될수록 법은 강자의 이익이란 편견이 확산되고, 이런 위반이 법적으로 처벌되지 않은 수록, 정의는 법을 만드는 강자들이 결정한다는 트라시마쿠스의 주장이 힘을 얻을 것입니다.  

소크라테스의 딜레마

만약, 이런 사례들에서 볼 수 있듯 정치인들과 엘리트들이 의도적으로 만들어 놓은 법의 결과라면 그런데도 불구하고 법은 지키는 일이 덜 해로운 결과를 낳기에 지켜야 한다면, 이를 정의라 할 수 있을까요? 엘리트들이 법을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만들 것이란 트라시마쿠스의 전제를 받아들이며 소크라테스의 정의관을 추론해 따라가다 보면 법을 지키는 일이 강자의 이익에 암묵적으로 동의하게 되는 일이란 딜레마를 피할 길이 사실상 거의 없습니다.

그러기에 소크라테스가 트라시마쿠스의 논변에서 집요하게 파고드는 부분이 법을 만드는 이들의 진정성과 이런 진정성이 있는 자들만을 전문가라고 부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결국 트라시마쿠스는 진정한 전문가는 편견 없는 공정한 이들이기에 공정한 법을 정할 것이란 소크라테스의 언변에 말려들고 맙니다.

만약 소크라테스의 말이 맞다면, 앞서 일어난 일련의 사례들을 볼 때 현재 우리 사회에서 법을 만드는 이들이 진정한 전문가가 아니라는 결론이 나오거나, 그들이 정할 때는 공정하게 정했다 할지라도 나중에 적용되면서 사실상 엘리트들의 이익에 영합할 수밖에 없는 사회구조적인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이 경우 제기되는 문제는 사회구조가 엘리트들의 의도와 정말 다르게 움직이느냐가 될 것입니다. 어떤 경우라도 좀 서글프지요.

법을 만드는 자가 정의를 결정하는가?

지금까지 이야기 해 본 것을 토대로 몇 가지 질문을 해 봅니다. 물론 가장 기본적인 질문은 "법을 정의라 할 수 있는가?"입니다. 트라시마쿠스가 제기하는 논변은 법이 정의와 일치하지 않는 부분이 있다는 정도가 아닙니다. 트라시마쿠스의 정의론이 담고 있는 함의는 현실에서 "정의는 법을 만드는 자가 결정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트라시마쿠스의 말이 현실적으로 맞는 것이기에 이것을 정의라고 받아들여야할까요? 정의를 판단하는 자, 정의를 결정하는 자, 혹은 정의를 형성하는 자는 누가 되어야 하는 것일까요? 만약 트라시마쿠스에 맞서 일반대중이라고 한다면, 대중의 여론이 정의가 되는 것일까요? 아니면, 정의란 법을 만드는 자와 법을 만들 수 있도록 허락한 자들 간의 (변증법적) 상호작용 속에서 생겨나는 또 다른 어떤 것일까요?

저 역시 답을 할 수 없는 질문이긴 하지만, 이 질문에 대해 생각해볼 때 너무 복잡한 논리를 따지기보다는 우리가 공유하고 있는 상식에서 찾아보는 것이 더 좋을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결국 정의의 토대는 서로가 인정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일 테니까요.  

저는 유명환 전 장관 딸의 특채사건을 보며, 정의는 "법 자체가 아니라 법의 적용에 있는 것은 아닌가?"라는 생각을 해 봅니다. 저는 이 사건의 불법성 여부를 좀더 확실히 알아보기 위해 몇몇 대학에서 법을 가르치는 친구에게 "유명환 전 외교부 장관 딸 채용 사건이 불법인지, 아니면 적법한 법의 절차를 따랐지만 국민정서에 반하게 된 사례인지, 더 나아가 법적으로 처벌이 불가능한 사안인지"를 물었습니다.

그 친구는, 법언 중에 '누구도 자기 일을 자기가 처리할 수 없다'는 법이 내세우는 정의의 원칙을 중심으로 답해 주었습니다. 이 원칙에 따르자면 공직자가 자기 딸의 채용문제에 개입했다면 불법성이 크다는 것이었습니다. 사람을 채용하는 일은 사람의 주관이 많이 개입되는 일이라 개입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면 충성하는 몇몇 간부들의 문제로 축소될 것이지만, 재량이 일탈·남용되면 위법한 재량행사가 되며 이 사건은 거의 범죄 수준에 이른 정도로 보인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검찰이 기소하지 않는 이상 형사처벌은 안 될 것이고 관련자들이 신분상 불이익을 받는 징계로 마무리 될 것이라고 하더군요. 결론적으로 불법성도 크고 국민정서에도 반한 사건이라는 것이 그 친구의 소견이었고, 이 친구의 말대로 관련자들이 신분상 불이익을 받는 징계로 이 사건은 마무리 되었습니다.     

한 사람의 법적의견을 대표의견으로 내세우는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는 피하겠습니다. 하지만 이 사건이 드러났을 때 여론을 보면 다수의 시민들이 이를 불법이라 인식하고 있고 이런 재량행사에 상대적 박탈감을 심하게 느끼고 있다는 점은 분명한 듯합니다. 이런 언급을 두고 정의와 다수의 상대적 박탈감 사이에 어떤 명확한 관계가 있는지 질문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정의라는 것이 반드시 다수의 공감과 일치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일정 시간이 지나도 다수의 공감을 얻지 못하는 정의의 원리는 정의로써 사회내에서 그 역할을 할 수 없게 되지 않을까요? 예를 들어 동성애자의 권리도 소수의 지지에서 시작되었지만, 여러 사회 내에서 다수자의 정의감에 호소하며 그 공감대를 넓혀가면서 그 지지기반을 조금씩 다져나가고 있는 현실에서 이를 쉽사리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앞서 언급했듯이, "누구도 자기 일을 자기가 알아서 처리할 수 없다"는 것이 법이 내세우는 정의의 원리라는 점입니다. 실제로 삼권분립이라는 원칙도 법을 세운 자가(입법부) 법을 운용하거나(행정부) 법을 판단(사법부)할 수 없도록 하자는 데 있습니다. 법을 세운 자가 법을 운용하거나 판단하게 되면 법을 남용하게 되기 때문이지요. 이런 점에서 유명환 외교부 장관의 사례는 법률로 처벌되지 않았다 할지라도, 일반 시민들의 정의감뿐만 아니라 법적 정의 역시 위반한 것으로 보아도 좋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사건은 검찰이 기소하지 않아 그 불법 여부를 판단할 수조차 없는 상황입니다. 이런 불기소가 정당한 법의 적용인가는 한 사회의 정의감의 문제와 연결될 수 밖에 없습니다. 사회적 공감대를 얻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G20 포스터에 쥐그림을 그렸다는 이유로 검찰이 당사자를 공안범으로 몰아가는 현실의 한편에서, 이렇게 고위공직자들이 시민들의 정의감을 침해하고 법을 어긴 상황에 대한 부당성이 사회적으로 커다란 공감대를 얻고 있는데도 법이 그 불법 여부조차 묻지 않는다면, 고위공직자들이 법 위에 존재하며 법은 누구에게나 평등한 것이 아니란 사회적 편견을 강화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정의감의 토대가 반복된 사회적 학습의 결과물이란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만약 이런 법의 적용이 지속된다면, 법이 강자들의 편익이라는 트라시마쿠스의 주장에 반박할 근거를 우리사회가 잃을 지도 모를 일입니다.

오늘은 여기에서 마무리하려 합니다. 다음 편에선 트라시마쿠스의 주장이 좀 더 격렬하게 나타난 칼리클레스에서 시작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어이없이 트라시마쿠스가 소크라테스에게 굴복한 이후 차근차근한 논변으로 소크라테스를 궁지로 몰아넣으며 등장하는 글라우콘의 주장에 대해 살펴볼 것입니다. <반지의 제왕>이란 영화보셨지요. 그 이야기가 바로 이 에피소드와 얽힌 것이랍니다. 


태그:#트라시마쿠스, #정의,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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