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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원까지 오는 부부간 성폭행 사례들은 대부분 별거중이거나 이혼 직전 혹은 사실상 이혼 상태에서 발생한 경우가 많았다. 사진은 부부간의 문제를 다룬 드라마 <사랑과 전쟁>의 한장면.
 법원까지 오는 부부간 성폭행 사례들은 대부분 별거중이거나 이혼 직전 혹은 사실상 이혼 상태에서 발생한 경우가 많았다. 사진은 부부간의 문제를 다룬 드라마 <사랑과 전쟁>의 한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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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부강간 두 번째 이야기다. 먼저 지난 기사에서 다룬 내용을 살펴본다.

'1970년 대법원은 정상적인 부부사이에는 강간이 성립될 수 없다는 판결을 내렸다. 이 판결은 당시 사회인식을 단적으로 보여주었고 또한 사회에 영향을 미쳐왔다.

그런데 2004년 서울중앙지법이 부부간 성폭력을 강제추행으로 단죄한데 이어 2009년 1월 부산지법은 최초로 부부강간을 인정하는 판결을 선고한다. 법원의 시각도 바뀌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대법원의 입장은 바뀌지 않았다.'

2009년 1월 부산지법 판결 한달 뒤인 2월 대법원은 또다른 부부강간 사건을 선고한다. 먼저, 사건의 내막인즉 이렇다.   

[사례 1] A씨(남)와 B씨는 부부로 살다가 A씨가 장기간 성폭력과 폭행을 일삼는 바람에 이혼을 한 경험이 있었다. 그러다가 A씨의 간곡한 요구로 두 사람은 혼인신고를 하고 재결합하였으나 다시 두 달 만에 별거 상태에 들어간 후 결국 이혼하기로 합의하게 된다. 

법원에 협의이혼 서류를 접수한 후 A씨는 B씨를 찾아와 마지막으로 하루만 함께 보내자고 부탁하였다.  B씨가 차마 매정하게 거절할 수 없어서 부탁을 들어준 게 화근이었다. 그날밤 다른 가족들이 모두 돌아가고 단둘이 남게 되자 A씨는 갑자기 야수로 돌변하였다. 그는 B씨가 성관계를 거절한다는 이유로 머리채를 잡고 칼로 위협하여 반항하지 못하게 굴복시킨 다음 성폭행하였다. 이 장면을 카메라로 찍기까지 하였다.

A씨는 2008년 1심(의정부지법 고양지원)에서 성폭력처벌법위반(특수강간, 카메라등이용촬영)으로 징역 6년을 선고받았다. 항소심도 같았다.

"혼인관계 파탄났다면 처도 강간죄의 객체"

A씨의 상고로 사건은 대법원으로 올라갔다. 2009년 2월 선고. 결론도 결론이지만 부부강간을 바라보는 대법원의 판시가 주목을 받는 순간이었다(참고로 대법원 판결은 하급심의 결론을 뒤집을 수 있으므로 하급심은 대법원 판례에 사실상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가장 최근 대법원 판례이므로 문장을 유심히 들여다보자. 오해의 소지를 없애기 위해 쟁점 부분을 원문 그대로 인용한다.

"혼인관계가 존속하는 상태에서 남편이 처의 의사에 반하여 폭행 또는 협박으로 성교행위를 한 경우 강간죄가 성립하는지 여부는 별론으로 하더라도, 적어도 당사자 사이에 혼인관계가 파탄되었을 뿐만 아니라 더 이상 혼인관계를 지속할 의사가 없고 이혼의사의 합치가 있어 실질적인 부부관계가 인정될 수 없는 상태에 이르렀다면, 법률상의 배우자인 처도 강간죄의 객체가 된다(대법원 1970. 3. 10. 선고 70도29 판결 참조)." 

제일 뒷 단락, '배우자인 처도 강간죄의 객체가 된다'는 부분만 보면 마치 부부 강간을 인정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문장을 전체적으로 뜯어보면 법적으로만 부부일 뿐 실제로 부부관계로 볼 수 없는 특수한 상태에서만 인정하겠다는 말이다. 70년 대법원 판결과 본질적으로 달라진 게 없었다. 다시 쉽게 풀어보자.

'부부 강간이 성립되는지는 나중에 얘기하자. 다만, 법률상 부부라도 부부관계가 완전히 깨져서 남남 사이와 마찬가지라면 (부부라고 할 수 없으므로) 강간이 인정된다.'

사실 법원까지 오는 부부간 성폭행 사례들은 대부분 별거중이거나 이혼 직전 혹은 사실상 이혼 상태에서 발생한 경우가 많았다. 이 사건도 그랬고 전후의 사건들도 마찬가지였다.

대법원도 이 사건의 당사자인 A씨와 B씨처럼 이미 이혼소송중이거나 그에 버금갈 정도로 혼인파탄 상태인 부부에게는 강간이 성립될 수 있다고 판시한 것이다. 논리적으로 생각해보아도 어렵지 않게 내릴 수 있는 결론이다.

하지만 대법원은 판단 범위를 더 넓혔어야 마땅하다. 많은 사람들은 이미 깨져버린 부부 말고 정상적인 부부 사이에서도 강간이 성립하는지 대법원의 판단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대법원은 약 40 년 전인 1970년 판례(사건번호 70도29)를 따른다면서 부부 강간에 대한 판단을 다음 기회로 미룬 것이다. 더구나 선고 한 달 전에 부산지법에서 대법원의 판단과 완전히 다른 판결이 나온 상태라 아쉬움은 더 컸다.

대법원 판결이 아쉬운 까닭

그후로도 부부강간은 드물게나마 법의 심판대에 선다. 특이할 점은 대법원의 '애매한' 태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하급심 판결에서는 부부강간을 인정하는 추세라는 것이다. 별거나 이혼이 전제되지 않은 부부 사이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사례 2] 20대 초반 부부 얘기다. 아내 C씨는 아기에게 젖먹일 시간이 궁금해서 남편 D씨에게 언제 우유를 먹였는지 물어봤다. 영화를 보고 있던 D씨는 영화감상 방해를 받았다는 이유로 짜증을 냈고 두 사람은 다투게 되었다. C씨는 급기야 "더이상 이렇게 살기 싫다. 나가겠다"고 소리쳤다.

화가 난 D씨는 "움직이면 아기를 다치게 하겠다"고 협박하면서 막았다. 그리고 성관계를 요구하였다. C씨가 싸움 중에는 싫다고 뿌리쳤는데도 D씨는 가위로 때리고 옷을 찢어 버렸다. 그는 우는 아내에게 "바람을 피우지 않는다면 나랑 해야 한다"며 때려서 반항을 못하게 한 후 성폭행을 하였다.

인천지법은 지난 7월 남편 D씨에게 강간상해죄를 적용, 징역 3년을 선고했다. 법원은 판결에서 "혼인한 부부는 상대방의 성적 요구에 응할 의무는 있지만 부부관계에 있어서도 성적자기결정권은 여전히 보호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하급심에선 부부강간 인정 판결 등장 

법원은 "평생을 함께 하기로 약속한 배우자에게 인격체로서 대우받지 못한 처가 느낄 절망감과 수치심, 모멸감은 제3자에게 강간당한 여성의 정신적 고통보다 결코 못하지 않을 것"이라며 "부부간의 성이 내밀한 사생활 영역이더라도, 명백한 강간행위를 국가가 더 이상 방관하지 아니하고 처벌의 대상으로 삼는 것이 결코 부당하다고 볼 수 없다"고 판시했다. 2009년 부산지법과 같은 시각이다. 이 사건은 이번달 항소심 선고를 앞두고 있다.

지난 10월에도 아내를 성폭행한 남편에게 징역 6년이라는 중형이 선고되었다. 이 사건은 평소에도 아내를 상습 폭행하던 남편이 별거중인 아내를 찾아가 강간이 아닌 강제추행의 방법으로 심각한 성적 학대를 한 사실이 법원에서 인정된 사건이다. 대구지법 김천지원은 "가학적 변태적 행위로 피해자에게 극도의 성적 수치심을 주었다"며 중형 선고 배경을 밝혔다. 이 사건도 2심 진행 중이다.

이렇게 하급심에서 부부강간이나 성폭행에 대해 유죄를 인정하는 추세인 점을 보면 조만간 대법원에서도 부부강간에 대한 판단이 내려질 것으로 보인다.

부부강간을 우려하는 목소리에 대하여

그 전에 진지하게 다시 생각해보자. 부부 강간은 인정되어야 하는가. 

우선, 부부 강간을 인정했을 때 부작용을 걱정하는 목소리가 있다. 첫째 가정이 깨지지 않을까, 둘째 악용되지는 않을까, 셋째 법이 가정으로 함부로 들어와도 될까. 

여기에 대해선 이렇게 답변할 수 있겠다. 첫째 부부간 (성)폭행이 공공연하게 자행되는 가정은 이미 깨진 것이나 다름없다. 둘째 악용을 걱정할 정도면 이미 정상적인 부부 사이라고 보기 힘들다. 셋째 부부간 폭행도 형벌이 개입하는데 그보다 훨씬 무거운 성폭행을 국가가 처벌하는 데 주저할 이유가 없다. 더구나 부부간 성폭행은 대부분 심각한 물리적 폭력 뒤에 나타난다.

부연하자면 지금까지 부부간 성폭행으로 기소된 사건들을 보면 차마 부부라는 말을 떠올릴 수 없을 정도로 잔인하고 심각한 폭력이 숨어있는 경우가 많다. 2차례 기사에서 사례로 든 사건도 성적 학대나 심한 폭행이 동반되어 누가 보더라도 명백한 범죄일 수밖에 없는 사건들이었다. 아내를 굴복시키는 수단, 혹은 부부 싸움 뒤 화해의 수단으로 성폭행을 이용한다는 것이었다(기사에서는 적나라한 내용을 차마 공개하지 못했다).

이제 대법원은 부부강간에 대한 명확한 입장을 밝혀야 한다.
 이제 대법원은 부부강간에 대한 명확한 입장을 밝혀야 한다.
ⓒ 김용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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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으로 생각하면 단순히 싫다는데 억지로 성관계를 맺은 정도로 형사사건이 될 가능성은 높지 않다는 말이다. 오히려 법이 개입하지 않았다면 더 큰 화를 불렀을 만한 사례들도 있다.
부부 강간을 둘러싸고 여성단체와 일부 학자들은 특별법을 제정하자는 주장을 하고 있다. 개인의견을 말한다면 반대이다. 성적 자기결정권을 침해하는 성폭력은 현행법으로도 충분히 처벌 가능하기 때문이다. 부부라고 해서 특별히 취급할 이유는 없다고 본다. 법을 제정하거나 바꾸는 것은 또다른 논란을 불러올 뿐이다.

정말 주목해야 할 것은 대법원의 태도이다. 대법원은 아직까지 부부강간 인정여부에 대해 직접적인 언급을 하지 않았다. 이제는 결론을 내려줘야 한다. 대법원이 그동안의 판례를 바꾸어 '부부간에도 성적자기결정권이 인정된다. 따라서 부부간 협박이나 폭행으로 간음하면 강간이 성립한다'는 선언을 하면 된다. 법이 아니라 법원이 바뀌면 해결된다.  

우리 사회는 가정의 상습 폭력 문제는 심각한 사회문제로 받아들이면서 부부간 성폭행에는 관대했던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어떤 논리로 정당화하더라도 결혼이 아내의 성을 강제로 소유하는 권리가 될 수는 없지 않은가.

조국 교수는 2004년 한 논문을 통해 아내 강간에 대해 의견을 밝힌 바 있다. 벌써 6년이 지났는데도 그 주장은 아직도 유효하다.

"아내 강간의 부정설은 아내의 몸과 성을 남편의 소유물로 보는 남성중심주의적 사고의 산물로 이제 폐기되어야 한다."


태그:#부부강간, #성폭행, #가정폭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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